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5 - 백탑과 소완정

從心所欲 2019. 5. 26. 14:12

‘백탑파’ 또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18세기 지식인 모임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부근에

모여 살았다고 해서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하고,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제도를 배워 조선을 부국강병하게

하자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렸다. 이 모임에는 18세기 조선의 실학과 문예를

몇 단계 끌어올린 대학자와 문장가들이 여럿 있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년생), 유득공(柳得恭, 1749년생),

박제가(朴齊家, 1750년생), 이서구(李書九, 1754년생)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 모임의 정신적

지주이자 좌장(座長)은 1737년생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이었다.

 

[1890년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탑골일대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사진)]

 

이들 ‘백탑파’ 인물들의 시문집인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의 서문(序文)을 박제가가 썼는데, 박제가는

여기에 이들이 백탑1 근처에 모여 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문장을 지어 돌려 읽고 학문과 사회 현실을

토론하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이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 터다. 지난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 내가 18~19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서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의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박지원 선생은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서 맞아 주셨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손을 맞잡아 주셨고, 지은 글을 모두 꺼내어 읽어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서

다관(茶罐)에 밥을 해 맑은 사발에 퍼서 옥 소반에 받쳐 내오셨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나를 격려해 주셨다.

너무나 뜻밖의 따뜻한 대접에 놀라고 기뻤던 나는 오랜 세월 아름다운 일로 여겨 문장을 지어서 응답했다.

내가 선생의 인품과 학식에 빠져든 상황과 지기(知己)에 대한 감동이 이러했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내가 아내를 맞이하던 날 저녁에도 처가의 건장한 말을 가져다 안장을 벗기고 올라타고서 시동 한 명만 따르게

하고 홀로 바깥으로 나왔다. 당시 달빛이 길에 가득했는데, 이현궁 앞을 지나서 말을 채찍질해 서쪽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철교의 주막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 여러 벗들의 집에 들렀다가 탑을

빙 돌아 나왔다. 그때 호사가들은 이 일을 두고, 왕양명이 철주관도인을 찾아가 돌아오는 것조차 잊었던 일에

빗대 말하곤 했다.

그 이후 6~7년이 지나 백탑의 벗들이 제각각 흩어졌고, 가난과 병이 날로 심해져 간혹 만나면 서로 아무 탈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나 풍류는 지난날보다 못하고, 얼굴빛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벗과의 교유에도 피할 수 없는 흥망성쇠가 있어서 한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중원의 사람들은 벗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어양 왕사진은 "빙수와 우장이 달 밝은 밤에 모자를

벗고 맨발로 나를 찾아와서는"이라는 시를 지었고, 소장형은 문집에서 왕사진과 이웃해 살면서 나눈 아름다운

일을 회상하고 기록했다. 벗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적은 것이다. 나는 그 글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비록 다른

곳에서 태어나도 마음은 같을 수 있음을 느낀다. 백탑의 벗들과 더불어 감탄하며 즐거워한 일이 너무나 오래되었다.

 

벗 이희경이 박지원 선생과 이덕무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나의 글을 베껴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내가 그곳에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 이라는 뜻을 담아 『백탑청연집』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서문을 지었다. 이 글을

통해 나와 벗들이 당시 얼마나 융성하게 교유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내 평생의 한두 가지 일을 밝혀둔다.

 

출전 :『백탑청연집』. 박제가가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를 쓰고 『백탑청연집』은 이희경(1745 ~

1805?)이 편집했다. 이희경 역시 서얼 출신으로 임종 때까지 연암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다.

 

[<탑동아회도(塔洞雅會圖) 2 > 작가미상, 두루마리, 국립중앙박불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네 사람이 박지원의 문하에 드나들며 서로 교유하면서 지은 시들을 묶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이름으로 유득공의 숙부에 의해 북경에 소개되면서 이들의 시명(詩名)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학문에 뛰어났는데 대부분 서얼

출신이었지만, 유독 이서구만은 명문 사대부가(전주 이씨)의 적자(嫡子) 출신이었다. 그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선조 임금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德興大元君)의 후손으로, 왕족이기도 했다.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16세부터 연암 박지원에게서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 되던 1774년(영조 50) 가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이서구는 ‘마음을 비워 바깥의 사물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운 욕심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담담하게 책을 보고

즐긴다는 뜻에서 자신의 서재의 이름’을 소완정(素玩亭)이라고 지었다.

