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의 여비를 ‘양자(糧資)’ 또는 ‘양찬(糧饌)’이라고 불렀다. 이런 용어가 전해내려 오는 것을 보면
어사에게도 분명 지급되는 여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는 있지만 여비에 대하여 명백한 규정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다만 성종 때 옥당의 한사람을 암행어사로 임명하면서 행자(여비)를 넣은 상자를 사저에 보냈다는
것과 경종 2년(1722)에 승지 이명익이 상주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예에 따른다”는 기록 정도가 있을 뿐이다.
고종 때까지도 이에 관한 규정이 없어, 때로는 지급하고 때로는 지급하지 않는 등 일정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암행어사는 고을에서 여비를 구한다든가 관권을 이용하여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숙소는 관가보다 주막을 택했고, 밥은 사먹던가 돈이 없으면 걸식을 해야 했다.
암행어사가 여비를 자비 부담함으로써 여러 가지 폐단이 드러나면서 경우에 따라 여비를 해당 관서에서 지급하기도 했지만, 결국 고종 때에 가서야 1등에서 6등급까지 차등을 두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고종 때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암행어사 여비는 1일 80리를 기준으로 하여, 식비 4냥, 거마비 12냥8전,
인솔관원 2냥, 시종2인 3냥, 말2필과 마부 2냥 8전, 1일 숙박비 12냥3전, 합계 36냥9전이라고 했다1.
[한글조선전도(朝鮮全圖)2의 한양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원 부분, 국립해양박물관]
어사 박만종도 암행을 떠난 열흘 만에 행자가 다 떨어졌다. 박만정은 황해도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장단(長湍)에 들려 장단부사(府使)로 있던 사돈인 남필성에게 부탁해서 행자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도 열흘 만에 돈과 곡식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데리고 간 집안 하인 계봉에게 남아있는 무명 한 필을 팔아 곡식을 사오라고 보냈더니 하인이 도로 무명을 들고 들어왔다. 무명 한 필 값을 한 냥 팔 전밖에 안 쳐준다고 해서였다.
흉년이었던 당시 한 냥으로는 겨우 쌀 여덟 되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어사인 박만정이 직접 무명을 들고 나가 팔려고 했더니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행의 사정이 다급함을 알고는 더더욱 값을 싸게 불렀다. 박만정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무명 팔기를 포기하고 길을 가다가 마침 무명을 사러가는 승려 일행을 만나 두 냥 닷 전을 받고 팔아 곡식을 마련했다고 「해서암행일기」에 기록했다.
그런데 그 3일 뒤인 3월 19일, 박만정 일행은 또 다시 내일 양식을 걱정할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박만정이 있던 곳은 감찰의 대상이었던 추생지 중의 하나라 관아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어려서부터 절친했던 친구가 그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평안도 용강 현령(縣令)으로 있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배를 얻어 타고 황해도에서 이웃 도인 평안도로 떠났다. 거친 풍랑까지 겹친 뱃길을 밤새 달려 도착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친구인 용강 현령이 공무로 평양에 갔다는 소식에 낙담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안면이 있던 현령의 조카의 도움으로 행자를 마련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왕이 특별히 보내는 어사에 대한 지원이 이런 수준이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는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을 규정해 놓았다. 농사와 양잠을 성하게 하고(농상성農桑盛), 호구를 늘리며(호구증戶口增), 학교를 일으키고(학교흥學校興), 군정을 닦고(군정수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고(부역균賦役均), 소송을 간명하게 하며(사송간詞訟簡),·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는 것(간활식奸猾息)이다.
초기 암행어사의 임무는 이러한 수령들의 7사 거행 여부와 실적허위보고 유무 등으로 조사항목을 비교적 포괄적으로
정하는 한편 부정 등의 증거가 명백한 자 등을 가두고 국문 또는 신문하도록 어사의 권한을 강력하게 규정하였다.
그러다 암행어사제도가 발전함에 따라 사목이 구체화되었고, 후기에는 전정(田政)3, 군정(軍政)4,환정(還政)5의 3정(三政) 문란상황과 관리들이 근무실적을 조작하는 것 등 비위유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염찰케 하였다.
암행어사는 해당 도내에 들어가서야 감찰할 읍명을 서리들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이들을 몇 개조로 나누어 도내를 순회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암행어사가 직접 현장에 입회하여 좀 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바로 ‘출도’였다. 암행어사가 언제 출도 하느냐는 어사의 재량으로 날이 밝을 때나 야간에 출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방법은 관아의 3문(門)6을 대동한 하리나 역졸이 마패로 두드리면서 "암행어사 출도"를 소리치게 한다. 큰 도시에서는 잘 알려진 누각에 올라가 출도를 부르기도 하였다.
출도를 부르면 각 청사의 6방 이속이 관부에 모이게 되는데 수령은 이들 이속(吏屬)을 대동하고 암행어사를 영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암행어사는 자진 거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군관의 호위로 동헌에 나타나 수령의 영접을 받으며 평소 수령이 앉는 대청의자에 천천히 걸어 올라가 착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개좌(開坐)7라 하는데, 개좌할 때는 뒤에 병풍을 치고 야간이면 등불을 밝혔다. 각방의 이속들은 좌우에 열립하여 예를 갖추었다. 관아에서는 수령을 제외한 모든 이속들이 상당한 의례를 갖추어 배례를 한 다음 동헌을 내놓는다. 다만 수령을 규탄할 필요가 없는 때에는 직무수행을 위하여 동헌을 사용하겠다는 취지를 수령에게 통지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동헌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황해도 감영이었던 해주읍성, 여지도8, 서울대 규장각]
어사는 출도하면 행정이 잘 처리되고 있는가를 조사하고 검열하여 미흡하거나 태만한 부분이 있을 경우 관리들을 문책하고9, 부정한 방법으로 부당하게 거둬들인 세금이 있는지 살펴 과도하게 거둬들인 세금을 백성에게 다시 나누어 주며10,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자가 있는지 살펴서 그 진상을 조사하여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판결로 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11, 적발된 탐관오리들을 옥에 가두었다12.
