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13 - 양반에서 중인으로

從心所欲 2019. 5. 9. 11:14

 

[긍재 김득신, 풍속팔곡병(風俗8曲屛) 제1폭 <사대부행락도(士大夫行樂圖)>. 1815, 호암미술관]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런지 다산 정약용이 말을 타고 달린다는 것은 사극에서나 나올 장면처럼

잘 상상이 안 되는 일인데, 그가 남긴 <유세검정기(游洗劍亭記)>에는 그가 말을 타고 달린 기록이 나온다.

그것도 풍류를 즐기러 가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세검정이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란 소나기가 내릴 때 폭포처럼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면 대개 수레를 적셔가며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고, 비가 갠 후에는 계곡의 물

역시 이미 그 기세가 꺾이고 만다. 이 때문에 세검정은 도성 근처에 있는데도, 성 안사대부 가운데 정자가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를 만끽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해년(정조 15년, 1791년) 여름날, 나는 한혜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남부 명례방(明禮坊)1에 모였다.

술이 여러 잔 돌고 나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확 올라오면서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나기가 내릴 징조네. 함께 세검정에 가 보지 않겠나? 만약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꺼번에 벌주(罰酒) 열 병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 "이를 말인가!"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부를 재촉해 창의문을 나서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더욱 힘껏 말을 달려 세검정

아래에 당도하니, 수문(水門) 좌우의 계곡에서는 고래 한 쌍이 물을 뿜어내듯 이미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옷소매 역시 빗방울에 얼룩졌다.

세검정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난간 앞 수목은 이미 미친 듯 흔들리고 한기가 뼈 속을 파고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요란하게

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흘러내리고 돌이 굴러 물 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이 세검정 주춧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물살의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맹렬해 정자의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자, 모두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내가 "어떠하냐?"고 묻자,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와 익살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놀았다. 시간이 지나자 소낙비도 그치고 구름도 걷히면서 계곡물 역시 점차

잔잔해졌다. 저녁나절이 되자 지는 해가 나무에 걸려서 붉으락푸르락 천만 가지 형상을 띠었다. 서로 팔을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한참 지나 이 소식을 들은 심화오가 허겁지겁 쫓아왔다. 그러나 이미 물살은 잔잔해진 뒤였다. 처음

심화오더러 함께 오자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뒤늦게 달려온 그를 두고 조롱하며 약을

올렸다. 심화오와 함께 술을 한 차례 돌려 마시고 돌아왔다. 당시 그 자리에는 홍약여, 이휘조, 윤무구도

함께 있었다;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 한양진경도첩 中 <세검정>]

 

 

[일본지리풍속대계 속의 세검정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역시나 정약용이 즐기던 풍류는 담백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선비다운 느낌을 준다. 이 때 정약용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담백하기로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풍류도 못지않다. 홍대용은

유학자이자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보다는 6살이 위였지만 서로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박지원은 <하야연기

(夏夜讌記)>에 이렇게 적었다.

 

스무 이튿날, 국옹(麯翁)과 더불어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갔다. 밤에 풍무(風舞) 김억(金檍)이 왔다.

홍대용이 가야금을 타니, 김억이 거문고로 화답했다. 또한 국옹은 갓을 벗고 맨 상투 차림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가자 떠다니는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와 후덥지근한 기운이 잠깐이나마 물러갔다.

그러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더욱 맑게 들려왔다. 주변이 고요하고 모두 조용히 앉아 있어, 도사가

도를 닦고 승려가 참선하는 듯했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움이 없다면 삼군(三軍)의 대군일지라도 가서 대적할 수 있다고 하더니,

국옹은 한창 흥취에 젖어 노래를 할 때는 옷을 벗어젖히고 두 다리를 쭉 뻗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매탕(梅宕) 이덕무가 언젠가 처마 밑에서 왕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고, 때로는 재빨리 움직이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보였습니다.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 주는 모습과도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눌러

연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홍대용이 김억과 어울려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이덕무가 말한 왕거미의 거미줄 치는

모습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담헌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인 연익성과 거문고

연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 동쪽 하늘에서 구름이 시커멓게 물들어왔다. 천둥

번개가 한 번 내려치면 용이 바로 하늘로 올라 비를 퍼부을 듯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익성에게 "이 천둥소리는 궁상각치우 가운데 무슨 소리에 속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천둥소리에 맞춰 거문고 줄을 당겨 조율했다. 나 또한 '천뢰조(天雷操)'라는 거문고 곡의 가사를 지었다.

