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8 - 암행어사 2

從心所欲 2019. 6. 17. 09:48

 

 

[조선 말기의 한성 거리]

 

암행어사가 받는 봉서(封書)는 왕으로부터 받든 승지로부터 받든 비밀유지를 위하여 안의 내용이 보이지 않게

되어있다. 봉서의 겉표지에는 지정된 성문 밖에서 개봉하라는 ‘도OO문외개탁(到OO門外開坼)’이라는 글귀가

붙는다. 봉서에는 감찰할 군현(郡縣) 지역과 암행어사의 임무와 직권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임무는 주로 봉서에 적혀있고, 사목(事目)에는 암행어사의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염찰

목적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봉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만정(朴萬鼎, 1648∼1717)은 숙종 22년인 1696년 3월에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3월 7일에서 같은 해 5월 12일 복명할 때까지의 65일간 암행어사로서 탐문,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라는 자필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에는 그가 암행어사로 임명받았을

때의 일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월6일 :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 임금께서 정원(政院)1에 전교 하시기를 전에 보덕(輔德)2 벼슬을 지낸

박 모(박만정 본인)와 군자감정(軍資監正) 이의창(李宜昌)과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정겸(李廷謙)을 내일

아침 함께 불러들이라 이르셨다.

 

3월7일 : 이른 아침 승정원에서 하인이 명패(命牌)를 갖고 급히 내달아 왔다. 이윽고 패찰을 받들고 궁궐에

이르니 이의창, 이정겸 등이 이미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과 한 처소에 같이 앉아 있은즉 도승지 정중휘가

아무개 등이 예궐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뜻을 위에 품달했다. 그러자 곧 임금께서 상피단자(相避單子)를 써

들이라 하셨다. 규정은 사촌 이내이거나 사돈, 동서지간이다.

나는 이 때 아무런 직함도 없어 병조에서 구두로 부사직(副詞直)3의 군직(軍職)에 붙인다는 통보를 받아

입계(入啓)하였다. 잠시 뒤에 전언을 받아 중사(中使)가 봉서 3건을 갖고 승정원에 이르자 모든 승지들이

열좌한 가운데 나와 두 이씨를 어전으로 불러들이더니 임금께서 손수 각각 봉서 하나씩을 나눠 주셨다.

봉서에는 ‘계(啓)’자가 눌려 찍혀있고, 그 앞면에는 모두 직함과 성명을 기재하고 있었는데 내가 받은 봉서에는

군직을 쓰지 않고 “前보덕박만정(前輔德朴萬鼎)”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리고 또 임금께서는 사알(司謁)을 시켜 납약(臈藥)4 다섯 종을 하사하셨다. 호조에서도 정목(正木)5

네 필과 백미, 콩 각각 5말과 민어(民魚) 세 마리, 석어(石魚)6 세 두릅을 노비(路費)로 보내 왔는데 이것은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전례에 따라 지급하는 것이다. 호조판서 이세화도 돈 닷 냥을 보내왔다. 응교(應敎) 심권,

문학(文學) 임윤원, 수원부(水原府) ●지7, 상서직장(尙瑞直長) 유술 등이 도승지 방으로 찾아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이씨와 함께 동대문 밖 관왕묘(關王庙)8에 이르러 봉서를 뜯어보니, 나는 황해도, 이의창은 함경도,

이정겸은 충청도였다. 잠시 행장을 수습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는 중에 액정서(掖庭署)9 하인들이 와서

우리가 속히 떠나지 않는지 기찰하므로 곧 각자 흩어져 속히 길을 떠났다. 영도교(永渡橋)10를 경유, 남산

바깥 벌아치(伐兒峙)의 소나무 숲 중사(中舎)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우가 찾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는 적게는 1개 군(郡)에서 많게는 2 - 3개 도(道) 또는 8도 등으로 그 활동지역을 지정한다.

원래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지역은 추생(抽栍)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선정하였다. 전국 8도의 도명(道名), 1도를

左右로 나눈 16도의 도명, 360 고을의 읍명(邑名)을 기입한 대나무 개비를 죽통에 넣고 왕이 직접 그 중에서

임의로 뽑아 여기서 뽑힌 도나 고을이 감찰대상으로 선정되었다. 8도 전부를 감찰지역으로 하는 팔도어사는

1550년(명종 5)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기록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11 박공량(朴公亮) 등 여덟 사람을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수령들의 불법(不法)을 살피도록 명하였다.”12는 글과 여기에 “곧 암행어사다.”라는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기록에서 암행어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원칙적으로 암행어사는 추생지역 외에는 규찰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암행어사들의 타지역에 대한 감찰업무가

끊이지 않아 숙종 대에는 월권이라는 판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영조 때 우의정 조현명은 “수령의 비리가 적발된

이상 감찰대상 지역이 아니더라도 봉고파직(封庫罷職)13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 이후에 어사를 많이 파견하면서 같은 읍에 여러 어사가 서로 출도(出道)14하는 혼란이 일어나면서

추생으로 결정된 지역 외의 감찰은 엄격히 금하게 되었다.

