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재에 약방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다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 생긴 모습이 고약한 노학구가 불쑥 들어왔다.
방 한구석에 자리 하나를 잡더니, 말 한마디 없이 한나절을 앉아있었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학구가
말했다.
“ 제가 오래전 어떤 손님과 여기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한 때가 이즈음이라, 귀댁 점포에 머물고
있는데, 마음이 적잖이 불안합니다.”
주인이 말했다.
“불안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편히 계십시오.”
식사 때가 되어 밥 먹기를 청했더니, 사양하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가 자기 주머닛돈으로 시장에서 밥을 사 먹고
다시 돌아와 좀 전처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러기를 며칠이 지났으나 기다리는 벗은 끝내 오지 않았다.
갑자기 상민 한 사람이 헐레벌떡 들어와서 말하였다.
“아내가 막 해산을 하다가 정신 잃더니 의식이 없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빨리 약을 하나 지어주십시오.”
주인이 의원에게 물어본 후에 처방을 가져오면 지어주겠다고 하니, 상민은 굳이 약 한 첩만이라도 구하려고
하였다. 학구가 말하였다.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1 세 첩을 복용하면 금방 나을 것이네.”
주인이 웃었다. “곽향정기산은 속이 뒤틀리고 더부룩한 것을 푸는 처방이지, 해산병에 쓰는 약이 아닙니다.”
그래도 학구가 굳이 그 처방을 고집하니, 상민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일이 잘못되어도 내, 책임을 묻지 않을
터이니 어서 그 약이라도 내어 주십시오.” 하니,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지어 주었다.
저녁 무렵에 또 어떤 상민이 찾아왔다.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친구의 처가 애를 낳다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이 집에서 약을 얻어 와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필시 이 약국에 좋은 의원이 있어서 그러리라 싶어, 이리 뵙습니다. 제 아이가 이제 갓 세 살인데
마마를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제가 봐서도 아주 위급한 상황이니 부디 좋은 약으로 살려 주십시오.”
학구가 말했다. “곽향정기산 세 첩을 달여 먹이시오.”
주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지만 그 사람이 애걸복걸하므로 또 하는 수 없었다.
얼마 뒤에 그 사람이 와서 고하길, 과연 즉시 효험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줄줄이 가게 문에 이르렀는데, 학구는 오로지 곽향정기산만 처방하였다. 또한
그 처방으로 낫지 않은 사람이 없어 북채로 북을 두드리는 것보다 빨랐다. 거의 두어 달이 지났는데도 학구는
가지 않았고 기약했다는 손님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떤 재상의 아들이 약방에 와서 부친의 병이 오래
되었는데 백약이 무효라고 하였다. 어제 영남에서 용하다는 유의(儒醫)를 오게 하였더니 보제(補劑)를 쓰라고
하더라며, 특별히 새로 캔 약재로 지어 달라고 주문하며 효험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더니, 학구를 발견하고 누구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이즈음에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말해 주었다.
재상의 아들은 옷깃을 여미고 학구의 앞으로 나아가 부친의 병세를 상세히 고하고, 좋은 처방을 청했다.
학구가 얼굴빛 하나 고치지 않은 채 다만, “곽향정기산이 가장 좋습니다.” 라고 말하니, 재상의 아들은 슬며시
웃으며 물러났다.
그 부친에게 돌아와 이야기를 하다가 학구의 일에 이르자 다 같이 한번 웃었다. 재상이, “이 약이 꼭 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어디 시험 삼아 그 약을 복용해 봄이 어떨런고?” 하였다. 아들과 문인(門人)들이 모두 극구
반대하였다. 재상은 달여 올린 약을 몰래 엎어버리고, 조용히 사람을 시켜 곽향정기산 세 첩을 지어 와서 달이게
하고 세 번에 나누어 복용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앉으니 정신이 맑고 몸에 기운이 돌아 병의 뿌리가
이미 풀린 듯하였다.
아들이 아침 문안을 드리니, 재상이, “묵은 병이 이제 떨어져 나갔다.” 라고 말하였다. 아들이, “아무 의원은
정말 화타(和陀) 편작(扁鵲)입니다.” 하니, 재상이 “아니다. 약방의 학구가 어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신의(神醫)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래의 약은 엎어버리고 정기산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몇 달을 끌던 질긴 병이 하루아침에 얼음 녹듯 하였느니라. 이 보다 큰 은혜가 또 어디 있겠느냐? 너는 어서 가서
그 노인을 모셔 오너라.”
아들이 가서 사의를 표하고 함께 갈 것을 청했다. 학구는 옷을 떨치고 일어나 말하였다. “내가 어찌 막하의 객
노릇을 하겠는가? 이런 더럽고 멸시하는 말을 듣다니, 성안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로다!” 하고는 표연히 나가 버렸다.