 

풍류의 정신이 음악으로 나타난 것은 이른바 풍류라고 일컫는 여러 가지 음악을 통해서이다. 지금 풍류음악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줄(絃)을 연주하는 악기, 특히 거문고가 중심이 되는 줄풍류와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가 편성의

중심이 되는 대풍류, 향피리 위주로 편성되는 삼현육각의 사관풍류(舍館風流) 등이 있다. 여기에 성악으로 하는

가곡, 가사, 시조가 덧붙여진다. 줄풍류나 가곡, 가사, 시조는 비전문인이 즐기기 위하여 하던 교양음악이고,

대풍류의 여러 가지는 춤 반주나 거상악(擧床樂)2 또는 행악(行樂)으로 쓰이던 것으로 ‘잽이(또는 잡이)’라고 하는

전문인이 하던 음악이다. 이 중에서 특히 풍류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음악은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노래, 그리고

줄풍류 편성의 반주를 함께 하는 가곡인데, 이 음악은 주로 사대부들이 교양으로 하던 음악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지식과 재부(財富)를 겸한 중인층이 시회(詩會)나 가단(歌壇)을 형성하여 새로운 풍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흔히 이 시대에 여항인(閭巷人)으로 대변되는 중인 계층이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사대부와

같은 시간적 여유를 누리면서 과거 양반 사대부들의 점유물이었던 문예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여 문학, 회화,

음악 등의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김윤겸, <필운대(弼雲臺)>, 1770, 지본담채, 27.7 x 38.8 cm, 개인소장]

 

 

여항인들의 문예 활동은 주로 시사(詩社)3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사는 ‘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읊는

장소’를 말하는데 넓은 의미로는 그 모임 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이 시사에서 시인들이 모여 거문고를 뜯고,

젓대를 불고 시를 지으며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즉 시사란 시 창작을 위한 동인적 결사체인 동시에 풍류의

현장이었다. 여항인들의 시회는 그 시작이 16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한양을

중심으로 활발해졌다.

풍월향도, 육가시사, 낙사시사 같은 시사를 거쳐 1786년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을 중심으로 결성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4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중인들의 여항시사로 그 명성이 한껏 높아져, 조희룡이

“세상의 시를 아는 사람들은 젊은이 늙은이를 가리지 않고 송석원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 뒤로는 서원(西園)시사, 비연(斐然)시사, 직하(稷下)시사, 육교(六橋)5시사 등이

송석원시사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松石園 각자(刻字)6라는 작은 글씨를 통해 이 글씨를 1817년 4월, 추사 김정희가 나이 32세 되던 해에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화콘텐츠닷컴 사진]

 

그림에서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을 비롯하여 이인문, 김응환, 최북, 전기, 유숙, 김득신, 김후신 같은 인물이 있어

조선 후기의 회화사를 장식했고 음악에서는 김천택, 김수장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김천택(金天澤)은 숙종 때 포교를 지냈고 창에 뛰어났다. 시조도 잘 지어 『해동가요』에 57수를 남겼고,

1728년에는 역대의 시조 자료를 집성하여 편찬한 시가집 『청구영언』은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천택은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과 더불어 당시의 가악(歌樂)계를 대표하던 인물로서 많은 가인·

가객들과 교유하면서 시조에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때까지 시조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학자, 문인의 시조가

한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도학적, 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조는 제재를 일상생활

속에서 찾았고, 그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해학이 풍부하였다.

김천택이 여러 악사와 가객, 여항시인들과 더불어 친목을 도모하고, 지난 시대의 가악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뜻을 같이하여 어울린 인물들을 후세 학계에서는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7’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반면  

김수장을 중심으로 김유기, 김성기, 김우규, 김두성 등을 비롯한 시인과 가인이 모여 형성한 가단(歌壇)은

‘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8’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가작(歌作), 가창(歌唱)과 그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며 연주 활동과

친목을 도모했으며.『해동가요(海東歌謠)』와 『청구가요』를 편찬했다.

김천택과 김수장은 당대 가단의 양대 거목으로 김천택이 얼마간 보수적이고 완고했던 것과는 달리, 김수장은 호방한

기질로 성정(性情)의 자유를 희구하며 이를 노골적으로 시조에 드러냈다, 노가재가단은 풍류인들의 집결장이자

가객들의 교습장, 후배 양성의 도량 역할을 하며 당시 가악계의 중추로서 시조 문학의 창작과 창(唱)의 발달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이 창작하고 정리한 가곡들은 후학들에 전승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참고 및 인용 :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2007,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원형백과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1.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지금의 명동, 회현동, 충무로, 남대문로 일대. [본문으로]
  2. 왕궁이나 양반들의 연회 때 연회 상을 받기 전에 먼저 연주되는 음악 [본문으로]
  3. 시계(詩禊) 또는 수계(修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일명 옥계시사(玉溪詩社)로도 불린다. 송석원(松石園)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지역의 옥류동 계곡에 있던 천수경이 살던 집의 이름이자, 그 주변 지역 [본문으로]
  5. ‘육교’는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 번째 다리인 광교의 별칭 [본문으로]
  6. 송석원 근처의 바위에 새긴 글자로, 松石園 각자 왼쪽에는 ‘정축청화월소봉래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 [본문으로]
  7. 경정산(敬亭山)은 중국 안휘성 북방의 높은 산 이름으로, 이백(李白)의 ‘중조고비진(衆鳥高飛盡) 고운독거한(孤雲獨去閑) 상간우불염(相看雨不厭) 지유경정산(只有敬亭山)‘ 이라는 시구로 널리 알려졌다. [본문으로]
  8. 김수장이 71세 되던 해인 1760년에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지은 ‘노가재(老歌齋)’에서 유래된 명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