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6 - 이서구 설화

從心所欲 2019. 6. 6. 10:35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의 명성을 얻었던 척재(惕齋) 이서구는 다섯 살 때인 1758년

(영조 34)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래서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외삼촌에게 글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17세가 되던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러나 21세 때인 1774년 가을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1785년(정조 9)부터는 벼슬길이 탄탄대로였다. 시강원 사서를

지냈고, 홍문관 교리를 거쳐 1787년 경상 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탄핵하였다. 이어 1795년까지

승정원 승지,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물론 때로 모함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공론을 배격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 실사구시(實事求是) 를 추구한 그를

총애하였다. 이서구는 1796년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된 후 좌승지, 이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며 정조를 곁에서 보좌하였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좌승지로 국왕의 장례에 참여하였고,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순조 즉위년인 1800년부터 1804년까지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05년 이경신(李敬臣)이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원망하는 행패를 보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1에 은거하여 15년을 살았다. 이런 이유로 후세 사람들이 학덕을 겸비하고 항상

백성을 생각하였던 그를 ‘양문대신(梁文大臣)’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1824년(순조 24)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7차례 사직 상소를 올려 끝내 출사를 거부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그의 묘비명에 의하면 그가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하인(下人)과 농상민(農常民)이 말하기를 “이상국(李相國)이 이르면 국가는 의지할 곳이 있어 백성들은 반드시 소생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서구가 끝내 사양하여 이르지 않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만큼 그는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던 관리였다. 하지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들이 없음과 늙어가는 것 그리고 벼슬을 한 일을 평생의 애석한 일로 여겼다고 한다.

이서구 묘비명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공(公)은 사람됨이 단중강방(端重剛方)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여, 그 부모를 섬기고, 종족에 거하고, 많이

어려운 자에게 이르렀다. 벼슬에 있을 때는 각고면려하여 겸손하였고, 일을 다스림에 사려있고 정밀하였다.

비록 만언(漫言)이라도 세밀하게 힘써 항상 삼가하여 오직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조정에 들어가 40년

동안 논함에 공평하였고, 편을 만들거나 고독의 뜻이 없었고, 또 학술로써 그것을 도왔으므로 견식이 가장

높았다. 을유년(1825)에 공(公)은 계비(繼妣)2의 죽음을 당하였고, 병이 날로 심하니 상(上)이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였고, 태의(太醫)를 보내 또 약을 주고 간병하였으나, 9월 29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72세로

임종하였다.

 

이서구에 대하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다양한 전설,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이서구의

출생지인 경기 지역과 치적이 남아 있는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지역, 노후의 은거지였던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전승되는데, 전라도 지역에서의 전승이 가장 많다. 전설 속의 이서구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인물로

묘사되고 예언가, 이인(異人), 구원가로 등장한다. 또한 수학과 입신과 능력에 관한 이야기도 많은데, 입신담은

주로 관료 시절 선정(善政)에 관한 내용으로 그가 관찰사를 지냈던 전라도 지역을 배경으로 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전한다. 또한 신이한 능력을 부각하기 위하여 설화 속의 이서구는 새소리를 알아듣고, 살인자를

잡기도 하며,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후임자를 예견하고, 이방의 아들이 중의 아들임을 밝혀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원혼을 만나기도 하고 이계(異界)와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전설에 따르면 이서구는 도술, 예언, 풍수에 아주 능했는데, 이런 능력을 백성을 위해 사용한다. 예언에 관한

것으로는 나합(羅閤)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 주를 이룬다. 나합은 순원왕후의 친오라비인 김좌근(金左根)의

애첩인 나주 기생출신의 양씨(梁氏)를 가르기는 말로 ‘나주의 합하(閤下)’라는 뜻이다. 합하는 대원군 또는

정1품 정승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김좌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절 중에 1853년부터 10년 동안 순조, 헌종,

