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4 - 화사(畵師) 김명국

從心所欲 2019. 5. 23. 17:53

 

김명국(金明國)은 인조 때 사람으로, 그의 가계가 어디인지 계보는 알 수 없고, 스스로 호를 연담(連潭)이라

하였다. 그의 그림은 옛 것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얻어진 것이었다. 인물과 수석(水石)을 더욱 잘

그렸는데, 수묵(水墨)과 담채를 잘 쓰고 풍취(風趣), 신운(神韻), 기개, 격조를 잘 이루었고, 세속의 연지와

분칠로 화려하게 꾸미는 법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익살스런 농담을 잘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한 번에 두어 말은 거뜬히 마셨다. 반드시

흠뻑 취해야만 붓을 휘둘렀는데, 필치가 마음대로 뻗을수록 그림 속 광경이 융화되어, 술이 뚝뚝 떨어지듯

취했을 때 신운(神韻)이 흘러넘쳤다. 대개 김명국의 마음에 든 작품은 술 취한 뒤에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림을 청하는 사람은 반드시 큰 독에 술을 채워 가야하고, 사대부가 그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일 때 또한 술을 많이 준비하여 그의 주량을 흡족 시킨 뒤에라야 비로소 그가 흔쾌히 붓을 들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하였고, 그의 지인들은 그를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영남의 한 중이 큰 폭의 비단을 가지고 와서는 「명사도(冥司圖)1」를 그려 달라 부탁하며 고운 베

수십 필을 내놓았다. 명국은 기분 좋게 받아 집안사람에게 내어주며 말하였다. “이걸로 술값을 충당하여 두어

달 동안 통쾌하게 마실 수 있게 하라”

얼마 뒤 중이 와서 그림을 물으니 명국은, “너는 일단 물러가서 나의 뜻이 이를 때까지 기다려라” 하였다.

이러기를 서너 번이었다. 하루는 술을 한껏 마시고 완전히 취하자, 드디어 비단을 펼쳐놓고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단 한 번 붓을 휘둘러 비단을 휩쓸더니 그림을 완성했다. 전우(殿宇)의 위치와 귀물(鬼物)들의 형색이

또렷하여 생기가 넘쳤다. 그런데 머리채를 잡힌 채 앞으로 끌려가는 자, 끌려가 형벌을 받는 자, 토막이 쳐져

불에 태워지는 자, 방아에 찧이고 맷돌에 갈리는 자들이 모두 비구승이거나 비구니가 아닌가. 중이 화들짝

놀라며 숨을 헐떡이며, “아아 공께서는 어째서 우리의 대사를 그르쳐 놓았습니까?” 명국은 두 발을 쭉 뻗고

웃으며, “너희 무리들이 평생 동안 저지른 악업은 세상을 유혹하고 백성을 속이는 일이 아니더냐! 지옥에

들어갈 자가 너희가 아니면 누굴 넣으랴?” 라고 하였다. 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찌하여 우리의 대사를

그르쳐 놓았습니까. 당장 이 그림은 태워버리고 내가 준 베는 돌려주십시오.” 하니, 명국이 웃으며, “너희들이

제대로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술을 더 사와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고쳐 주겠다” 하였다.

중이 술을 사오자, 명국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더니 한잔 가득 술을 마시고, 취기가 돌자 붓을 뽑아 들었다.

까까머리에는 머리털을 그려놓고, 맨 얼굴엔 수염을 붙이고, 검은빛 승복에는 채색하여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그림이 더욱 새롭고 고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을 마치자 붓을 던지고 다시 크게 껄껄

웃고 나서 한잔 가득 술을 마셨다.

중들이 둘러서서 보고는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공은 정말 천하의 신필(神筆)입니다.” 라고 말하고, 절하여

사의를 표하고 떠났다. 지금도 그림이 남아 있어 사문(沙門)의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제자

패강(浿江) 조세걸(趙世杰)이 유법(遺法)을 전수받아 수묵화과 인물화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명국의 신운과

진수는 얻지 못하였다.

 

나(정래교)는 열다섯 살에 어느 양반 집에서 연담의 제자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공의 행적을 대략

들었고, 또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으로부터「명사도」에 얽힌 이야기의 전말을 들었다. 또 공이 남긴 그림을

보니, 기이하고 탁월하여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었다.

 

출전 : 역관 시인 홍세태의 제자 정래교(鄭來僑, 1681~1757)의 시문집 『완암집(浣巖集)』中 <화사 김명국전>

 

조선 후기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은「청죽화사(聽竹畵史)」2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그의 화풍은 비범하고도 놀라운 점이 있었다. 또한

조선의 3대 묵죽(墨竹)화가로 꼽히는 신위(1769년 ~ 1845)는 김명국의 그림을 일컬어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混融)하여 백년 이내에는 필적할 이가 없을 것 같다”고도 하였다. 지금 전하는 김명국의 그림 중에는

<달마도>가 가장 유명하다.

