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11 - 풍류의 소양

從心所欲 2019. 4. 30. 22:40

풍류객 심용이 죽었을 때 모인 예인들이 “공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 중에서 우리를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또

소리를 아는 사람이었소.” 라고 했다. 이 말은 풍류를 즐기는 선비와 사대부들 중에서도 음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예인들의 음악을 즐길지언정 그들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사람도 드물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정보나 서평군 정도로 음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갖는 것은 특별한 경우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예인들은

중인, 양인 때로는 천민 출신까지 있었으니 많은 사대부들은 그들을 아랫것 정도로 여기고 대했을 것이다.

심평이나 서평군처럼 그들과 가까이 하여 어울리는 것은 양반으로서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정수영, <백사회(白社會)야유도>, 1784, 지본담채, 31 × 41cm, 개인소장]

 

[정황, <이안와수석시회도(易安窩壽席時會圖)> 1789년, 지본담채, 25.3cm x 57.0cm 개인 소장]

 

이세춘과 계섬 일행이 평안감사 취임연에 가서는 신명나게 공연하고 전두까지 두둑이 받아왔지만 그들이 늘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세춘 일행이 이판서로 알려진 어느 집에서 공연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 공연을 보았던 다른 대감이 그 뒤에 자기 집에서도 공연을 해달라고 이세춘 일행을 초청했다. 그래서 일행이

대감 집에 도착했는데 그들을 대하는 대감의 태도가 매우 무례했다. “노래 부르라”고 명령조로 말하는가 하면

술대접에도 안주라고는 마른 포를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시세말로 김이 샌 이세춘 일행이 마지못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판서 댁에서는 노래가 시원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낮고

느즈러졌다. 내가 음악을 모른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냐.”

그러자 추월이 나서서 대감을 진정시켰다. “처음이라 그렇사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흔드는 소리로 금방 울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일행들과 눈짓을 나눈 뒤 대뜸 우조(羽調)로 잡사(雜詞)를

시작했다. 무조건 큰 소리로 잡스러운 가사를 질러댄 것이다. 음악을 들을 줄 몰랐던 대감은 부채로 책상을 치며

“맞아! 노래는 이렇게 부르는 거야”라고 외쳤다 한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가객과 금객들이 이런 대접을 받았을 정도니 다른 악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1791년경, 지본담채, 25.6 × 31.8㎝]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1791년경, 지본수묵, 25.6 × 31.8㎝]

 

유우춘(柳遇春)은 정조 때 한양에서 이름이 높았던 해금(奚琴)의 명수였다. 현감을 지낸 유운경이라는 인물과

어느 대감집의 여종으로 있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당시의 신분제도에 따라 나면서부터 노비의 신분이었다.

후에 이복형이 되는 유운경의 아들이 빚을 내 속량(贖良)시켜주어 비로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뒤 용호영(龍虎營) 소속의 해금악사가 되었다.

해금악사가 된 이상 최고의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유우춘은 밤낮 없이 해금 연습에 몰두하여 손에

피가 나고 못이 박히도록 연마하여 장안에서 큰 이름을 얻었다. 소문난 잔치에 그의 해금이 없으면 모두 허전해

하였고, 유우춘을 초청해서 연주를 듣는 것은 좋은 음악을 감상하는 일의 대명사처럼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유우춘에 대하여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奎章閣) 초대 검서관(檢書官)의 일원으로, 서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만년에 정3품까지 올랐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유우춘전(柳遇春傳)」을 남겼다.

 

유득공이 해금과 유우춘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유득공이 어쩌다 얻게 된 해금을 들고 평소

가까이 지내던 서상수를 찾아갔다. 서상수(徐常修, 1735 ~ 1793 )는 음악과 고전에 대한 교양이 깊었고

특히 골동품 감정에 있어서는 연암 박지원이 당대 제일이라고 칭송하던 인물이었다. 박제가의『백탑청연집

(白塔淸緣集)』서문(序文)에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연암 박지원의 집)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상수의 집은 유득공의 집과

매우 가까워 옆집 놀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들린 듯하다. 유득공이 서상수 앞에서 들고 간 해금으로 벌레와

새들의 울음소리를 내어보았다. 그랬더니 서상수가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좁쌀이나 한 그릇 퍼주어라. 이건

거렁뱅이의 깡깡이다.” 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유득공에게 해금에 대하여 일장 훈시를 했다.