철종의 세 임금 아래에서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로, 양씨 또한 그에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른 탓에 세간에 그런 호칭이 생겨났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수에 관련한 설화가 많다. '물은 30장을 내려가고 땅은 30장이 오른다고 예언했다는

부안 바다는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고, '이 누각 앞으로 화마(火馬)가 다닌다'라고 예언한 전주 한벽루 앞에는

기차 터널이 뚫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주의 집 방향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꿔 가난을 벗어났다는

가사좌향(家舍坐向)에 관한 내용도 있고, 전주의 땅 기운을 지키고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주성 북쪽을

보강하기 위하여 북고사(北固寺)에 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진북사로 바꾸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전주의

재물 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서북쪽에 숲을 조성해 숲정이라 부른 이야기, 승암산의 화재를 막으려고 인봉에

방죽을 만든 이야기, 전주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으로는 산지가 없고 트여있어 풍수적으로

좋지 않은 지형인데 북쪽 가련산(可連山)의 지세를 비보(裨補)3하여 물을 바로 흐르게 한 이야기 등이 전승된다.

 

실학자이자 유학자였던 이서구가 절에 관한 설화가 많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는 진묵(震默)대사가 수도하며 도통을 했다는 절인데 이 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는 궤짝 하나가 있었다. 궤짝에는 별로 많은 것이 들어

있지도 않아서 몇 대째 주지승들도 아예 열어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봉서사에

들렸다가 주지에게 그 궤짝이 무슨 궤짝인지 물었다. 주지는 진묵대사가 쓰시던 궤짝인데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열쇠로도 안 열어진다고 답했다. 그 말에 이서구가 열쇠가 있으면 안 열리는 법이 있느냐면서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서구가 열쇠를 넣자 그동안 어떤 열쇠로도 안 열리던 궤짝이 열렸다.

그 안에는 조그만 책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아무 날 아무 시에 전라 이 감사 개탁(全羅李監査開坼)4’이라고

씌어 있었다. 게다가 책에 쓰인 내용과 이서구가 궤짝을 연 날짜와 시간이 딱 맞았다. 전라감사 이서구는

진묵대사가 환생한 그의 후신이었다는 것이다.

 

진묵대사(1563 ~ 1633)는 술 잘 마시고 무애행(無礙行)5 잘 하기로 유명했던 조선시대의 이름난 승려다.

휴정(休靜)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후계자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석가모니불의 소화신

(小化身)이라고 했다.

신통묘술과 기행, 이적을 많이 행하여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났는데, 화포리(火浦里)의 옛 이름은 불거촌(佛居村)으로 부처님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불거촌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잃고 7세에 출가하여 봉서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경을 공부하는 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한 번만 보면 그 깊은 뜻을 깨닫고 다 외웠다고 한다. 진묵대사는 유가의 선비들과도 잘 어울렸다.

선비들과의 시회(詩會)에서 지었다는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개 삼아, 달빛은 촛불 되고

구름은 병풍이며 바닷물은 술통이라, 크게 취해 일어나 한바탕 신바람 나게 춤을 추고 나니, 긴소매 옷자락이

곤륜산 자락에 걸릴까 그게 걱정이네(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

라는 시구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술을 곡차라고 하는 것도 진묵으로 부터 유래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봉서사 전경]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위봉사(威鳳寺)와 관련한 설화도 있다.

 

이서구가 전라 감사로 처음 부임해 와서 초도순시를 하면서 위봉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때는 여름철이라

위봉사 주지가 감사에게 대접할 음식이 마땅치 않아 상좌와 함께 어떤 별미를 준비할지 고민했다.

전주장까지 다녀오려니 거리도 멀어서 주지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담장에 큰 구렁이가 보이자 주지는

그것을 잡아서 머리와 꼬리를 잘라 요리를 해서 감사를 대접했다. 이서구가 음식을 술하고 맛있게 잘 먹고

나서는 “고기 치고 대가리허고 꼬랭이 없는 고기가 어디가 있느냐? 어두일미라고 하니 대가리 좀 갖고 오라.”고

하였다. 전라 감사의 하문에 주지가 죽을죄를 지었다며 실토를 했다. 하지만 전라 감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감사가 먹은 것은 하늘을 보면 천기를 알고 땅을 보면 지리를 알 수 있게 된다는 흑질백장(黑質白章)6이었다.