 

[김명국, 〈달마도(達磨圖)〉, 종이에 수묵, 83×57㎝, 국립중앙박물관]

 

인물의 윤곽을 단숨에 그려낸 필법이 경쾌하고 호방(豪放)하며, 대담한 생략과 절제, 여백의 조화가 압권이라는

평을 받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명국이 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일본에서 그려 그곳에 남겨두었던

작품이다. 그렇다고 김명국이 진지하게 그린 그림도 아니다. 술을 좋아하는 김명국에게서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해 왜인들이 연회를 열어 김명국에게 술을 대접하고, 김명국은 술에 취한 채 보답으로 그 자리에서 쓱쓱 그려

선물한 그림들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전에 보지 못한 호방하고 호쾌한 붓놀림 때문에 일본에서는 더더욱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주인공인 달마(達磨)는 우리가 흔히 달마대사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인물로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로

알려진 보리달마(菩提達磨)이다. 남인도 어느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하고, 스승의 지시에 따라 중국에 가서 선법을 펴고자 노력했던 선승(禪僧)

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라는 이름은 ‘통달하고 크다’는 뜻으로 그의 스승인 반야다라가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달마가 실존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달마대사와 관련하여 전하는 여러 가지 유명한

일화들 또한 후세에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이야기라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그 내용이 설화적이다.

 

달마가 중국에 도착한 때는 대개 남북조시대인 양무제(梁武帝, 464~549) 연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5세기

후반이라는 설과 520년 즈음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당시 양(梁)나라의 무제는 불교를 장려하여 많은 절을

짓고 불탑을 쌓으며 승려를 양성하던 때였다. 달마가 인도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양무제는 달마를 궁궐로

초대하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양무제는 그동안 자신이 쌓은 공덕이 자랑스러웠던 참이라, 그 공덕이 과연

얼마나 큰가를 달마에게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거리낌 없이 공덕이 조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남의 칭송을

바라는 공덕은 이미 공덕이 아니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기대 밖의 대답에 왕은 달마의 무례함을 괘씸하게 여겨

그를 은밀하게 죽인 후 웅이산(熊耳山)에 묻어 버렸다.

그런데 그 후에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서역에 사자로 갔다 돌아오던 중 총령(蔥嶺)에서 달마를 만났다. 그 때

달마는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꿰어 어깨에 메었고, 발은 벗은 채였다. 그래서 송운이, “지금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달마는 “나는 서쪽으로 간다.”고 답하고는 가던 길을 갔다. 송운이 궁궐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이상히 여겨 달마의 관을 확인해 보도록 명했다. 관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시체는 간데없고 짚신 한 짝만

있었다. 달마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왕은 군사를 불러 즉시 달마를 뒤따라가서 죽이도록 명하였다.

달마가 양자강가에 도착하여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추격대가 닥쳤다. 이에 달마는 강변에 있는 갈대 한 가지를

꺾어 강물에 띄우고는 몸을 훌쩍 날려 갈대를 타고 유유히 강을 건너가 버렸다. 양자강을 건넌 달마대사는 멀리

서촉(西蜀)으로 갔다. 그리고는 숭산 소림사의 뒤쪽 산에 있는 동굴에 9년 동안 묵언으로 면벽(面壁) 참선

하였다고 한다.

 

김명국 그림 속의 달마는 매부리코와 짙은 콧수염, 두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

강렬하여 9년간 면벽참선한 스님의 고요한 경지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역시나 역사적 신빙성은 별로 없지만,

달마가 승려들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소림권을 창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래서 이 그림에 달마의

무인(武人)다운 풍모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림 속 달마가 눈을 무섭게 부라리고 있는 이유는 수련을

하던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해 눈꺼풀이 내려 앉아 이를 막기 위해 아예 눈꺼풀을 잘라버린 일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영원의 진리를 갈구하는 달마의 의지를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달마의 초상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등장한 달마에 관한 화재(畵材)는 ‘갈대를 꺾어 타고 강을

건넜다’는 절로도강(折蘆渡江)이다.

 

[김명국,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3, 지본수묵 족자, 97.6 x 48.2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지본담채, 105.5 x 58.3cm 간송미술관]

 

 

[김홍도 <승하좌수도해도(乘蝦坐睡渡海圖)4> 지본담채 33.1 x 41cm, 선문대학교 박물관] 

 

 

김명국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 남은 것은 일본에 전해지는 13점을 포함해도 30점이 안 된다.

<달마도>와 <달마절로도강도>는 모두 일본에 있던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온 것이다.

김명국의 진가는 일본인들이 먼저 알아봤다는 해석도 있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에 조선통신사행에

화원으로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화원들은 일본의 지형과 생활 모습들을 그리는

기록화와 조선의 우수한 문화 전파를 위해 현지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었다.