유득공은 그 일에 크게 부끄러워 해금을 싸서 치워버리고는 여러 달 동안 풀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우춘의 이복형이 유득공을 찾아왔다. 유득공과는 종씨로 전부터 친분은 있었으나 유득공은

그가 유우춘의 형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가 그 날 집안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 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후 유득공이 유우춘의 집을 찾아가 만났고 그 후로 유득공과 유우춘이 서로 왕래를 하였다. 그러다

유우춘의 이복형이 귀향한다고 해서 유우춘이 자신의 집에 술상을 차리고 유득공도 초청을 했는데 그 때

유득공은 자루 속에 해금을 넣어가지고 가서 술을 마시다 해금을 꺼내 들고는 유우춘에게 물었다.

“이 해금이 어떤가? 나도 전에는 자네가 잘하는 이 해금에 마음을 붙여보았는데 무턱대고 벌레나 새 울음소리를

내다가 남들에게 ‘거렁뱅이의 깡깡이’라고 비웃음을 샀다네. 마음에 겸연쩍었지. 어떻게 하면 거렁뱅이의

 깡깡이를 면할 수 있을까?”  그러자 유우춘이 손벽을 치며 크게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심하군요. 선생의 말씀이여! 모기가 앵앵대는 소리,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 쟁이들이 뚝딱거리는 소리, 선비들이 개굴 거리는 소리, 천하의 모든 소리들은 다 법을 구하는데 뜻이 있지요. 내가 타는 해금이나 거지가 타는 해금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이 해금을 배운 까닭은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신통치 못하면 어떻게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내 해금 솜씨는 저 거렁뱅이보다 못하답니다. 저 거렁뱅이 솜씨는 묘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지요. 내 해금이나 저 거렁뱅이의 해금은 같은 재료입니다. 말총으로 활을 매고 송진을 칠하였으니 비사비죽이요, 타는 것도 아니고 부는 것도 아니랍니다.

내가 처음 해금을 배우기 시작한지 3년 만에 이루었는데 다섯 손가락에 다 못이 박였지요. 기술이 더욱 높아 갈수록 급료는 늘지 않고 사람들은 더욱 몰라주었답니다. 거렁뱅이는 허름한 해금을 한 벌 가지고 몇 달 만져본 것만으로도 듣는 사람이 겹겹이 둘러서고 해금을 다 켠 뒤에 돌아가면 따라붙는 사람만도 수십 명인데다 하루벌이가 말 곡식에 돈도 한 움큼 모인다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지금 유우춘의 해금을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다지만 이름만 듣고 알 뿐이지. 정작 해금을 듣고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습니까. 종친이나 대신이 밤에 악공을 부르면 저마다 악기 하나씩을 안고 가서 허리를 굽히고 대청으로
올라가 앉지요. 촛불을 환히 밝혀 놓고 집사가 ‘잘하면 상이 있을걸세.’라고 하면 우리들은 그만 황공해서 ‘예이.’하고 연주를 시작하지요. 현악과 관악이 서로 맞추지 않아도 길고 짧고 빠르고 느린 것이 아득히 절로 맞아 돌아가는데 숨소리 잔기침 하나 문 밖으로 새나오지 않을 즈음에 곁눈으로 슬쩍 보면 주인은 잠자코 안석에 기대어 졸음이나 청한답니다. 이윽고 기지개를 켜며 ‘그만두어라’하면 우리는 ‘예이.’하고 물러나지요.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제가 타는 것을 제가 듣다가 돌아왔을 뿐인데도 저 논다니 귀공자와 우쭐대는 선비들의 맑은 담론, 고상한 모임에는 일찍이 해금을 안고 끼이지 않은 적이 없다오. 저들이 문장을 평론하기도 하고 과명을 비교하기도 하다가 술이 거나해지고 등잔의 불똥이 앉을 무렵에는 뜻이 높고 태도가 심각해져 붓이 떨어지고 종이가 날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고 묻지요.
‘너는 해금의 시초를 아느냐?’ 내가 황망히 몸을 굽히고, ‘모르옵니다.’라고 대답하면 ‘옛적 해강이 처음 만들었느니라.’하지요. 내가 또 얼른 몸을 굽신하고 ‘예에. 그렇습니까.’하면 누군가 웃으면서 ‘아닐세. 해금은 해부족의 거문고라는 뜻이지. 해강의 해자가 당키나 한가.’라고 하지요. 이렇게 좌중이 분분하지만 그게 대체 나의 해금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 가령 봄바람이 화창하게 불고 복사꽃 버들개지가 흩날리는 날 시종별감들과 오입쟁이 한량들이 무계의 물가에서 노닌다면 침기(針技)와 의녀들이 높이 쪽찐 머리에 기름을 자르르 바르고 날씬한 말에 붉은 담요를 깔고 앉아 줄을 지어 나타난답니다. 놀이와 풍악이 벌어지는 한편에선 익살꾼이 신소리를 늘어놓지요.
처음에 <요취곡(鐃吹曲)>을 타다가 가락이 바뀌어 <영산회상>이 울리게 되는데 손을 재게 놀려 새로운 곡조를
켜면 엉켰다가 다시 사르르 녹고 목이 메었다가 다시 트이지요. 쑥대머리 밤송이 수염에 갓이 쭈그러지고 옷이
찢어진 꼬락서니들이 머리를 끄덕이고 눈깔을 까막거리다가 부채로 땅을 치며, ‘좋다! 좋아!’ 하지요. 그 곡이 가장 호탕한 것처럼 여기고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줄은 모른답니다.