이서구는 위봉사 주지가 대접한 흑질백장을 먹고 천기와 지리에 도통하게 되었다.

 

[위봉사]

 

 

6세기 후반,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한창 번창하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에 지금은 도솔암, 창담암, 석상암, 동운암 등 4개 암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암자는 도솔암으로 이 암자는 고려 태조 26년(943) 도솔선사가 창건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도솔선사가 암굴 속에서 참선하고 있을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목구멍에 비녀가 꽂힌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선사가 그 비녀를 뽑아 주었는데, 어느 날 그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고 와서 선사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선사는 기절한 처녀를 소생시킨 후 그의 집에 데려다 주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전라도

보성에 사는 배이방으로, 선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3백금을 내어 놓았고, 선사가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지었다. 이 도솔암 왼편의 칠송대라는 암벽에는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로 알려진 미륵 좌상이 양각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

(東佛庵)이란 공중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을 ‘동불암 마애불’이라고도 한다.

이 마애불에는 후세에 이르러 전설 하나가 생겨났다. “선운사 석불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 있어서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820년 전라감사로 있던 이서구7가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언뜻 보고 도로 비결을 쑤셔 넣고선 회로 봉해버리고 물러났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그 후 갑오농민혁명(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892년의 어느 날 전봉준, 김개남과 더불어 갑오농민혁명을

주도했던 손화중(孫和仲)의 집에서는 그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다. 모두들 벼락살을 걱정했지만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말하기를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을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고 했다.

동학도들은 석불의 배꼽을 깨고 비결을 꺼냈고, 이 일로 각지의 동학도 수백 명이 잡혀 들어가 문초를 받았으며

결국 주모자 세 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당시 미륵비결을 꺼낸 현장에 있었던 동학도

오지영이 쓴‘동학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894년 3월 20일 전북 고창 무장현의 동학군의 제2차 봉기(무장기포) 상상도]

 

 

‘이서구 개탁’이라는 글귀는 봉서사에 이어 도솔암 마애불 설화에서도 나오는데, 이는 선운사를 중심으로

전해지던 설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장소들과 적절히 결합하여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이서구가 양문에 은거하면서 영평천(永平川)8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을 때였다. 어떤 젊은 선비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선비 체면에 바지자락을 걷고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여보 늙은이, 나 좀 업어 건너 줄

수 있겠소.” 하고 이서구에게 청하였다. 이에 이서구가 흔쾌히 허락하고 백발노인답지 않게 가볍게 선비를 업고

내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내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젊은이가 그의 망건에 달려 있는 옥관자(玉貫子)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 뵙지 못하였습니다. 여기 내려놓아 주십시오.” 하고 사죄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옥관자는 정3품 이상 대신급만 사용하던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기왕 반쯤 왔으니

조금 더 갑시다.” 하고 여유 있게 내를 건너다 주었다. 이 젊은 선비는 철원으로 부임하는 군수였다고 한다.

젊은이가 백배사죄하니 그는 ‘세상사람 보기에는 모든 옳고 그름이 말에 있으니 스스로 자기를 갈고 닦아

근신하는 것밖에 더한 무엇이 있으랴.’라는 글을 써주고 훈계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전설의 또 다른 버전도 있다.