아래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는 ‘소완정이 여름밤에 벗을 방문한 글에 답하다’로

직역되지만, 그 뜻은 ‘이서구가 여름밤에 나(박지원)를 찾아온 일에 대하여 쓴 글에 화답하다’라는 박지원의 글이다.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6월 어느 날 낙서(洛瑞, 이서구의 자)가 밤에 불쑥 찾아왔다가 돌아가서는 글을 지었다. 그 글에서 낙서는

"내가 연암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어르신은 사흘째 굶은 채 망건도 벗고 버선도 신지 않고 창문턱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서 행랑채의 천한 노비와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고 적었다. '연암(燕巖)'이란

황해도 개성 부근 금천(金川)의 협곡에 자리한 내 거처다. 세상 사람들이 이 연암으로 내 호를 삼았다.

집안 식구들은 이때 광릉(경기도 광주 소재)에 있었다.

 

나는 원래 살이 쪄서 더위를 못 견뎌한다. 더욱이 여름이 되면 모기와 파리가 기승을 부리고, 논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구리가 울어댄다. 이 때문에 여름이 오면 항상 서울의 집에서 더위를 피했다.

서울 집은 비록 낮고 비좁지만 모기나 개구리 혹은 풀과 나무 때문에 겪어야 하는 괴로움은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여종이 홀로 집안을 지켰는데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친 듯 소리치며 주인까지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래서 밥을 해 줄 사람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행랑채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었는데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행랑 사람들 또한 내 노비인양 이것저것 잘 챙겨주었다.

집안에서 고요하게 지내다 보면 마음속에는 아무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시골 처가에 가 있는 식구들이

보낸 편지를 받아도, 단지 '평안하다'는 글자만 읽어볼 따름이다. 날이 갈수록 세상사를 멀리하고 게으르게

지내는데 익숙해져 다른 사람의 경조사를 찾는 일조차 아주 끊어 버렸다. 더러 여러 날이 가도록 세수도 하지

않고 또 열흘 동안이나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차분하게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돌려보내곤 했다.

간혹 땔나무나 참외를 파는 사람이 지나가면 불러서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에 대해 얘기했는데,

느릿느릿한 말이 수백 마디였다. 내 얘기를 두고 더러 사람들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이치에도 맞지 않아

지겹다며 싫증을 냈지만, 그래도 또한 멈출 줄 몰랐다. 또한 집에 있어도 손님이고, 아내가 있어도 스님과 다를

것이 없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편안하게 여겼다. 바야흐로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지내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까치 새끼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우스워서 밥알을 던져 주었는데, 그 후 매일같이

찾아와 서로 친해졌다. 이윽고 까치 새끼를 두고 농담하면서 "맹상군3은 전혀 없고, 평원군의 식객만 있구나!"

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돈을 푼이라고 하기 때문에, 돈을 맹상군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자다가 일어나 책을 보고 또 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도 깨워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더러 하루 종일 실컷 잠을

자고, 간혹 하루 종일 글을 써서 내 뜻을 표현하기도 한다. 조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롭게 배워 이도저도

시들해지거나 싫증이 나면 서너 곡조 타며 놀곤 한다. 이따금씩 오래 사귄 친구들이 술이라도 보내주면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따라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면 스스로 시를 지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은 양주(楊朱)와 다름없고

세상 사람을 두루 사랑하는 마음은 묵자(墨子)와 같네.

살림살이가 어려워 밥을 굶기는 안회(顔回)와 다름없고

집안에 죽은 듯 틀어박혀 있기는 노자(老子)와 같네.

시원스럽게 탁 트인 마음은 장자(莊子)와 다름없고

고요하게 선을 닦는 마음은 석가(釋迦)와 같네.

세상사에 공손하지 않음은 유하혜(柳下惠)와 다름없고

술을 찬양하고 즐겨 마심은 유령(劉伶)과 같네.

생계를 꾸리지 못해 밥을 빌어먹음은 한신(韓信)과 다름없고

잠을 잘 자는 것은 100일 동안 깨어나지 않는 진단(陳摶)과 같네.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다름없고

글을 쓰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네.

자신을 옛사람에 비유하는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다름없으니

나는 거의 성인(聖人)에 가깝네.

단지 키는 9척 4촌이나 되는 조교(曹交)보다 작고

청렴결백하기는 오릉에 숨어 가난하게 살다 죽은 오릉자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마침내 시를 다 지어 놓고서는 혼자서 호탕하게 웃곤 했다. 당시 나는 밥을 굶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 사람이 다른 집 지붕을 고쳐주고 품삯을 받아온 밤이 되어서야 겨우 밥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행랑

사람의 어린아이가 밥투정을 부리며 울고 먹지 않으려고 하자, 행랑 사람은 화가 나 밥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면서 어린아이에게 죽어 버리라고 악담을 하며 꾸짖었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서는 노곤한 기운을 못 이겨 누워 있다가 행랑 사람의 악담을 듣고 불러서,

장괴애4가 중국 익주 지방을 다스릴 때 병졸인 늙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아버지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 아이를 죽여 버린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깨우쳐 주었다.

