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1 - 패관문학(稗官文學)

從心所欲 2019. 5. 14. 19:03

조선시대 가장 개혁적인 왕으로 기억되는 정조가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문집과 일부 서적의 수입을 금한 일이 있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이 잡문체로, 이러한 문체가 전통적인 고문(古文)식의 문체를 오염시킨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를 두고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문학과 사상의 탄압이라고 비난하는 주장도 있고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조처였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정조가 문풍(文風)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조 11년인 1787년의 어느 날 밤 정조가 예문관을 방문했는데, 숙직을 서고 있던 김조순과 이상황 등이 소설책을 읽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청나라의 '평산냉연(平山冷燕)1'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정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책을 불태우고 다시는 패관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게 하고 파직을 시켰다. 정조는 "패관소설(稗官小說)이 사람의 심술을 가장 해치는 것"이라며 패관소설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조선시대 규장각이 있었던 창덕궁 주합루2]

 

패관(稗官)이라는 글자가 문서에 등장한 것은 한대(漢代) 반고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3>에서 비롯한다. 반고는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대개 패관의 손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길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나 뜬소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패관(稗官)은 옛 중국에서 시작된 관직으로 민간에 나도는 풍설(風說)과 소문을 수집하던 일을 맡던 말단의 임시직 사관(史官)이다. 민간전설이나 신화를 채집하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시사(時事)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왕이 민심을 파악하는 자료로도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패관들이 수집한 민간전설, 신화, 사화(史話), 시사, 우언(寓言)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반고는 소설(小說)에 대하여 “혹은 고인에 의탁하고 혹은 고사를 기록한 것으로 사람에 의탁한 것은 천박하고 사(事)를 기록한 것은 사(史)에 가까우면서도 황당무근한 것” 이라고 주(注)를 달았다.

 

5년 후인 정조16년(1792), 정조는 동지정사로 중국에 가는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접견한 자리에서 다시 또 패관문체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청으로부터의 패관소설과 잡서(雜書) 등의 수입을 금지하도록 했다. 또한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를 과거시험지나 상소문 등에 사용하지 않도록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연암 박지원 초상4]

 

1793년 1월, 57세의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2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의(安義)는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옛 지명이다. 그런 박지원에게 남공철(南公轍, 1760 ~ 1840)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편지가 도착했다. 남공철은 정조의 세손 때 스승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의 아들로 당시 규장각(奎章閣)의 종6품 관직인 직각(直閣)이란 자리에 있었다. 그는 후일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 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는 인물로 정조도 아끼던 인재였다. 그는 박지원에게 보내는 편지에 안부를 묻고는 자신이 전 해인 1792년, 패관소품체에 대한 책문(策文)을 올렸다가 오히려 그 글 중에 패관문자가 인용되었다 하여 정조에게 질책을 받은 일이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는 편지를 보내는 본론을 이렇게 적었다.

 

임금께서 어제 경연 중에 천신(賤臣)에게 하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최근 문풍이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이 이와 같으니, 그 근원을 캐어 들어가면 박아무개의 죄가 아닌 게 없다. 『열하일기』를 내가 이미 깊이 읽어보았으니, 어찌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 자야말로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간행된 후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이런 일을 벌인 자가 그것을 풀게 해야 한다.”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고 “속히 한 부의 순정한 문장을 지어 곧바로 올려 보냄으로 『열하일기』의 죗값을 속죄하게 한다면, 비록 음직의 벼슬을 내린다 해도 어찌 아까울 게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중죄가 내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대에게 곧바로 편지를 보내라고 하교하시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박지원의 답신은 「답남직각공천서(答南直閣公轍書)」라는 제목으로 『燕巖集』에 실려 있다.

 

금년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에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습니다.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품어내고 밝은 해와 달은 미물이라도 안 비추는 곳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열하일기)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곳은 천리나 동떨어진 벽지산간이고 나는 일개 비천한 신하이건만, 임금께서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마찬가지로 엄한 스승으로서, 또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면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벌하실 일을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나와 같이 미천한 신하가 어찌 임금께 이런 은혜와 사랑을 받겠습니까!