내 동료 궁기(宮其)와 한가한 날 서로 만나서 해금 자루를 끌어 해금을 어루만지며 두 눈을 하늘에 팔고 마음을
손가락 끝에 두어 털끝만치라도 잘못 켜면 크게 웃으며 한 푼을 냅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다 돈을 많이 잃어본
적은 한 번도 없지요. 그러니 내 해금을 알아주는 자는 궁기, 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궁기가 내 해금을 아는
것이 내가 나의 해금을 아는 만큼 정확하지는 않지요.

이제 선생이 공력을 적게 들이고도 세상 사람들이 금방 알아주는 것을 버리고 공력은 많이 들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구태여 배우려 하시니 정말 딱하십니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양반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탄이 절절하다. 그는 그런 처지가 정말로 싫었던 듯 뒤에 늙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해금을 연주하러 다니지 않았다 한다.

그런 유우춘이 자신의 해금을 알아주는 사람은 궁기,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옛 고사성어에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말이 있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뜻으로 내력은 이렇다.

예전 중국 춘추시대에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이 높던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주는 종자기(鍾子期)라는 친구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을 그려내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자기는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 하고, 큰 강을 그리며 연주하면  ”훌륭하다! 넘칠 듯이 흘러가는 느낌이 황하(黃河)로구나!“ 하고 탄성을 연발했다고 한다. 이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와 감상자 사이였는데, 그만 종자기가 병으로 먼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절망한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지기(知己)를 가리켜 지음(知音)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제가 타는 것을 제가 듣다가 돌아왔을 뿐”이라는 유우춘의 자조(自嘲)도 결국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주는 귀가 없음을 한탄함이다. 오래 전에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저녁자리에 이생강 선생을 모셔 연주를 들은 일이 있었다. 대금 산조와 귀에 익은 민요 몇 곡을 연주했는데 청중의 반응이 마뜩찮았던지 아니면 외국인을 위한 배려에서인지 선생이 대금으로 색소폰 소리를 흉내내어 ‘Danny Boy'를 연주하셨다. 곡이 끝나자 앞선 곡들보다 훨씬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어쩌면 선생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우춘과 같은 한탄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이생강 대금산조 진양조]1

 

유득공은 ‘우춘의 말에 “솜씨가 나아질수록 사람들이 더욱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 것이 어찌 해금뿐이랴.’ 라는

말로 「유우춘전(柳遇春傳)」2을 마쳤다.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창악집성(2011, 하응백)

 

 

  1. 진양장단에 맞추어 연주되는 산조(散調)의 첫째 악장(樂章)이다. 중모리, 자진모리와 함께 산조틀의 기본 뼈대이다. 진양조 악장은 리듬의 변화보다도 농현(弄絃)과 여러 조바꿈에 따르는 가락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한겨례음악대사전) [본문으로]
  2. 유득공(柳得恭)의 '영재집(泠齋集)' 권10에 실려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