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와 생원 말고도 예전에 쓰던 칭호에는 초시, 첨지, 선달 같은 것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모든 과거(科擧)의 맨 처음 시험을 초시(初試)라고 했는데, 소과든 대과든 초시에만 합격하고 2차 시험인 복시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초시라고 불렀다. 진사와 생원은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도 공인을 받는 신분이었던 반면, 초시는 요즘으로 치면 고시 1차 합격자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은 아니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이 호칭을 상대방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기도 하였을 것이고, 반대로 초시를 합격할 정도의 학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는 의미로도 불렸을 것이다.
반면 선달(先達)은 원래 조선시대 문무과(文武科)인 대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문관을 우대했던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들은 말직이라도 모두 관직에 진출하고, 설혹 관직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라도 사후에 명목상의 관직이 내려졌지만, 무과급제자는 한 평생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선달은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무과 급제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봉이 김선달이 무술에 능했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면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들은 한량(閑良)이라고도 불렸다.
<용비어천가>에는 한량을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속칭한다.’고 풀이하였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한량은 벼슬할 자격은 갖췄지만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인조 때 작성된 호패사목(戶牌事目)1에는 사족(士族)으로서 소속처(所屬處)가 없는 사람, 유생(儒生)으로서 학교에 입적(入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평민으로서 소속처가 없는 사람을 한량으로 분류했다. 그러다 정조 때의 무과방목(武科榜目)2에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였다.
한량이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그 뜻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으면서 직업이 없는 유한층(遊閑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근래까지도 ‘돈 잘 쓰고 놀기 잘 하는 사람’을 이르는 의미로 쓰여졌었다.
조선시대 한량은 언제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신분이라, 잠재적인 지배층으로서 향촌에서 유지(有志)로
행세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런 정도의 신분이면 굳이 본인의 돈을 쓰지 않더라도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대신 경비를 부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돈에 대해 좀스럽게 굴어 공연히 제 위신 깎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하는 일이 없어 놀기만 하다 보니 노는데 이력이 나 놀기도 잘 놀았을 것이다. 거기다 무과에 급제할 정도니 무력으로 누구에게 위압당할 일도 없어 어느 자리에서나 당당하고 언행에도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집안에 한량 소리 듣는 사람이 있으면 온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겠지만, 같이 어울리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호탕해 보였을까!
사전에는 첨지(僉知)를 ‘특별(特別)한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없는 나이 많은 남자(男子)를 동료나 윗사람이 예사(例事)롭게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뜻으로는 조선 시대에 중추원에 속한 정삼품 무관의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고 소개한다. 중추부(中樞府)는 조선 초기에는 중추원(中樞院)이었다가 세조 때 개칭된 명칭인데 문무 당상관(堂上官)으로서 직무가 없는 자를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병조(兵曹) 소속의 관청이다. 초기에는 왕명을 출납(出納)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순장(巡將)으로서 야간에 궁궐이나 도성 내·외의 순찰을 맡기도 하였으나 나중에는 특정한 소관 업무가 없는 부서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첨지중추부사는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받는 명목상의 직위로 인식되다가 어느 때에 나이 든 노인의 속칭으로 쓰이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지금 쓰이는 영감이란 호칭은 여러 가지 용례와 해석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으로는 나이 든 노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영감(令監)은 종2품과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정2품 이상의 당상관을
대감(大監)이라 부르던 호칭과 같이 사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최근까지 사석에서 검사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고위직 공무원이나 지체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영감은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나이 든 부부 사이에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 더욱 익숙하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만 들을 수 있던 호칭이 이제는 그저 나이 먹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호칭이 된 것이다. 첨지도 그런 변화를 거친 호칭일 수 있다.
이런 추측과는 별도로 첨지는 형식상의 관직으로도 존재했다. 임진왜란 때부터 국가재정이 부족하여 나라에서
재물을 받고 형식상의 관직을 부여해 주는 첩(帖)을 발행하였는데 받을 사람의 이름은 비워둔 백지
임명장이라는 의미의 공명첩(空名帖)이었다. 이 공명첩에 가장 많이 사용된 직책이 동지(同知)와 첨지(僉知)였다.
조정에서 자주 논의가 될 정도로 이 공명첩이 남발되었는데 그 여파로 첨지라는 호칭이 조선시대 후기에
보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특별히 어떤 관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저 우리가
친숙하지 않은 상대방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양반은 과거 급제한 문반과 무반을 통칭한다. 나중에 추존된 벼슬이 아니라 실제 벼슬인 현직(顯職)을 맡은 경우, 본인을 포함해 4대까지만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4대가 지나도록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이론적이라는 단서가 붙는 이유는 재력이 있는 집안과 그렇지 못한 집안 사이의 차이가 분명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급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문제이기도 했다. 계속 벼슬길이 이어지는 집안에서는 어느 개인이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초야에 묻혀 사는 여유도 부릴 수 있지만 벼슬길이 끊어진 집안에서는 과거야 말로 가문의 명운을 다투는 일이기도 했다.
본격 과거시험인 대과, 그 중에서도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를 예로 들자면 과거시험은 3단계로 나뉜다. 초시, 복시, 전시(殿試)다. 우선 초시는 『경국대전』에 정해진 각 도별 T/O예 따라 식년(式年) 전 해 가을, 전국에서 1차적으로 190인을 선발한다. 또한 지역별 초시와는 별도로 성균관에서 성균관 유생만을 대상으로 관시(館試)를 실시하여 대과 응시 자격자 50인을 선발한다. 그리하여 초시 합격자는 총 240인이 된다.
