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광화문]
우리 옛날이야기의 대표적 영웅은 아마도 ‘암행어사’일 것이다. 이야기 속의 암행어사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활동하되 늘 백성 편에 서서 ‘권선징악’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정의롭고 통쾌한 문제 해결사로 등장한다. <춘향전>의 어사 이몽룡 얘기도 있지만 옛날이야기에서 암행어사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박문수라 할 정도로 박문수에 대한 설화가 많다.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실존 인물로 1727년 영남안집어사(嶺南安集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한 것을 필두로, 모두 4차례
어사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행적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허구로 각색되어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암행(暗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닌다는 뜻이고 어사(御使)는 왕의 사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사가 모두 암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통상 암행어사는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예문관, 승정원 등 임금을
측근에서 수행하는 시종신(侍從臣)들 중 정3품 통훈대부 이하의 당하관에서 선발되었다. 반면 어사는 그
자격이 일정하지 않지만, 당상관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상관이 어사에 임명된 때에는 어사라 칭하지
않고 사(使)라고만 하였는데, 당상관인 안집어사를 안집사(安集使)라고 불렀다. 안집사는 왕이 주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지방에 파견하는 관원을 의미한다. 1727년 박문수 역시 암행어사가 아닌
안집어사의 자격이었기 때문에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할 때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남서쪽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일제강점기 이전의 경복궁 근정전 주변]
지금도 국가 정책의 실질적 집행을 대부분 지방관청이 담당하듯 조선시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 역시
당시의 행정구역 단위인 주부군현(州府郡縣)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관청의
수령(守令)들인 군수, 현령, 현감은 백성들과 직접 접하는 실질적인 왕권의 대행자로 그들의 역량과 역할에
따라 백성의 안위와 왕의 치국에 대한 평가가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監司)로
불리는 도(道)의 관찰사로부터 수령에 이르는 지방의 행정체계를 감시해야할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왕은
어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어사를 공개적으로 파견할 때는 왕의 뜻을 전하거나 실행하는 임무가 주를
이루지만 암행어사는 수령들에 대한 평판과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살필 목적으로 파견되기 때문에 지방
수령들로서는 암행어사를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공직기강을 세우고 비리를 예방, 색출하기 위하여 암행을 하는 제도가 있다. 다만 청와대가 아닌
국무총리실에서 담당한다. 그런데 전 정부에서는 이런 제도를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을 사찰하는데 오용하여
크게 물의를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다.
암행을 통한 지방관의 감시는 조선초기에는 주로 찰방1의 일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암행찰방’이었다.
암행찰방의 사례는 1416년(태종 16)에 처음 보인다. 즉 왕이 충청도 순성에서 강무(講武)2하기로 정했는데,
혹 이를 빌미로 감사와 수령들이 민간에 폐를 끼치는 일이 있는지 지응사(支應使)3와 찰방으로 하여금
암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암행찰방의 파견은 한동안 수령의 나쁜 정치와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점을 적발한 것이 많아 실로 좋은
법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찰방이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욕심에 오로지 숨은 일을
들추어내는 데 급급함으로써 오히려 임금의 덕을 잃어버리고 임금의 명(命)을 욕되게 한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그래서 찰방제도는 세종 15년인 1433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2년 후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수령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들에 대해서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라 하여 하급 서리가 상급자인 관원을 고소하거나,
지방의 향직자(鄕職者), 아전, 백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가 있었다. 또한 6년 동안
책임을 맡기는 육기법(六期法)이란 것도 있었다. 지방 수령들에 대한 권위를 높이고 신분을 보장해줌으로써
그 임무를 소신껏 원활히 수행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장치였다. 반면, 중앙에서 수령을 제어하는 기능은
사헌부에만 있었는데, 사헌부만으로는 전국의 지방을 모두 관리 감독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감찰이 폐지되자 “수령이 제 마음대로 행하기를 꺼림이 없으되, 소민(小民)이 원한을 품고도 고할 데가
없으며, 세력이 있고 교활한 무리들이 시골구석에서 위세를 부리므로, 곤궁하고 약한 사람들이 물품을
징수하는 데 시달리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논의 끝에 “중국의 감찰어사(監察御史)를 본받아 민정에
정통하고 상명(祥明)한 감찰을 뽑아서 혹은 한꺼번에 다 보내든지, 혹은 다만 한 도(道)에만 보내든지, 그 때에
다다라 적당히 이를 보내도록 하였다“4고 하였는데 실제로 얼마나 견제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에도 암행(暗行)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면서 방법과 명칭에 대한 여러 견해가 개진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벼슬아치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편한 이 제도를 없애려고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세종 이후 6대의 왕을 거치고 70년의 세월이 흐른 중종 때도 벼슬아치들은 왕에게 이렇게 고했다.