명색이 선비로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 화목하고 평온한 소리를 내고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진실로 수치스럽습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천박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남의 글을 모방하는 잔재주로 스스로를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장롱이나 바르면 좋을만한 시원치 않은 글을 전파시켜 더욱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저자 골목길에서나 유명해진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문풍(文風)이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날로 피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백성이자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할 일입니다.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따르지 않음을 탄식하고, 자질구레한 잡문을 좋아하면서 ‘옛 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할 것입니다.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하겠습니다. 또한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德)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임금께서 인재를 기르시는 것을 알았으니, 나나 그대나 죽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남공철은 두어 달 안에 왕이 원하는 순정지문(純正之文)을 지어 올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편지에서 권했지만, 박지원은 임금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며 정조가 원하는 글을 따로 보내지는 않았다. 정조는 이 답신을 보고 박지원의 문장에 감탄했다고 한다.

 

[열하기5]

 

문제가 되었던 《열하일기》는 정조 때인 1780년에 박지원이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서, 이때 겪었던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은 책이다. 열하(熱河)는 중국 허베이성 청더[承德市] 지방으로,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던 곳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중국의 자연환경이나 관광지, 운송제도, 의술, 천문학, 음악 등 청(淸)의 문물에 대해 두루 소개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학자들과 만나 세계의 정치 상황이나 종족, 종교 등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박지원은 당시 청나라가 경제를 발전시켜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힘쓰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청의 문물과 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을 주장했다. 《열하일기》에는 고전 소설로 잘 알려진 <호질>, <허생전> 등이 실려 있는데 이 소설들이 당시 조선의 신분제도와 사회 관념을 비판하는 내용들이었다. 《열하일기》는 지식인층 사이에 널리 읽혀지며 관심을 끈 반면, 청을 오랑캐가 세운 뒤떨어진 나라로 생각했던 보수적 성리학자들은 이 책을 비판했었다. 특히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자 박지원 본인과 <열하일기>에 대한 비판과 모함이 더 거세졌다. 안의현 이웃의 함양 군수 윤광석은 ‘연암이 안의현에서 오랑캐의 의복을 입고 백성을 대한다[胡服臨民]’며 그를 헐뜯는가 하면 한양의 유한준(兪漢雋)은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胡虜之稿]’라고 매도했다.

 

 

정조의 명으로 박지원에게 편지를 쓴 남공철은 이전에 이미 《열하일기》와 관련하여 박지원과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남공철의 가까운 친구로 박남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박지원은 박남수의 삼종조(三從祖, 할아버지의 육촌 형제)였다. 박남수가 30살의 나이에 요절하였을 때 남공철이 그 묘지명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일찍이 연암 박미중(美仲)6을 따라 산여(山如, 박남수)의 벽오동정관(碧梧桐亭館)에 모였을 때에 청장관(靑莊官) 이덕무와 정유(貞蕤) 박차수(박제가)가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날 밤은 달 밝은 밤이었고 연암이 느리게 그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어나가자, 이덕무와 박제가도 삥 둘러앉아 그것을 들었다. 산여가 연암에게 “선생님의 문장은 비록 기교가 있고 좋지만, 패관기서이기에 이로부터 고문이 흥기(興起)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라고 말하자, 연암은 취하여 “네 놈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하며, 다시 아까처럼 읽어나갔다. 산여도 그때에 또한 취했기에 앉은 곳에 있던 촛불을 잡고 그 원고를 태우려 했다. 나는 급히 만류하며 그만두게 하자, 연암은 화를 내며 마침내 몸을 돌려 눕고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에 이덕무는 거미 그림 한 폭을 그렸고 박제가는 병풍에 있는 초서를 따라 두보의 시「음중팔선가」를 쓰니,

종이가 곧 동났다. 내가 글과 그림이 극히 오묘함을 칭찬하면서 말했다.