 

암행어사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마패는 마패에 조각된 수량만큼 역에서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패다.

조선시대에 공무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역제(驛制)는 조선조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었던 성종 대에

9대 간선도로와 140여 개의 지선을 중심으로 교통망이 형성되었고 543개의 역(驛)이 있었다. 역은 역마를 갈아탈 수

있는 관청으로, 인마(人馬)가 머무르는 여관의 구실도 하였고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어사에게 수여되는 마패는 시대에 따라 1마패, 2마패, 3마패 등으로 달랐는데, 고종 때에는 2마패를 주었다.

3마패의 경우 상등으로 1필, 하등으로 타는 말 1필, 짐 싣는 말 1필이 사용 가능한 범위였다.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는 어사가 인장 대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어사출두 때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 라고 크게 외쳤다.

마패는 직경이 약 9~10cm 이내의 구리쇠로 만든 원형의 패로 상부에 구멍이 난 돌출부가 있어 끈으로 허리에 찰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마패 앞면은 징발 가능한 말의 수를 표시하고, 뒷면은 발행처와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書院印)'을 새겼다.

유척(鍮尺)은 조선시대 도량형제도상 척도의 표준으로, 길이 246mm, 폭 12mm, 높이 15mm의 4각 기둥 형태의 놋쇠로 만든 자이다. 암행어사에게는 2개의 유척이 주어졌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笞)나 장(杖) 등의 형구 크기를

통일시켜 남형(濫刑)을 방지하는데 쓰였고, 다른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징수를 고르게 하는데 쓰였다. 어사가

도량형을 감찰했던 것은 지방관아에서 향리들이 곡식으로 세금을 걷을 때 쓰는 도량(度量)을 임의로 변경하여 사용하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암행어사의 파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암행’의 보장이었다. 누가 암행어사인지, 또 언제 어디로 무엇을

염찰하러 가는지 이런 모든 사항들이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암행어사 파견의 목적은 단순히 염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계심을 갖게 하는 의미도 상당히 컸다. 지방 수령들에게 누군가가 암행하면서 염찰하고 있다는

긴장감을 항상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선 암행어사를 수시(隨時)로 보내는 것이다. 일시에

한꺼번에 보내는 것보다는 수시로 내보내 앞서의 사람이 이미 지나가고 나서 다음 사람이 다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항상 암행하고 있다는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몇몇 고을을 염찰하게

하되 연속해서 내보내는 것을 모범으로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무시(無時)로 보내는 것이다. 정시(定時)에, 곧 규칙적으로 보내면 누구나 암행어사의 파견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때만 조심하기 때문에 감시의 효과가 떨어졌다. 따라서 수령이 짐작할 수 없게, ‘때 없이’ 보내서

언제 어디로 보낼지 임금의 뜻을 알 수 없게 하여야 했다. 그러면 한 군데만 어사가 나타나도 팔도가 단속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그래서 암행어사의 파견은 이처럼 수시로, 무시로 보내는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런 불규칙성, 임시성이

오히려 파견의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암행어사는 바로 “몰래 살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는 암행 도중 종적이 드러나면 더 이상 감시 효과를 갖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쉽게 위험에 노출되면서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일도 생기게 된다. 암행어사의 종적이 드러나는 요인 중의 하나는 따라 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암행어사가 혼자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도 암행어사와

동행하면서 도울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암행어사가 각사의 서리를 직접 가려 데리고 가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들 외에도 다른 무리들을 데리고 가서 대신 염탐하도록 하는 일이 많았다. 암행의 종적이 드러나는 일은

바로 이들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잡다한 무리의 수행을 금하도록 하였고 군관(軍官)을 1~2명 대동하던

관례도 금지시키게 되었다.15

 

순조 8년인 1808년, 순조는 암행어사를 파견하면서 환담을 나눈 일을 《일성록(日省錄)》16에 기록하였는데

역시나 동행하는 일행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경상좌도어사(慶尙左道御史) 이우재(李愚在)를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행로복색(行路服色)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이우재가 아뢰기를, “삿갓과 미투리에

중치막(中赤莫)을 입고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따르는 자는 몇 사람인가.” 하니

이우재가 아뢰기를, “일을 잘하고 염탐을 잘하는 자 수인(數人)과 더하여 시중드는 하인 한 명을 데리고

갈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이우재가 아뢰기를, “한 사람은

선산(善山)의 경주인(京主人)17이고 또 한 사람은 선산의 하리(下吏)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어떻게 하여 선산의 하리(下吏)를 데리고 가게 되었는가.” 하니 이우재가 아뢰기를, “선산부사(善山府使)가

신(臣)의 형이고 또 노모가 그곳에 계셔서 종종 기별을 보내는 일이 있는데 그 행차에 일찌기 이 하리의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몰래 선산부에 통하여 불러들였습니다.” 하였다.