김명국이 일본에 갔던 시기는 일본에서 선승화(禪僧畫)가 유행하던 시기라 선종화(禪宗畵)를 즐겨 그렸던

김명국의 그림은 일본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통신부사로 갔던 김세렴(金世濂)의

사행일기(使行日記)인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1636년 11월14일자에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박지영, 조정현, 김명국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심지어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박지영과 조정현은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이었다. 1643년의

통신사행 때에도 일본에서 “연담(김명국)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고 특별히 요청을 해와 김명국이 다시

일본에 갔을 정도였다. 그 후에도 일본에서의 인기는 시들지 않아, 1662년에는 대군(大君)의 소원이라면서

김명국이 부산(왜관)에 내려와 그림을 직접 그려 달라고 동래부사를 통해 요청한 일도 있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열도에서도 김명국의 술과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일본의 어느

유지가 비단으로 벽을 장식한 세 칸 건물을 짓고 김명국으로부터 벽화를 얻기 위해 그를 초청했는데, 김명국은

늘 그렇듯 술에 취해 그림 재료인 귀한 금물을 입에 머금고 벽에 뿜어버렸다. 그러자 왜인은 깜짝 놀라고 화가

나서 칼을 뽑아 죽일 것처럼 하였다. 김명국이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벽에 뿌려진 금물가루로 그림을 그리자,

혹은 산수가 되고 혹은 인물이 되며, 깊고 얕음과 짙고 옅음의 구별이 형세와 손놀림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뛰어나고 더욱 기발하였으며,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붓놀림으로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순식간에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림의 생동하는 모습이 마치 신묘한 힘의 도움으로 된 것 같아, 왜인은 놀랍고

기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만 몇 번이고 감사해 하였다. 김명국의 그림은 훼손 방지를 위해 기름막을 덮어

보호하였는데,「청죽화사(聽竹畵史)」에 이 일화를 기록한 남태응 당대까지도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금가루

벽화에 대한 소문을 듣고 벽화를 보기 위해 왜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하며, 우리 사신이 가면 반드시

그 그림을 자랑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김명국의 그림이 모두 뛰어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명국의 그림이 거칠고 졸작이 많이

섞여 있다는 비판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김명국은 신품(神品)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法品)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妙品)에 가깝다”며 김명국을 극찬한 남태응은 한편으로 김명국을 이렇게 옹호했다.

 

“다만 김명국의 화법이 기이한 데 치우쳐 기이하면서도 바른 모습이 조화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오로지

기(氣)만을 숭상하였던바 거짓된 기의 잡스러움이 없지 않아 자못 정교하고 치밀한 묘가 모자랐다. 게다가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 ‘욕취미취(欲醉未醉)’ 때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명국은 미천한 환쟁이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낄 수

없었다. 남이 소매를 끌고 가면 어쩔 수 없이 하루에도 수십 폭을 그려야 했으니 절묘하게 된 것만을 단단히

골라낼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이것이 어찌 김명국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김명국,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 지본수목 100.5 x 52.7cm 간송미술관]

 

수로예구(壽老曳龜)는 ‘나이 든 노인이 거북이를 끌고 가다’는 뜻인데, 수로(壽老)는 도교적 인물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극성(南極星)을 인격화한 것이다. 수로를 그린 그림을「수노인도(壽老人圖)」

또는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라고 하며 수성도(壽星圖)라고도 한다. 수로는 작은 키에 긴 수염과

정수리가 불룩 솟아오른 벗겨진 머리 그리고 발목까지 덮는 도의(道衣) 차림으로, 사슴을 동반하거나

두루마리 책을 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김명국 <철괴(鐵拐)> 지본수묵 29.5 x 20cm, 간송미술관]

 

철괴는 도교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데, 산속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철괴가 노자(老子)를 만나러

갈 일이 생겼다. 그래서 떠나면서 제자에게 몸은 이곳에 두고 혼만 다녀올 텐데, 만일 7일 안에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몸을 태우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스승의 혼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곁에서 몸을 지키던 제자에게

별안간 늙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제자는 급한 마음에 6일째 되는 날 서둘러 스승의 몸을 불에

태우고 떠났다. 뒤늦게 철괴의 혼이 돌아와 보니 몸은 이미 불에 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철괴는 혼을

의탁할 곳을 찾다가 굶어 죽은 시신을 겨우 찾아 절름발이에 험상궂은 얼굴의 걸인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서왕모가 하늘로 올라가며 철괴에게 지팡이를 하나 줬는데 철괴가 지팡이를 공중에 던지니

용으로 변하여 철괴가 용을 타고 가서 동화제군(東華帝君)이 되었다고 한다.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허경진 연세대교수 서울신문 연재 글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冥司 : 저승 또는 지옥 [본문으로]
  2. 남태응(1687∼1740)의 저서 청죽만록(聽竹漫錄) 中 별책인 ‘청죽별지(聽竹別識)’에 들어 있는 화사(畵史) 부분으로, 미술 비평문이다. [본문으로]
  3. 취옹(醉翁)은 김명국이 만년에 사용하던 호 [본문으로]
  4. 하(蝦)는 ‘새우 하’자로 새우를 타고 앉아 자면서 바다를 건넌다는 뜻. 역시 달마의 절로도강을 화재로 삼은 그림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