재상의 아들이 무안해 하면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와 경위를 고하니, 재상은 더욱 감격하며 그가 지조 있고
속기를 벗은 선비라고 찬탄하였다.
얼마 지나서 임금이 병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지속됐으나 훌륭한 의원도 치료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였다. 온 조정이 초조하고 불안해하였다. 당시에 그 재상이 약원 제조(藥院提調)2를 맡고 있었는데, 마침
학구의 일을 생각해 내고 들어가 병세를 살피고 그 때 이야기를 아뢰었다. 임금은, “이 약재가 꼭 이로운 것은
아니나 또 해롭다고도 할 수 없다.” 하고, 명을 내려 약을 달여 들이라 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병이 나았다.
임금이 더욱 그 기이함에 감탄하며 전국을 물색하여 그를 찾도록 명령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식자들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이인(異人)이다. 대개 의서(醫書)에 연운(年運)이 순환하여 오랫동안 온갖 병이
생기지만 그 뿌리는 연운이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연운을 알아서 그에 맞는 약을 쓴다면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증세라도 반드시 효험을 얻는다. 요즘에 의술을 업으로 하는 자는 이런 이치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 단순히
증세를 따라 약을 써서 그 말단만을 고치고 근본은 내버려두니 결국은 사람이 죽고 마는 것이다. 이 학구는
반드시 임금의 몸에 병이 있을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이 처방이 아니면 구할 수 없겠기에 약속을 핑계 삼아 스스로
왔던 것이리라.
출전 :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야담집인 『청구야담(菁邱野談)』. 학구(學究)는 학문에만 열중하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하거나, 글방 선생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노학구(老學究)는 이름이
아니라 ‘늙은 (시골)선비’ 정도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중학천3과 양반집 부녀자의 외출 모습]
노동지는 남양(南陽) 출신이다. 활을 잘 쏘았으나 운수가 기박해 무과 초시4는 항상 통과했지만, 최종 시험인
회시5에는 매번 떨어졌다. 어느 날 인경 후, 만취한 상태로 육조 앞 큰 길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날은
어영청에서 순라를 도는 날이었는데 나졸이 그를 붙잡자 냅다 후려 쳤다. 순라군 패장이 달려오자 이번에도
또 주먹을 휘둘렀다. 나졸 네댓 명이 달려들자 잇달아 때려눕히고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급기야 각 패의
나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를 붙잡아 결박해서 다음 날 아침에 대장 집 대문 밖에다 대기 시켰다.
대장은 안국동 홍정승이었는데 홍공이 그를 잡아들이라 하여 물었다.
“네놈은 순라법의 뜻을 아느냐?”
“압니다.”
“그걸 아는 놈이 왜 순라군을 때렸느냐?”
“한 말씀드린 다음 죽고자 하였습니다. 잠시 오라를 풀어주소서.”
홍공이 결박을 풀게 하니, 일어나 아뢰었다.
“소인은 남양의 과거시험 응시자입니다. 제 나름으로 용력이 있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자신이 있사옵니다.
운수가 기박하와 회시에 응시한 것이 무려 십여 차례이온데, 이번에 또 낙방하였습니다. 소인의 신세를
돌아보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재상의 문하에 빌붙어 처지를 바꿔볼까도 싶지만, 그 길도
막연합니다. 지금 명망이 어르신 보다 높은 분이 없기로, 한번 뵙고자 하였으나, 문전에서 쫓겨날 것이 뻔한
처지라, 일부러 순라군을 때려눕혔던 것이옵니다. 순라군을 두들겨 패면 반드시 이 뜰아래 잡혀 올 것이니,
한 번 존안을 뵙고 사정을 말씀드릴 기회를 만든 것입니다. 만약 때리지 않고 기껏 야금(夜禁)만 범한다면,
집사청(執事廳)6에서 곤장이나 얻어맞고 쫓겨날 것이온데, 무슨 수로 이 뜰아래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또,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상대하면 둘의 용력이 있다 쳐줄 것인데, 소인은 다섯 사람을 쳤으니 다섯 사람의 용력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또께서 이놈을 문하에 거두어 주심이 어떠한지요.”
홍공이 그를 눈여겨보더니 껄껄 웃었다.
“어제 맞은 장교는 어디 있느냐?”
그 장교가 명을 받들고 대령하자, “너희 다섯이 저 한 놈에게 맞았으니, 장차 네 녀석들을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장교 패를 풀어 놓고 물러가거라” 하고는, 그 전령패(傳令簰)7를 노동지에게 채워주고 문하에 두었다.
