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인(中人)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들이 주로 살던 거주지가 한양의
중간 지대이므로 중인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당파에 속하지 않은 중립적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중인이 됐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간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중인이라 불렀다는 설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중인의 형성 시기는 중인 족보가 한말(韓末)부터 거슬러 올라가 10대까지 추적되고, 또 중인 스스로도
300년 설을 내세웠으므로, 16세기 후반부터 세습화의 길을 걷고, 17세기에 하나의 계층으로 성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신분제는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전란 중의 노비문서와
군적, 호적 등이 소각되고 분실되면서 많은 수의 도망 노비와 유랑민이 생겨났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집권층 양반사대부의 무기력함은 피지배층에게 실망과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신분제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의식의 변화도 싹트기 시작했다. 소수 양반들의 토지 사유화가 계속되는 한편에서는 몰락 양반이 늘어났고,
반면 농사법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양민들의 숫자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 결과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보듯 족보를 거래하여 신분을 사고파는 일들도 생겨났다. 이런 거래가 민간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다음 해인 선조 26년인 1593년, 호조(戶曹)의 건의로 납속사목(納贖事目)1을 결정하여 시행한 일이
있다. 대상자는 향리, 서얼, 사족이었는데 그 내용은 국가에 쌀이나 포(布)를 헌납하면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중인인 향리(鄕吏)가 쌀 30석을 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2의 영직(影職)3을 준다고
하였는데 참하영직은 비록 명예직이지만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또한 40석이면 그의
자식 두 명까지 역을 면하여 참하의 영직을 제수하고, 45석이면 상당한 군직(軍職)을 주고, 80석이면 동반의
실직을 제수하였다. 즉 80석이면 실제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얼(庶孼)의 경우는, “5석이면
겸사복(兼司僕)4, 우림위(羽林衛)5 혹은 서반 군직(西班軍職)의 6품을 주고, 15석이면 허통(許通)6하고,
20석이면 이전에 난 자식까지 허통하고, 30석이면 참하의 영직을 제수하고, 40석이면 6품 영직, 50석이면 5품
영직, 60석이면 동반 9품, 80석이면 동반 8품, 90석이면 동반 7품, 1백 석이면 동반 6품을 제수한다”고도 하였다.
더 나아가 1594년과 1595년에 실시한 납속에서는 그 대상을 평민에게까지 확대하여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명첩(空名帖)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관리 임명장이다.
왜란과 호란, 거듭된 흉년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나라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공명첩을 가지고 다니다가 돈을 내는 사람에게 빈 칸에다 이름을 써서 관직을 주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을 한 것이다. 선조는 물론 현종, 숙종 때에도 여러 차례 시행되었는데,
「숙종실록」에 의하면 숙종 16년인 1690년에는 그 규모가 경악할 수준이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진휼을 위하여 가선, 통정, 첨지.......첨사, 만호 등 공명첩 2만장을 8도에 나누어 팔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나라 전체의 관직은 실직(實職)과 산직(散職)7을 합하여 총 5,605개다. 그런데 아무리
이름뿐인 관직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2만개의 관리 임명장을 새로 발급한 것이다. 계속 발행되다보니 가치가
떨어져 공명첩의 가격이 점점 내려가는 바람에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납속이나
공명첩을 통해 얻은 관직은 호적에 기재할 때 그 사실도 함께 기재하도록 되어있지만, 관리와 짜고 그런 사실은
누락시키고 관직만 기재함으로써 신분을 위조하는 일들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 양반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일례로 대구 지역의 경우 1690년에는 양반 9.2%, 양민 53.7%,
노비 37.1%의 비율이었던 것이, 약 100년 뒤인 1783년에는 양반이 37.5%, 양민 57.5%, 노비 5.0%의 비율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또 70년 뒤인 1858년에는 양반의 비율이 70.3%까지 올라가고 노비는 1.5%로 줄어들었다.8
이런 와중에도 시류를 타지 못하여 여전히 신분 상승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양반의 가치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양반이 되어야 사람 취급을 받고 살 수 있는 사회다. 그 양반에 가장 가까운 신분이
중인이다. 저들은 한자도 배우고 학식도 있지만 타고난 신분 때문에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신분의 상승 통로가 막히고 계층적 동질성이 분명해지면 신분상승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중인 계층이 신분 상승 노력을 전개한 것은 18세기부터이다. 한의사와 통역관 등 의역중인(醫譯中人)이 중심이
되어 경제적 기반 확대를 꾀한 것이나, 기술직 중인들은 청에 파견되는 사신들인 연행사(燕行使)를 수행하면서
사적인 무역을 통하여 부의 축적을 이루었고, 이들이 여항문학을 통하여 결집하고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시계회를 연 것 또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문화 예술 차원에서 분출한 것이다.