그에게 "평소 가르치지 않으면서 나무라기만 한다면, 어린아이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자식 간의 은혜와

의리를 해치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니 은하수가 집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면서 하얀 줄기를 허공에 남겨

두었다. 당시 행랑 사람과 나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낙서가 찾아와서는 "어르신, 홀로 누워서 누구와

얘기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그가 자신의 글에서 "행랑채의 천한 노비와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쓴 말이다.

 

낙서는 또한 그 글에 눈 오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일도 적었다. 옛 집이 그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낙서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를 찾아오곤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들로 웅성거렸고, 나 역시

세상사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흔도 채 되지 않아 이미 내 머리는 하얗게 변해 버렸다며, 낙서는

그 글에서 마음속 깊은 감회를 털어 놓았다. 나는 이미 병이 들고 삶에 지쳐서 젊은 날의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은 쇠락해 버렸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다시는 지난날로 돌아갈 수 없을 듯 하기에 이렇게 글을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낙서가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8일경), 동쪽 인근 마을에서부터 걸어서 연암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당시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끼어 있어서 숲 속에 걸려 있는 달은 희끄무레했다. 초경(初更, 저녁 7~9시)의 종소리가 울렸는데,

첫 시작은 천둥소리처럼 우렁차더니 마지막은 잔잔하게 여운이 남았다. 연암 어르신이 집에 계실까 하고

생각하며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창문을 엿보았는데 다행히 등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서는데 어르신은 밥을 굶은 지 이미 사흘째였다. 망건도 벗고 버선도 신지 않고 창문턱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서 행랑채의 천한 노비와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서야 마침내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앉아서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이며, 당대의 문장과 각 당파의 논리, 주장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셨다. 연암 어르신의 말씀은 너무나 기이하고 놀라웠다.

이때 이미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이 지났는데,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빛이 갑자기 환해졌다가 갑자기

어두워지곤 했다. 은하수는 하얗게 휘둘러 아득하게 흔들리며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이 모습에 놀란 내가

"왜 저렇습니까?"고 묻자 어르신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자네 곁을 시험 삼아 보게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옆을 바라보니, 대개 촛불이 꺼지려고 하면서 불꽃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내가 조금 전에 본

모습은 이것이 서로 어리비쳐서 일어난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잠깐 동안에 촛불이 다 타버려 어두운 방안에

서로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해학과 웃음 속에서 오히려 태연스럽게 말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예전 어르신이 저와 한 동네에 사실 때 눈 오던 밤에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저를 위해

친히 술을 따뜻하게 데우고, 저 역시 손에 떡을 쥐고 질화로에 구웠지요. 그런데 불기운이 하도 뜨거워 떡을

자주 화로 속에 떨어뜨리곤 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쳐다보며 즐거워서 유쾌하게 웃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년 동안에 어르신은 이미 백발이 다 되셨고 저 또한 수염이 거뭇거뭇해졌습니다."라고 말하고서는 한참

동안 서로 슬픔에 젖어 탄식했다. 내가 연암 어르신을 찾아뵌 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글을 완성했다.

 

출전 : 박지원의 『연암집』

 

[이서구 초상, 견본채색, 85.3 x 55.2cm, 국립중앙박물관]

 

 

박지원의 『연암집』에는 이서구가 자신의 서재를 '소완(素玩)'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의 일에 대하여

박지원이 따로 적은 글이 있다. <소완정기(素玩亭記)>라는 글이다.

 

<소완정기(素玩亭記)>

 

이낙서(李洛瑞, 이서구)가 책을 쌓아둔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고 이름 붙여 편액을 걸고 내게 글을

써 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꾸짖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닐지만 사람의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의 책은 마룻대까지 가득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네.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책이 아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구만. 아무리 동중서(董仲舒)5의 학문에 몰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화(張華)6의 기억력에 도움

받고, 동방삭(한나라의 경술가)의 암송 능력을 빌려온다고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네. 그렇게

되어서야 쓰겠는가?"

그러자 낙서는 크게 놀라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자네는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보고 있자니 뒤를 보지 못하고, 왼쪽을 돌아보자니

오른쪽을 놓치게 된다네. 왜 그렇겠는가? 방 한가운데 앉아서 자신의 몸과 사물이 서로 가리고, 자신의 눈과

공간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방 바깥으로 옮겨두고 들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것이 더 낫네. 그렇게 한다면 한쪽 눈만 가지고서도 온 방의 물건들을 모두 살필 수 있네."