“근일 암행어사를 보내어 수령(守令)의 범행을 적간(摘奸)5하는 것은 미편6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아랫사람
대우하기를 바른 일로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바른 것으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봄가을에 다만 어사를 보내어
백성의 병폐와 괴로움을 물어 보기만 하고, 암행은 보내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수령의 범법과 외람한 일 등은
감사7로 하여금 검찰하게 하는 법이 스스로 제정되어 있으니, 다시 엄히 살피게 함이 지당합니다.”라 하여
수령을 믿어야 하고, 감찰은 감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공수처 신설과 검찰 개혁에 반대하는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종은 “소상하게 살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이 수령에게 달렸고 또 조종조의 고사(故事)가 있으므로 보내는 것이다.”8라 하면서 암행제도를
폐기하지 않았다.
암행어사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윤해가 전에 청송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적간(摘奸)하였으나”라는 기록이 [성종실록] 성종 16년 7월 6일자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1485년 이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다른 기록에는 “암행의 법은 성종조에 조익정(趙益貞)이
처음으로 아뢰어 행하였다.”9라고 하여 역시 암행어사제도가 성종대에 처음 실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고석규교수의 글10에 따르면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암행어사 파견은 명종 5년인
1550년으로, 암행어사란 명칭이 기록에 나타나는 사례는 총 613회다. 이는 본격적으로 암행어사가 파견되는
최초의 해인 1550년부터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1897년(고종 34)까지 348년 동안 암행어사 파견의 수를 모두
합한 수치이다. 연평균 약 두 차례 정도인 셈이다. 가장 많을 때는 한 해에 28차례까지도 파견하고, 20여 년간
단 한 차례도 파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암행어사는 대체로 거의 끊임없이 파견되었다.
암행어사는 은밀함이 핵심이다. 은밀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임명부터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여야
했을 것이다. 암행어사는 어떻게 임명되었을까?
암행어사는 원래 왕이 독자적으로 임명했었다. 그러다 영조 11년(1735)에 암행어사 후보를 추천하라는
초택(抄擇) 명령이 내려진 이후, 왕이 극비로 단독 임명하는 경우와 대신의 천거로 임명하는 방법이 병행되었다.
대신천거는 의정부로 하여금 초계, 즉 대상자를 추천케 하여 그 중에서 왕이 선정하였다.
암행어사 후보자 추천권인 초계가 의정부의 권한이 되면서 그 전단계로서 ‘초택(抄擇)’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초택은 추천권을 가진 정승들이 왕에게 적임자를 추천하기 위해 여러 명의 후보자를 두고 1차 심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삼의정 대신들은 중앙정부의 현직과 전직 관료들의 명단을 망라한 관원명부[관안(官案)]를 보고
후보자를 골라 복수로 추천하는 것이 관례였다. 후보자 명단에 오른 인물들을 ‘피초인(被招人)’이라고 불렀다.
이들 피초인 가운데서 암행어사를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종 명단에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암행어사로
임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왕이 선정한 암행어사 명단은 누구에게도
공개될 수 없었다.
의정부에서 추천한 어사 후보자들 중에서 왕이 낙점하면,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을 통해 곧바로 후보자에게
연락이 갔다. 그리고 불러들일 때는 일반 관원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패초(牌招)’라는 방식을 썼다. 패초란
승지가 왕명을 받아서 관원을 부를 때 나무로 만든 패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관리임명소환장이다.
암행어사의 패초는 정해진 날짜도 정해진 시간도 없었다. 암행어사가 언제 왕의 부름을 받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개의 경우 비밀스럽게 불려가 왕을 직접 만나게 되지만, 모든 암행어사들이 왕을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밀지로 임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왕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암행어사로서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행할 일이 비밀스러울수록 왕이 직접 대면하기 보다는
밀지로 어명을 전달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암행어사로서의 정식 임명은 왕이 친히 하사하는 봉서(封書)11와 마패, 유척(鍮尺)을 받아야 이루어진다.
만약 왕을 직접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승정원을 통해 전달받는다. 봉서에는 암행 대상지에 가서 수행하여야 할
제반 문제들과, 그 일을 원만히 마치고 보고할 것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긴다. 또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준칙이
되는 사목(事目, 또는 節目)도 함께 내려주는데, 사목에는 염찰(廉察) 대상 및 내용을 조목별로 지정하였다.
마패(馬牌)는 역마나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이다. 흔히 마패를 암행어사의 상징물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
암행어사임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임명장에 해당하는 봉서이다. 그리고 유척은 검시할 때, 또는
형구(刑具)의 크기 위반 여부를 검열하는데 쓰는 놋쇠로 만든 자[척(尺)]이다.
암행어사는 임명과 동시에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3마패, 국립중앙박물관]
[4마패 뒷면,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암행어사 제도의 운영과 지방통치(1999, 고석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 조선시대 왕의 친림 하에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 [본문으로]
- 출정한 군대의 식량 및 기타 물자의 공급에 관한 일이나 궁중 및 정부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를 맡았던 임시 벼슬.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 세종실록, 세종 17년 10월 5일 [본문으로]
- 죄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캐어 살핌 [본문으로]
- 미편(未便) : 편안하지 않다 [본문으로]
- 도 관찰사(觀察使) [본문으로]
- 중종실록 中 중종 4년 11월 9일 [본문으로]
- 중종실록 [본문으로]
- 암행어사 제도의 운영과 지방통치(1999) [본문으로]
- 왕이 종친이나 근신(近臣)에게 내리는 사서(私書).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암행어사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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