 

양문대신 이서구 대감이 현재 만세교9 부근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양반집 아들 하나가 지나가다가,

촌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자기를 저 건너편까지 월천(越川)을 해 달라고 했다. 발 벗고 건너기가

귀찮아서 업어 건너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양문대신이 선선히 그 사람을 월천해 주고는, 혹시 누가 묻더라도

자기가 월천해 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때 마침 해가 저물어 양반집 아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저녁에 모임이 있어 가보니 거기에

자기를 월천해 준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하여 물어보니, 그 분은 옛날에

대신을 지낸 분이라고 했다. 양반집 아들이 황급히 일어나 “제가 몰라 뵙고 월천을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누가 그런 걸 가르쳐 줬느냐?”

양문대신은 호통을 치며, 자기를 ‘양문대신’이라고 가르쳐 준 마을 사람을 먼저 벌을 주었다.
젊은이가 거듭 사죄를 하니까 양문대신이 말했다.

“일어나서 내 말을 듣게. 사람이 평생을 사는데 자네는 편히 가고자 하여 나보고 업어 건너달라고 한 거 아닌가?

옛날에 한 집에 시아버지도 귀머거리, 며느리도 귀머거리, 머슴도 귀머거리가 있었네. 하루는 영감이 멍석에다

보리를 널었는데, 이웃집 닭이 와서 벼를 쪼아 먹고 있었어. 그래서 닭을 친다는 게 그만, 너무 심하게 때려 그

닭이 죽고 말았다네. 이웃집에서 닭을 찾으러 왔는데 죄송하다고 해도 화를 내니까, 영감이 ‘당신 닭이 우리

보리 멍석을 헤쳐서 돌을 친다는 것이 잘못 쳐서 죽었는데 뭘 잘못했다고 야단이냐.’며 소리를 질렀어. 그런

찰나에 머슴이 대문을 들어서다가 영감이 막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낮에 볏단을 묶다가 하도

목이 말라서 술집에 벼 몇 단을 갖다 주고 술을 먹은 것이 생각이 난 거지. 머슴은 ‘이 영감이 벌써 그걸 알고서

이렇게 호통을 치시나’ 하고 생각했어. 그래서 주인 영감에게 ‘내가 하도 목이 말라서 볏단 하나 갖다 주고 술

한 잔 먹었기로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노발대발하시느냐’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네. 한편 그 집의 며느리가

또 남모르게 집에서 어른한테 얘기하지 않고 쌀을 꺼내 어린애에게 엿을 사줬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벌써 그 일을 알고 저렇게 걱정하시나’ 하고 생각했다네. 그래서 시아버지께 ‘아버님

애들이 하도 칭얼대서 말씀 못 드리고 엿을 몇 개 사줬노라’고 그렇게 사죄를 했어. 이 두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하려고 할 때, 이것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만둬야 하는데 모두들 그러지 못했다네.

자네가 나더러 월천해 달라고 했는데, 물론 자네도 처음부터 늙은이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겠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자넨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이니 자네에게

벌을 주지는 않겠네. 다만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는 것은 고쳐서 자네가 하게. 그러면 자네는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원불교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원형백과, 한국민속문학사전

 

 

 

 

  1. 포천천과 영평천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돌곡, 독글, 돌글 또는 독흘, 양골(梁骨), 양문(梁文)이라 불렀다 한다.(향토문화전자대전) [본문으로]
  2. 계비(繼妣) : 이을 계(繼), 죽은 어머니 비(妣)로 곧 의붓어머니 [본문으로]
  3.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실한 곳으로 바꾸려고 하는 방법. 대개 지기(地氣)가 허한 곳을 실하게 채우기 위하여 사용한다. [본문으로]
  4. 개탁 : 봉한 편지나 서류를 뜯어보는 것.(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5.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함 [본문으로]
  6.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뱀 [본문으로]
  7. 이서구는 1793년과 1820년, 두 차례 전라관찰사를 지냈다. [본문으로]
  8.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광덕산(廣德山)에서 발원하여 한탄강(漢灘江)으로 흘러드는 하천 [본문으로]
  9.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있는 만세교(萬歲橋)는 조선 태조가 함흥을 오가는 데 이 다리를 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만세다리 또는 만세교라 하였다.(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