“연암께서 마땅히 발문을 써 삼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연암의 마음을 풀어주려 했으나 연암은 더욱 화를 내면서 더욱 일어나려하질 않았다. 날이 점차 밝아오자 연암은 이미 술에서 깨어 갑자기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산여야, 앞으로 나오라! 내가 세상에서 궁핍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문장을 빌려 한 번 꽉 막힌 불평한 기운을 내뿜으며 방자히 놀았던 것뿐이다.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산여와 원평(남공철)은 모두 어리고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으니 글을 쓸 적에 삼가 나를 배우지 말고 정학을 흥기함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아라. 그리고 훗날엔 왕조와 조정의 신하가 되어라. 나는 마땅히 제군들을 위해 벌을 받겠네”

잔을 당겨 한 잔을 마시더니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또한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권하며 마셨고, 마침내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나는 이 일로 연암의 뛰어난 기질과 자기를 비울 줄 하는 아량에 감탄했다. 그리고 산여의 의론이 옳은 것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7

 

손자뻘인 박남수는 할아버지의 글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걱정도 했겠지만 동시에 그로 인하여 박지원의 어떤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탈고한 것이 1783년이고, 박남수가 죽은 것이 1787년이니 이 일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열하일기》는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 하고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다. 연암 사후에 아들 박종채와 손자 박규수가 각각 1829년과 1866년에 연암의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려고 했으나 유림(儒林)의 비난을 받는 글이 많다는 이유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다가 1900년대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후세에 ‘정조의 문체반정’이라고 불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하여, 관권의 개입으로 인하여 모처럼 싹트려 하던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조선 후기 문학의 지지부진함을 초래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정조는 진시황 때의 분서(焚書)처럼 패관소설을 모아 없애거나 불사르는 비문화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런 책들이 나라 안에 유통되는 것을 강압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다만 관리들이 잡문체에 물들어 나라의 문체가 어지러워질까 경계하여 관리들에게 불이익을 준 것 뿐이다. 박지원에게 편지를 보낸 것 역시 그 내용이나 결과를 보면 벌을 주려는 것보다는 문체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남공철도 그의 편지에서 자신이 박지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배경을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 잡으시려는 성상의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소설을 읽다 파직된 김조순과 이상황도 5년 뒤에는 복직이 되었다. 또한 남공철이 패관소품에 나오는 문자를 써서 파직되었다고 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남공철이 스스로 밝힌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남공철은 박지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는 지난번에 명, 청의 패관소품체로 글을 썼다고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규장각에서 근무하는 심상규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죄를 추궁당하고 서면으로 답변서를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북청부사로 부임하는 성대중의 송별연을 벌였습니다. 그의 문체가 바르고 순수하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승지 이서구와 규장각의 여러 검서관들이 모두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규장각의 큰 행사이자 미담이었습니다.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라고 밝혔다.

 

만일 지금 공문서나 학생들이 낸 리포트에 ‘개간지’ ‘뇌피셜’ ‘갑톡튀’ ‘틀딱’ ‘대박’ ‘토착왜구’ '폭망' 같은 표현들이 나온다면 그런 글을 받아보는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이 들까?  정조가 패관소품체의 글을 봤을 때의 느낌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경학(經學)과 더불어 문장 실력으로 인재를 가리고 관리를 뽑던 시절이었다. 왕으로써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는가!

 

정조 때문에 실제로 패관문학이 얼마나 위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패관소품체의 글과 패관소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들을 옮긴 것도 있으니 그도 따지고 보면 옛날이야기다.

 

 

  1. 중국 청(淸)나라 초기의 통속소설로 작가는 적안산인(荻岸山人). 평(平), 산(山), 냉(冷), 연(燕)은 모두 작중 주인공의 성(姓)으로 4명 남녀의 사랑이야기이다. [본문으로]
  2. 아래층이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었고, 위층은 열람실로서 주합루(宙合樓)라고 했지만 지금은 건물 전체를 그냥 주합루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예문지는 그 시대에 현존하는 서적의 이름을 수록한 책. 한서 예문지에는 38종 596가(家) 13,269권의 도서 목록을 수록하고 있다.(국어국문학자료사전) [본문으로]
  4. 아들인 박종채가 묘사한 박지원은 “큰 키에 살이 쪄 몸집이 매우 크셨습니다.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불거져 나오고, 눈은 쌍꺼풀이 져 계셨습니다. 또 목소리는 매우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밖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 큰 몸집과 어우러져 좌중을 늘 압도하곤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 초상화는 손자인 박규수가 그렸다는 설도 있고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원래의 제목은 ‘열하기’였으며 26권 10책이었다. 이후 여러 형태의 필사본이 전해진다. [본문으로]
  6. 박지원의 자 ‘중미(仲美)’를 바꿔 쓴 것으로 보임 [본문으로]
  7. 남공철의 시문집인 ‘金陵集’의 ‘朴山如墓誌銘’ 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