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9 - 가기(歌妓) 계섬

從心所欲 2019. 4. 24. 19:58

심용과 그 일행이 평양감사 회갑연에서 펼쳤던 공연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당대의 평양 사람들에게는 내용 자체도

파격적이었던 것 같다. 신광수의 <관서악부>1’에 있는 연작시 108수 가운데 제 15수에 당시 평양에서 공연하던

이세춘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初唱聞皆說太眞 至今如恨馬嵬塵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처음에 노래 듣고는 다 태진(양귀비)을 말하는데

 마외언덕에서 죽은 태진의 죽음을 한하는 것 같다.

 일반 시조에 장단을 넣어 부르는 것은

 한양의 이세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제30호 예능보유자 진효준이 가곡을 부르는 모습을 찍은 예전 사진]

 

그러니까 이때 이세춘은 평양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선보인 것이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같은

노래만 듣던 사람들이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처음 들었을 때, 아니면 발라드만 알던 사람이 힙합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정도의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중한 가객의 노래 솜씨에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얹었으니 좌중을 압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기(歌妓)와 금객들이 평생의 기예를 다 베풀어 종일토록 놀았으니 서경(西京)의 가무하는 기녀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었다.”고 한 구절에 그런 뜻이 담아있을 듯싶다.

 

심용이 평양에 동행했던 예인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합천군수로 있던 시절 왜국에 통신사로 가는 조엄(趙曮) 일행2을 위로하는 연회 자리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날 심용이 이세춘, 김철석, 매월, 계섬을 처음 봤고 통신사를 위한 연회 자리가 파한 뒤에 가기(歌妓)와 악공들을 따로 불러 같이 어울려 춤추고 노래를 했다고 한다.

심용은 그 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을 수소문하여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후원자를 자청했다. 왜 자신들과

같은 미천한 신분을 가까이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심용은 자신은 관직이나 글 읽는 일에는 미련이 없고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 풍류나 즐기면서 살아가겠다고 답을 했다 한다.

 

함께 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간략한 소개가 전해지지만, 계섬(1736 ~ 1797 이후)에 대해서는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남긴 〈계섬전(桂蟾傳)〉덕분에 기녀로서는 드물게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경우다. 〈계섬전〉은 심노숭이 1797년 늙은 계섬의 불우한 인생유전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섬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계섬은 경사(京師)의 이름난 기녀로, 본디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의 노비였고 집안은 대대로 고을 아전을 지냈다.

사람이 침착하고 눈이 빛났으며, 7세 때 아버지가 죽고 12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6세에 주인집

구사(丘史)에게 창(唱)을 배워 자못 이름이 났다. 대사헌과 전라감사를 지낸  원의손(元義孫)이 계섬의 미모와 노래에

반해 자신의 소실로 삼았다. 원의손과 10년을 함께 했는데 어느 날 원의손의 모진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바로

인사하고 떠났다. 삼주(三洲) 이정보(李鼎輔, 1693 ~ 1766)가 노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과 기생으로 스스로 즐기며 지낼 때 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이정보는 계섬을 특히 사랑하여 늘 곁에 두고 그 재능을 기특히 여겼는데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계섬이 이정보의 집에 있을 때 원의손이 매번 문안을 드리러 와서는 이정보에게

계섬이 돌아오도록 권해 달라 부탁하고 여러 번 강권하였으나 계섬은 따르지 않았다.

 

계섬이 이정보 밑에서 악보를 보며 교습하여 여러 해 과정을 거치자, 계섬의 노래가 더욱 나아졌다. 노래를

때에는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이에 그 이름이 나라에

떨쳐져, 지방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권세가의 잔치 마당이나

한량들의 술판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럽게 되었다. 학사 대부들이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한 일이 많았다.“

 

이정보는 지금 78수의 사설시조가 전할 만큼 시에 능했지만 또한 직접 가르쳐 10여명의 가기(歌妓)를 양성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고 또 능했다. 그런 이정보가 1766년 5월, 세상을 떠나자 계섬은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다. 그 해 8월, 궁궐에 내연(內宴)이 있어 계섬은 여러 기생들과 함께 날마다 모여 연습을 해야 했는데,

계섬은 아침, 저녁으로 상가(喪家)를 오가며 빈소에 상식(上食)3을 올렸다. 오가는 거리가 멀었으나 관리들이

계섬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말을 빌려주기까지 하였으며, 또 곡을 하다가 목소리가 상할까 염려하였으므로

계심은 곡소리는 내지 않고 울었다고 한다.

장례가 끝나자 계섬은 음식을 마련하여 이정보의 무덤에 나아가 제를 올린 뒤, 술 한 잔에 노래 한 곡, 통곡 한번

하기를 하루 종일토록 하다가 돌아갔다. 이에 이정보의 자제들이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를 책망했다. 그러자 계섬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한을 한 뒤 다시는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량들과 노닐다가도 술이 거나해져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계섬의 나이가 서른하나였다

 

이정보가 죽은 뒤 계섬은 서울의 부자 상인인 한상찬(韓尙贊)과 살았는데 그가 거대한 돈을 들였는데도 계섬은

오히려 울울해하며 즐거워하지 않더니 결국 그를 떠났다.

그리고는 나이 40세에 관동에 좋은 산수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비녀와 가락지, 옷 등을 팔아 정선군 산중에 밭을 사서 집을 짓고 떠나려 했다. 소식을 듣고 예전에 같이 풍류를 즐기던 한양의 자제들이 계섬을 만류하였다.