원래 한문학(漢文學)은 양반사대부들이 한자를 빌려 그들의 정서와 생활감정을 표현한 상층계급의 예술 활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시(漢詩)는 시조와 함께 대표적인 귀족문학이었다. 따라서 학계와 문단은 양반전유의 장이었다.
시사(詩社)는 양반사대부들만의 조직이고, 시집(詩集)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8세기부터 양반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 상인과 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면
이들의 한문학 활동이 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항(閭巷)은 ‘인가(人家)가 모여 있는 곳’,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 이라는 뜻이고,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나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데. 민가의 초라함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시에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委巷人)이라 지칭한 예에 따라 편의상 위항문학, 또는 여항문학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중인들이 주로 살던 곳은 한양의 중심부인데 이것도 남부와 북부로 구별되었다. 종로 이남의 광교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남부이고, 그 이북에서 인왕산 필운대까지가 북부였다. 남부는 기술직 중인이 대대로 살아온
부촌이라 베풀기 좋아하는 풍속이 있었고, 북부는 가난하지만 의협적 기풍이 있어 의기로 교유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인왕산 필운대의 경승지를 중심으로 시인ㆍ문사들이 모여 풍류를 즐긴 곳이 바로 북부였고,
이곳이 여항시인들의 중심 무대였다.
『완암집(浣巖集)』은 후기 여항시인 정래교(鄭來僑, 1681~1757)의 시문집이다. 여기에는 임준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이 자못 옛날이야기나 다름이 없다.
서울 사람의 생활 풍속은 남부와 북부가 다르다. 종로 이남에서 남산에 이르는 곳이 남부인데, 상인과 부호들이
많아서, 재산과 이익 따지기를 좋아하여 인색하고, 집과 말(馬)로 호사를 다툰다. 북악산 백련봉 서쪽에서
인왕산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대개 집들이 가난하여, 놀고먹는 부류들이 살았지만, 왕왕 의협심 강한 무리가
있어 의리로 사귀되,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약속을 중히 여기며 재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 우환이 있는
사람을 위로하였다. 시인 문사들은 철마다 회동하여 숲과 샘, 구름과 달을 찾아 노니는 즐거움을 좇으며, 곧잘
시편이 많음을 자랑하고 아름다움을 겨루었다. 이 또한 자연 풍토와 날씨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임준원은 자가 자소(子昭)이고, 대대로 서울의 북부에 살았다. 사람됨이 인품이 높고 기개가 있으며 혈색이
좋은데다 말까지 잘했다. 젊었을 때는 귀곡(龜谷) 최기남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자못 시를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준원은 집안이 가난한데다 노친이 있어, 뜻을 접고 내수사의 아전 구실을 하였다.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어 사무에 밝았다. 내수사의 신임을 받고 왕성한 활동으로, 자수성가 하여 재산이 수천금에 이르렀다.
이에 준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미 나에게는 넘치는 부(富)이거늘, 어찌 세상사에 골몰하랴?” 하고는, 곧
사직하고 스스로 문사(文士)로써 즐겁게 지냈다. 날마다 동류들과 시회를 가져, 섬돌에는 신발이 늘 가득하고
술상이 끊이지 않았다.
그 동류들은 유찬홍, 홍세태, 최대립, 최승태, 김충렬, 김부현 등이었다. 유찬홍은 호가 춘곡(春谷)으로 바둑을
잘 두었고, 홍세태는 호가 창랑(滄浪)으로 시를 잘 지어 당시에 명성이 높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기개가
좋거나 문예가로 출중한 면모를 보였다.
그런데 유찬홍은 술을 좋아하여 한 번에 여러 말의 술을 마셨고 홍세태는 가난하여 연로한 모친을 봉양할 수가
없었다. 준원은 유찬홍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는 좋은 술을 대접하며 양껏 마시도록 해주었고, 홍세태를
자주 도와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언제나 좋은 계절과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여러 사람을 불러 장소를 정해 만남을 약속했다. 준원이 중심이
되어 술과 안주를 준비해 왔고 시를 읊으며 취하도록 마시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이런
모임을 상시적으로 오랜 기간 가져왔는데, 서울에서 자못 재명(才名)이 있다 하는 사람이라면, 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준원은 재산이 넉넉한데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고 베풀기를 즐겼지만, 늘 남 돕는 것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가난하여 혼인이나 상장을 치르지 못하는 친척이나 벗이 있으면, 반드시 준원에게 의뢰하였다. 그래서 그가
평소에 집에 있거나 나다닐 때면 안부를 묻고 아들처럼 대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어느 날 준원이 육조
거리를 걸어갈 때 일이다. 한 여자가 포졸에게 끌려가고, 못된 녀석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여자는 몹시도 서글피 흐느꼈다. 준원이 그 까닭을 묻고 꾸짖어 말하기를, “하찮은 빚 몇푼 때문에 아녀자를
어찌 이토록 욕보인단 말이냐?” 준원을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준 다음 빚 문서를 찢어 없애고 가버렸다.