수령이외의 향리는 어사가 직단 파직하지만, 수령을 파직시키기 위해서는 불법문서를 적발해서 조정에 보내어 왕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불법사실이 발견되면 현착(現捉) → 봉고(封庫) → 서계(書啓)13 → 파직의 4단계를 거쳐서 처리하였다. 불법문서의 현착(現捉)은 불법사실을 입증하는 문서에 수령의 답인(踏印)14을 받아 물증을 확보하는 것으로 봉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령의 답인문적15이 있어야 하고 어사 출도 이전에 작성된 문서여야만 했다. 봉고(封庫)는 창고를 봉인하는 것으로 ‘封庫’라고 쓰고 마패를 답인하여 창고 문에 첩부하는 것이다. 불법문서가 발견되면 수령의 관인을 압수하고 다른 조사관에 의한 좀 더 상세한 증거 조사를 위해 창고를 봉인한다. 봉고가 되면 군관이 이를 지키고 어사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암행어사가 봉고조치를 취하면 수령의 권한이 정지되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방은 상급관부인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그 지휘를 요구한다. 관찰사는 이웃 고을의 수령에게 겸직을 명하고 이조(吏曹)에 그 전말을 보고한다. 이조에서 암행어사의 처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면 당해 수령은 파직처분을 받게 된다. 수령의 봉고파직권은 관찰사 권한이기도 했다. 때문에 관찰사와 암행어사 간에 서열을 가지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일도 종종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사는 명목상의 지위나 권한이 관찰사보다 낮았지만, 실제로는 관찰사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암행어사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점검하고 형구의 적정 여부를 조사했으며, 억울한 송사인지 여부를 심리하여 부당한 죄수들은 풀어주었다. 이와 아울러 양민의 민원을 접수하여 잘못을 바로 잡아주는 것 또한 중요한 임무였다.
효자나 열녀, 효부 및 재주 있는 인물을 선발하고 혹은 수령의 치적이 있으면 포상하는 계문도 올려야 했다. 이러한 과정은 대개 여러 날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사는 출도 후에 백성들의 괴로움과 폐단을 살펴 그 변통책을 관찰사, 수령이나 지역 명망인사들과 논의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왕명을 수행한데 대한 보고서인 서계(書啓)와 지방민정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인 별단(別單)을 작성하여 왕에게 올린다. 그러면 왕은 어사를 불러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 묻고 의견을 나눈다.
이어서 서계에 대하여는 이조(吏曺)와 병조(兵曺)에서 해당 내용을 정리하여 복계(覆啓)16하고, 별단에 대하여는 비변사(備邊司)에서 그 대책과 함께 복계한다. 특히 서계에 커다란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보고된 수령은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처벌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암행어사의 임무는 모두 끝나게 된다.
백성들은 고통과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는 암행어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렸고, 암행어사를 짓눌린 백성의 불만을 풀어줄 해결사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 결과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사의 자질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어사가 업무를 불공정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어사가 출도했는데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가짜 어사도 등장했다.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암행어사 제도의 운영과 지방통치(1999, 고석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비변사등록 고종19년 12월 [본문으로]
-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한지에 수묵과 담채로 지리적 형태를 묘사하고 한글로 지명을 적었다 [본문으로]
- 전세(田稅)의 부과 징수를 근간으로 하는 수취(收取)행정 [본문으로]
- 원래는 6년에 한 차례씩 작성되는 군적(軍籍)에 의거해 번상병(番上兵: 군역 의무에 따른 복무 인원)을 차출하고 그에게 보(保)를 정급(定給)해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병무행정의 하나였으나 15세기 말엽부터는 군포(軍布)의 부과·징수를 행하는 하나의 수취행정으로 변하였다. [본문으로]
-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종자를 대여했다가 추수 뒤에 회수하여 농업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아울러 묵은 군량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어 두는 구빈(救貧) 겸 비축(備蓄)의 행정 [본문으로]
- 지방관청인 관아의 문은 아문(衙門)이라 하여 영역을 표시하는 홍살문과 관아의 정문으로 중층누문 형식인 외삼문(外三門), 동헌의 정문인 내삼문으로 이루어진다. 중층 누문 형식인 외삼문의 경우 아래층은 통행에 쓰이도록 판문을 달았고, 위층은 벽을 막지 않아 누각과 같이 통행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 법정이나 관청에서 공사(公事)를 처리하기 위해 관원들이 자리를 정하고 벌여 앉는 것. [본문으로]
- ‘여지도‘는 한양도성도, 조선 군현지도, 조선전도,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망라한 1789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책 [본문으로]
- 사열문박(査閱問迫) [본문으로]
- 반열창고(返列倉庫) [본문으로]
- 심리원옥(審理寃獄) [본문으로]
- 유치죄인(留置罪人) [본문으로]
- 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임무를 완수하고 보고하는 문서 [본문으로]
- 관인(官印)을 찍음 [본문으로]
- 나중에 자세하게 참고하거나 검토할 문서와 장부 [본문으로]
-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여 아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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