이에 계섬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환담을 나눈 뒤 “내가 지금 늙지 않았을 때 여러분을 버려, 내가 늙었을 때 당신들이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고는 그날로 한 필의 말을 타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계섬은 짚신을 신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꼭대기와 물가를 오가며 밤낮 불경을 외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1776년 가을, 정조가 홍국영에게 구사(丘史)4를 하사하였는데 계섬이 그 명단에 들어있었다. 나라에서 조첩을 내려 계섬을 계속 재촉하였기에 계섬은 41세에 정선을 떠나 홍국영의 구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홍국영을 따라 잔치에

다녔다. 잔치 자리를 가득 메운 경대부들은 계섬이 노래를 부르면 다투어 금백(金帛)5을 내렸다. 하지만 계섬은 후일에 이를 비웃었다.

“그 자들이 어찌 나의 재주를 아끼고 소리를 감상해서 그랬겠는가? 자리 주인에게 아첨한 것이다. 세상살이 모두 한바탕 꿈과 같은데 홍국영 당시의 일은 진짜 한번 웃을 만 하였으니, 꿈에도 손뼉을 치며 깔깔 웃기를 그치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1781년 홍국영이 권력에서 쫓겨나자 계섬은 기적(妓籍)을 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산속에 돌아가려 했으나, 

심용(沈鏞)이 계섬을 잡았다. 그래서 계섬은 정선 대신에 심용의 집이 있는 경기도 파주 부근 사곡촌6에서 살게 되었다.

 

[원행을묘정리소계병 8폭 中 1폭 -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7  63×153㎝]

 

[봉수당진찬도 中 부분]

 

심용은 말년에 파주 사곡촌에서 계섬과 함께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계섬전>을 쓴 심노승은 심용과

본관도 같은데다 인척관계였고 집이 같은 파주에 있어 자주 왕래하였다. 한번은 심용이 심노승을 반갑게

맞이하여 함께 술을 주고받은 뒤에 계섬이 노래를 하는데,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부르는 것처럼

황홀했다고 한다. 심노승은 계섬의 집도 한번 가볼 기회가 있었다.

 

“계섬의 집은 심용의 집 뒤 산속에 있는데 나무를 엮어 울을 삼고 바위를 쪼개어 섬돌을 삼고 오륙칸 되는

초가집에 난간을 빙 둘렀고 방안에는 병풍, 안석, 술동이, 그릇 등을 늘어놓은 것이 화사하고 깔끔하여

볼만했다. 집안에 조그만 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었고 마을 안에 논 몇 마지기를 남에게 부쳐 거기서 나는

쌀로 자급하였다. 마늘과 고기를 끊고 날마다 방안에서 불경을 외우니 마을 이웃들이 보살이라 일컬었고,

스스로도 보살로 살아갔다.”

 

계섬이 62세이던 1797년, 하루는 계섬이 나귀를 타고 심노승을 찾아왔다. 나이가 62세였는데도 머리가 세지

않고, 말이 유창한데다 기운도 씩씩했다. 자신의 평생을 이야기하다, 문득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사는 즐거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되 부귀는 거기에 들지 않더군요. 가장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진정한

만남이었습니다.”라고 했다한다. 계섬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밭을 사서 조카에게 맡겨 그 부모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자신은 죽으면 화장시켜 달라고 하였다.

계섬은 죽을 때까지 심용의 묘를 지켰다. 절개를 우습게 여기고 재물을 탐하는 기생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급한 풍류는 권력이나 돈으로 상대를 꺾어 차지하고, 고급한 풍류는

상대의 마음을 얻어 후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최상의 풍류는 맑고 깨끗하다고 한다. 심용이 가객, 기생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마음으로 대했기에 그들도 심용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을 보였을 것이다.

 

「병와가곡집(瓶窩歌曲集)」8에는 계섬의 것으로 알려진 시조 한 수가 전해진다.

 

【청춘은 언제 가고 백발은 언제 왔나.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았으리.

 알고도 못 막을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그 시절이 절정이었네. 노래기녀 계섬이(이지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

(2011, 권순긍, 신동흔, 이형대, 정출헌, 조현설, 진재교)

 

  1. 신광수가 1774년에 지은 한시로 평양 감사 채제공(蔡濟恭)의 생일잔치에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 이 시를 지어 강세황의 친필로 써서 보냈다. 칠언 절구 108수로 되어 있는 장편의 연작시인데 평양과 그 주변 관서 지역의 생활 풍속이나 명승(名勝), 산천(山川), 누대(樓臺), 고적(古蹟), 유물, 역사, 인물 등을 두루 망라하여 읊었다. (고전문학사전, 2004, 권영민) [본문으로]
  2. 기록에 의하면 조엄이 통신사로 파견된 것은 1763년으로, 이때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 동래(東萊)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하게 하여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궤연 앞에 올리는 음식 [본문으로]
  4. 임금이 종친과 공신에게 구종(驅從)으로 준 관노비 [본문으로]
  5. 금과 비단 [본문으로]
  6.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7. 화성에서 열린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그린 병풍. 계섬이 선창여령으로 참석했다 [본문으로]
  8.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편찬한 가곡(歌曲)의 사설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책에 실린 시조작품 중에 영조 때 인물의 작품이 나오는 점과 곡목마다 끝에 이정보(李鼎輔)의 작품이 수록된 점으로 보아 숙종 말에 이형상의 초고본에 뒤에 두서너 사람이 더 가필하여 정조 때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연대는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