여자가 급히 쫓아가 물었다.
“성함도 모르옵니다. 나으리는 뉘시며, 살고 계신 댁은 어디신지요?”
“예법에 남녀가 길을 비켜 간다고 했소. 내 이름은 물어 무엇 하오?”
여자가 굳이 가르쳐달라고 애원했으나,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그의 이름이 널리 민간에 퍼져,
그의 협기를 사모하여 한번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의 문전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귀곡 최기남이 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형편이 어려워 초상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문도(門徒)들이 모여서 초상을 치르고자 해도
관을 부조할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준원은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고 없을 때였다. 좌중의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아, 임자소가 여기 있었던들 우리 선생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관이 없을 텐가?”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관을 운반해 왔는데, 임준원의 집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임준원이
북경을 떠날 때 최공이 연로하고 병든 것을 염려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더욱 그의 높은 의기와 앞일을 미루어 헤아릴 줄 아는 사려에 감복하였다.
임준원이 죽자 조문객들이 마치 가까운 친족상을 당한 듯이 통곡하였다. 늘 그를 의지해 오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꼬!” 하였다. 한 늙은 과부가 자청해 와서 바느질을 돕다가 성복(成服)을 끝낸 뒤
돌아갔는데, 바로 육조 거리의 그 아낙네였다. 임준원은 비록 시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진 않았으나, 타고난
천기(天機)로, 청아하기가 당시(唐詩)의 품격을 지녔다. 홍세태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주고받은 시들이 많았다.
준원이 죽은 지 삼십 여년 뒤 홍세태가 여항의 일시(逸詩)를 채집하여 『해동유주(海東遺珠)』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는데, 유찬홍과 임준원의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1997, 석필)
- 납속(納粟) 흉년이 들어 백성을 구휼하거나 전쟁 등으로 군역에 충당할 인원이나 물자를 확보하고자 할 때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는 방편으로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거나 천인의 신분을 면제시켜주는 정책. 특전의 종류에 따라 노비 신분을 해방시키는 납속면천(納粟免賤), 양인에게 군역 의무를 면제해주는 납속면역(納粟免役), 양인 이상을 대상으로 품계, 특히 양반의 경우 실제의 관직까지 제수하는 납속수직(納粟授職) 등이 있다. [본문으로]
- 정7품 이하의 품계를 일컫는 말. 종6품 이상은 참상(參上)이라 함 [본문으로]
- 조선시대 직함(職銜)만 있고 직사(職事)가 없는 관직으로 이름만의 벼슬이었다. 그러나 영직도 관직이었으므로 명목상이나마 관원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정한 시험을 거쳐 실직(實職) 또는 무록관(無祿官)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본문으로]
- 왕의 신변보호를 위한 기병(騎兵) 중심의 친위병 [본문으로]
- 조선의 중앙의 친위부대(親衛部隊) 가운데 하나로 성종 때 서얼(庶孼)의 진출로를 열어준다는 취지 아래 신설된 군대조직 [본문으로]
- 서얼(庶孼)들에게 과거 시험을 금지한 금고법(禁錮法)을 풀어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것 [본문으로]
- 직사(職事)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 [본문으로]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1997, 석필) [본문으로]
- 이 도첩을 그린 화가를 근 200년간 모르고 지내다가 약 10년 전에 김홍도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도첩은 김홍도가 따라갔던 1789년 연행사의 행적을 그린 것이 된다. [본문으로]
- 산해관의 동문인 천하제일관 외곽의 나성을 그린 것으로, 조선 사절단이 해자(垓字) 위 다리를 건너고 있다. [본문으로]
- 지금은 없어진 자금성의 동문인 조양문을 향하는 조선사절단 [본문으로]
- 청 황제가 정월 초하루에 신년하례를 받는 장소인 자금성의 태화전을 구경하는 조선사절단 [본문으로]
- 오른쪽 하단의 조선사절단이 공복을 갖춰 입고 황제의 궁궐 밖 행차에 예를 표하는 장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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