내 말에 낙서는 감사해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저를 약(約, 핵심)으로 이끌어 주시는군요."라고 했다.

"자네가 이미 약(約, 핵심)의 이치를 알았으니, 내가 다시 자네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네. 해(日)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지극한 양기(太陽)라고 할 수

있네. 온 세상을 감싸주고 만물을 길러주네. 습한 곳일지라도 해가 비추면 마르고, 어두운 곳일지라도 햇빛을

받으면 밝아지네. 그렇지만 태양의 열기가 나무를 태우지도 쇠를 녹이지도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빛이 두루 퍼지고 정기가 분산되기 때문이네. 만 리를 비추는 햇빛을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가는

빛이 되도록 모은 다음 유리구슬(돋보기)로 받아서 그 정기를 콩알만 하게 만들면, 처음에는 불길이 자라나

빛을 발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양의 빛이 한곳으로 모아져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네."

이 말에 낙서가 거듭 감사하다고 하면서, "선생님께서 다시 저를 오(悟, 깨달음)로 이끌어 주시는군요."

라고 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책들의 정기(精氣)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가까운

공간에서는 자신의 몸과 사물이 서로를 가로막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고, 방 가운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네.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어찌 눈으로 보고 살피는 것뿐이겠는가. 입으로 맛을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고,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수 있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그 정기를 얻을 것이네.

지금 자네는 들창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방 안의 사물을 모두 보고, 유리구슬로 햇빛을

모아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리구슬이 비어 있지 않으면 태양의 정기를 모으기란 불가능하지. 따라서 뜻을 밝히는 이치란 본래

자신을 모두 비우고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네. 또한 담백하고 아무런 사욕이 없어야 하네.

이것이 아마도 소완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네."

 

내가 말을 끝맺자, 낙서는 "장차 선생님의 말씀을 벽에 붙여 두고자 합니다. 그러니 방금 하신 말씀을 글로

써서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글로 써서 건네주었다.

출전 : 박지원의 『연암집』

 

[안중식,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 지본담채, 23.4 X35.4cm, 간송미술관]

 

 

위 그림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제자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리고 직접 예서로

'탑원에서 도소회를 여는 그림(塔園屠蘇會之圖)'이라고 화제를 썼다. 이어 '1912년 정초에 집주인인 위창

오세창을 위하여 심전 안중식이 그리다.(壬子元日之夜爲園主人葦滄仁兄正 心田 安中植)'라는 관지도 붙어있다.

탑원(塔園)은 종로 3가역 돈의동 부근에 살았던 오세창이, 자신의 집에서 보면 탑골공원에 높이 솟은 원각사

석탑이 아름답게 보여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에서 원각사탑은 밤안개에 묻힌 듯 멀리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도소주(屠蘇酒)는 설날에 마시는 술로, 설날에 이 술을 마시면 괴질과 사기(邪氣)를

물리치며 장수한다고 믿었다. 정월 초하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은 중국의 오랜 풍습으로 후한(後漢)의

화타(華陀)가 처음 만들었다고도 하고, 당나라 손사막(孫思邈)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참조 및 인용 :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2007,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원각사 십층 석탑. 조선 세조 13년, 1467년에 세조의 왕명으로 원각사가 지어질 때 함께 건조되었다. 현재 탑골공원에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2호이다. 하얀 납석(臘石)으로 만들어져 '백탑(白塔)'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원각사는 원래 고려시대에 창건된 흥복사로,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세조 10년(1464)에 원각사(圓覺寺)라고 고쳐 지은 절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에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이 들어섰다가 중종 9년(1514)에 절이 헐려 없어졌다.(나무위키) [본문으로]
  2. 백탑이 바라다 보이는 공터에서 여섯 사람이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회(詩會)'의 풍경이다.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의 제작 시기는 18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나 작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본문으로]
  3. 맹상군(孟嘗君)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왕족으로서 진(秦), 제(齊), 위(魏)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이름이 높았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이른바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중의 하나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장괴애(張乖崖, 946 ~ 1015) 중국 북송(北宋) 때의 관리이자 문학가로 다른 이름은 장영(張詠)이다. 세계 최초로 종이 화폐인 교자(交子)를 발명하여 ‘지폐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었다. 런던의 잉글랜드은행 뜰에 중국 뽕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이유는 장영이 발명한 지폐의 원료가 뽕나무 잎이기 때문이라 한다. (중국인물사전) [본문으로]
  5. 한나라의 대학자 [본문으로]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인이자 학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