그는 영리하고 기민해서 매사가 주인의 뜻에 맞았다. 이로 인해 총애가 날로 높아져 안팎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겼는데, 어느 한 가지도 빈틈이 없으니, 홍공은 그를 수족처럼 여기게 되었다. 노동지는 별군관을
시작으로 차차 승진하여 오랫동안 부지런히 일하다가 선사포8 첨사가 되었다. 그가 부임할 때 홍공이 감영과
병영에 편지를 써서 매사를 돌봐 주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3년의 임기가 끝나도록 홍공에게 문안 편지
한 장이 없으니, 홍공의 문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은혜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원망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홍공을 찾아뵈니, 홍공이 기분 좋게 반기였다.
“그간 아무 탈 없이 지냈느냐? 그래, 그간 소득은 많이 있었느냐?”
“소인이 대감의 은혜로 진을 맡아, 3년 동안 모은 소득으로 남양에 전토를 사두었습니다. 이제 평생을 편안히
지낼 만합니다.”
홍공은, “아주 잘 된 일이로구나.” 하고 기뻐하는데, 노동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하직을 고하는 것이었다.
홍공이 놀라며, “니가 내 집에 와 가지고 어이 머물지 않고 이리 서둘러 돌아가려 하는 거냐?”
“소인이 정성을 바쳐 사또께 힘을 다한 것은 장차 바라던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이제 소득이 바라던 바를 넘어
흡족하온데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제 떠날까 합니다.”
홍공은 아무 내색 없이 허락하였다. 그가 문을 나설 때 누군가 홍공의 은혜를 저버린다고 책망하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내가 공의 문하에 있은 지 십여 년이다. 여러 곳에서 보내 온 물건을 사또께서 어찌
일일이 다 살피시겠느냐? 웬만한 물건은 모두 우리 선에서 처리하였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진의 첨사로서,
온 진을 다 뒤져 구할 수 있는 모든 봉물을 바치더라도 아랫것들의 소유물밖에 안될 뿐이니, 꼭 필요치 않은
일이라 그리 하지 않은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는 즉시 남양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정조 즉위년에 홍공은 실각하여 고양 문봉(文峰)의 선영 아래 은거하였다. 그 때에는 청지기 가운데
어느 누구도 모시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동지가 비로소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조석으로 시중을 들었다.
홍공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곁에서 간병하며 직접 탕약을 지어 올리고, 돌아가신 뒤에는 손수 염습하여
입관하였고, 장사를 마친 뒤에는 통곡하며 돌아갔다.
출전 : 조선 후기에 이희준(李羲準)이 편찬한 문헌설화집인『계서잡록(溪西雜錄)』. ‘계서’는 그의 형인 이희평
(李羲平, 1772~1839) 호라, 이 책도 이희준의 찬이 아니라 희평의 찬이라는 주장도 있다
- 곽향정기산 : 한의학 처방의 하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풍한(風寒)의 사기(邪氣)에 상한 데다 음식을 잘못 먹고 체하여 오슬오슬 춥다가 열이 나면서 머리가 아프고 명치 아래가 그득하며 배가 아프면서 토하며 배에서 소리가 나고 설사하는 데 쓴다. 여름철 감기, 더위, 급성 위장염, 위십이지장 궤양, 오조(惡阻) 등 때에도 쓸 수 있다. (한의학대사전, 2001, 한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본문으로]
- 조선시대 궁중의 의약(醫藥)을 맡은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는 의관(醫官)과 약원(藥員) 같은 전문 의료인 외에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 등을 두어 타관직자가 겸직하면서 내의원의 업무를 지휘 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본문으로]
- 중학천(中學川) : 경복궁 북쪽에 솟은 북악산의 남서쪽에서 흘러내려와 경복궁의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앞을 지나 지금의 율곡로를 가로질러 문화체육관광부와 미국대사관 뒤쪽을 거쳐 청계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의 지천(支川)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하천이었으나 1957년 도시정비를 목적으로 복개되어 물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 초시(初試) : 모든 과거(科擧)의 맨 처음 시험. 보통 서울과 지방에서 식년(式年:과거를 시행하는 시기로 정한 해. 곧 자(子), 오(午), 묘(卯), 유(酉)가 드는 해) 전 해의 9월 초순(初旬)에 보임. 초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없음. 일명 향시(鄕試)라고도 함.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 회시(會試) : 문과(文科), 무과(武科) 과거의 초시(初試)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 제2차로 보는 시험. 복시(覆試) [본문으로]
-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한양의 집사청은 종묘에 있었다. [본문으로]
- 출입용 신용패 [본문으로]
- 선사포(宣沙浦) :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운산면(雲山面) 남단에 있던 포구(浦口) 이름. 조선시대에 중국에 보내는 조공선(朝貢船)이 출발하던 곳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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