 

박만정은 「해서암행일기」에 봉서를 열어본 이후의 행적을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패는 둘인데 3마패는 내가 갖고 단(單)마패는 서리(書吏)를 주었다. 수행하는 하인은 홍문관(弘文館) 서리

김성익(金成翼)과 청파(青坡) 역졸 선망(善望), 팔명(八命), 갑용(甲龍)과 왕십리(往十里) 역졸 선종(善宗),

가노(家奴) 계봉(季奉) 등 이다.

짐을 실을 말과 양식과 찬물 등이 오기를 기다리다 날이 저문 뒤에야 길을 떠났다. 타고 가는 역마가 늙고

말라 몹시 둔해서 연서역(延曙驛)18에 도착하여 조금 좋은 말로 바꿔 타고 길을 나섰다.

사현(沙峴)19을 넘으니 해는 저물어 날이 어두웠다. 창릉교(昌陵橋)20를 지나니 밤이 깊어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여석치(礪石峙)21의 촌락에 들어가니 마을 사람들이 어찌나 방색(防塞)22이 심한지 아주 어렵게 잠자리를

구하고 겨우 저녁밥을 먹으니 이경(二更)이 되었다. 나는 감기 탓에 기침을 자주 하였는데 주인집 늙은이가

아랫목에 자다가 꾸짖기를, "어찌 허락하지 않은 나그네가 이리 우리 집 창벽을 더럽히느냐"하며 듣기 싫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잠을 청하였다. 한동안 자고 나서 눈을 뜨니 날이 밝아 새벽의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서리 김성익을 김봉사라 부르며 평교(平交)23간처럼 대했다. 행장을 꾸리고 바로 길을 나섰다.

 

○봉서는 4장인데 하나는 민간을 염탐할 조목 17건이고 또 하나는 전결(田結)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어사가

지켜야 할 계칙, 마지막 하나는 추생(抽栍)된 열두 고을이었다. 임금께서 직접 쓰신 글이다.24

 

[보물 574호로 지정된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암행어사 제도의 운영과 지방통치(1999, 고석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 승정원 [본문으로]
  2.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를 가르치던 관직. [본문으로]
  3. 오위(五衛)소속의 종5품. 관품은 있으나 관직이 없는 경우 내려지는 산직의 벼슬자리 [본문으로]
  4. 구급상비약 [본문으로]
  5. 상질의 광목 [본문으로]
  6. 굴비 [본문으로]
  7. 원문 훼손으로 판독 안 됨 [본문으로]
  8. 임진왜란 후, 중국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조서(詔書)와 4천금의 건립 기금을 보내면서 관우를 봉사(奉祀)하는 묘우를 세우라고 강력하게 종용하여 우리 조정에서 동대문 밖에 터를 잡아 1601년(선조 34)에 설립한 묘사(廟祠). 현재 종로구 숭인동의 서울동묘공원 안에 있다. [본문으로]
  9. 왕명의 전달, 대궐의 설비 등의 일을 맡아보던 잡직 기관 [본문으로]
  10. 동관왕묘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 [본문으로]
  11.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 목장을 관장하는 사복시(司僕寺)의 정3품 관직(관직명사전) [본문으로]
  12. 명종실록 中 명종 5년 3월 18일(임오) [본문으로]
  13. 어사(御史)나 감사(監司)가 부정한 관리를 파면하고, 그 창고를 봉하여 잠그는 것을 가리킨다. 관가의 창고를 봉하여 잠근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관리의 업무 수행을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혹은 출두(出頭) [본문으로]
  15. 정조실록 中 정조 12년 1월 25일(무자) [본문으로]
  16. 순조8년 6월 [본문으로]
  17.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해둔 아전, 또는 향리 [본문으로]
  18. 현재의 은평구 연신내 근처에 있던 역 [본문으로]
  19. 현재의 서대문구 모래내 [본문으로]
  20.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인 창릉 주변의 다리. 창릉은 현재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안에 있다. [본문으로]
  21.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의 숫돌 고개. 통일로 삼송리에서 문산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본문으로]
  22. 들어오지 못하게 막음 [본문으로]
  23. 나이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사귐 [본문으로]
  24. 해서암행일기 3월 7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