식년 봄에 문과초시 합격자 240인을 한양에 모아 다시 고시하여 33인을 뽑는 것을 복시 또는 회시(會試)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전시(殿試)는 왕이 직접 참석한 자리에서 복시 합격자 33인의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이다. 따라서 부정행위 등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 시험에는 탈락자가 없다. 등급을 결정하는 방법은 세조 때부터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정해졌다. 이 중 갑과 1등이 장원으로, 장원 1인은 종6품, 갑과 2인은 정7품, 을과 7인은 정8품, 병과 23인은 정9품계를 주었다. 그렇다고 모두 바로 등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갑과 3명에게만 실직(實職)을 주고 그 외에는 자리가 나는 것을 기다려 등용하였다. 소과 입격자들이 백패를 받는 대신 대과 급제자들에게는 홍패(紅牌)가 주어졌다.
공원(貢院)은 과거시험장을 가리키고 춘효(春曉)는 봄날 새벽을 뜻한다. 이 그림을 ‘공원춘효도’라고
부르는 것은 김홍도가 따로 화제를 쓰지 않았고, 그림 상단에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쓴 제발이
공원춘효(貢院春曉)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림은 봄에 한양에서 치러지는 복시 과장을
그린 것이지만 새벽이 아니라 과거 시험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다. 강세황은 제자인 김홍도가 그린
그림에다 이렇게 감회를 적었다.
과거장의 봄날 새벽은 수많은 개미가 싸우는데
붓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는 자가 있고
혹은 책을 펴서 살펴보는 자도 있고,
펼친 종이에 붓을 휘두르는 자도 있고,
혹은 우연히 서로 만나 말을 나누는 자도 있고.
혹은 짐에 기대어 곤히 잠든 자도 있는데,
등불과 촛불은 빛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모사의 오묘함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은 듯하니,
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깊이 가슴이 아플 것이다.
표암 (강세황)貢院春曉萬蟻戰鬪, 或有停毫凝思者,
或有開卷考閱者, 或有展紙下筆者,
或有相逢偶語者, 或有倚擔困睡者,
燈燭熒煌人聲搖搖, 摸寫之妙可奪天造,
半生飽經此困者, 對此不覺幽酸.
豹菴
과거 시험장인 과장(科場)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서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엄숙하게 치러졌을 것으로 생각했던 과거 시험장의 모습이 아니다. 일산(日傘)아래 몇 명씩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흡사 어디 놀러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전용시험장으로서의 공원(貢院)이 없어 늘 임시시험장에서 시험이 치러졌는데 시험장에 대한
허술한 관리와 통제로 과거가 진행되는 동안 각종 부정행위가 일어났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순조 때인 1818년, 성균관의 부총장격인 사성(司成) 이형하(李瀅夏)가 다음 해에 있을 식년시를 앞두고
순조에게 올린 상소를 보면 과거시험장의 질서가 얼마나 문란했는지 짐작이 간다.
“거리낌 없이 남이 대신 글을 짓고 대신 써 주는 것, 수종(隨從)들이 너도나도 책을 가지고 과장에 들어가는 것, 과장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는 것, 시험지 제출이 순서 없이 뒤죽박죽되는 것, 바깥에서 써 가지고 들어가는 것, 시험 문제를 유출하는 것, 이졸(吏卒)들이 얼굴을 바꾸어 드나드는 것, 답안을 마음대로 바꾸고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정행위들이 생겨나 제가 다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익(李瀷, 1681 ~ 1763)도 『성호사설』에 “오늘날 과거 시험에 뽑히는 글은 태반이 미리 지은 것이거나 남이
대신 지은 것이다. 한 사람이 세 사람, 혹은 다섯 사람의 것을 겸하여 짓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고 적었다.
이 시기에는 부정행위를 도와주는 일명 ‘첩(接)’이라고 불리는 직업도 생겨났는데, 좋은 자리를 먼저 잡기
위해 고용하는 선접군(先接軍), 문장에 능숙하여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거벽(巨擘), 글씨를 대필해주는
사수(寫手) 등이 있었다. <공원춘효도>그림 속에 수험생과 함께 일산 속에 있는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다.
아래 그림들은 모두 평생도(平生圖)3 병풍 중에 <소과응시>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분위기는 매양 마찬가지다.
각각 다른 병풍에 있는 그림인데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그림을 모사한 듯 필치를 제외하고는 등장인물의
배치까지 똑 같은 것이 눈에 띈다. 또한 이 그림들은 앞글에서 본 김홍도의 평생도 중 <소과응시>를 원형으로
하여 아주 작은 변화만 줬을 뿐, 거의 베껴 그린 수준이다.
[작자미상, 평생도 10폭 병풍 중 <소과응시>, 지본담채, 경기대미술관]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월간민화,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의 경기일보 기고문,
스마트K(한국미술정보개발원), 우리역사넷
- 지금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개념으로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호패에 관한 규정 [본문으로]
- 무과 급제자 명부 [본문으로]
- 평생도(平生圖)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일종으로 어느 개인의 일생 중 가장 영광스럽고 기념이 될 만한 장면을 8폭이나 10폭에 그린 것이다. 김홍도(金弘道)의 전칭작을 비롯해 19세기에 제작된 사례가 여러 점 전한다. 조선 후기의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평생도를 제작하는 유행이 있었던 듯하다. 평생도에는 생애의 순서에 따라 돌잔치와 혼인식이 들어가고, 과거급제(科擧及第)와 주요 관직의 부임, 그리고 회갑, 회혼례 등이 소재로 그려졌다. (월간민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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