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14 - 벼슬

從心所欲 2019. 8. 27. 19:39

 

 

조선시대까지의 전통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벼슬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야에 묻혀

지내기를 원하는 은둔자가 아니라면 모든 선비는 벼슬에 목을 매었다. 하지만「대학(大學)」을 읽으며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웅지를 품었던 많은 선비들에게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식년문과로 3년에 33명을 뽑고 기타 여러 부정기적인 과거를 통하여 추가 선발을 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1년에

몇 십 명도 안 되는 인원이 새로 관직에 오를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무과에서는 문과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시취(試取)되었지만 무반(武班)을 천시하는 분위기와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무반은

대부분의 선비들에게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내내 계속되었던 당쟁이 표면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다투는 대의명분의 싸움이었지만, 득세하는 쪽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더 많이 관직에

오르게 할 수 있다는 실리적 이점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경복궁의 근정전을 비롯하여 궁궐의 정전(政戰) 앞마당에는 품계석(品階石)이 세워져 있다.

좌우 12개씩 24개가 있는데, 1품에서 3품까지는 정(正), 종(從)으로 구분하여 6개, 4품부터 9품까지는

정, 종을 구분하지 않고 6개를 세웠다. 이런 것을 보고 막연히 조선시대의 벼슬 등급이 정, 종을 합하여

18개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벼슬아치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자급(資級)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자급은 우선 9개의 등급으로

나누는 것을 품(品), 품을 다시 정(正)과 종(從)으로 구분한 것을 급(級), 급을 다시 세분한 것을 계(階)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쌍계(雙階)라 하여 다시 상(上), 하(下)로 나누었고 7품 이하는

단계(單階)라 하여 상, 하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자급은 총 18품 30계였다.

 

品階

문반계(文班階)

 

무반계(武班階)

 

품계명

 

 

품계명

관직

正一品

 

從一品

 

正二品

 

從二品

 

正三品

大匡輔國崇祿大夫

輔國崇祿大夫

崇祿大夫

崇政大夫

正憲大夫

資憲大夫

嘉靖大夫

嘉善大夫

通政大夫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좌찬성, 우찬성

판사

좌참찬, 우참찬

대제학, 판서

대사헌, 관찰사, 부윤

참판, 동지중추부사

승지, 목사, 부사, 참의

大匡輔國崇祿大夫

輔國崇祿大夫

崇祿大夫

崇政大夫

正憲大夫

資憲大夫

嘉靖大夫

嘉善大夫

折衝將軍

당상관

從三品

 

正四品

 

從四品

 

正五品

 

從五品

 

正六品

 

從六品

通訓大夫

中直大夫

中訓大夫

奉正大夫

奉列大夫

朝散大夫

朝奉大夫

通德郞

通善郞

奉直郞

奉訓郞

承議郞

承訓郞

宣敎郞

宣務郞

대사간

도호부사, 사간

집의, 참교, 병마첨절제사

응교, 전첨

군수, 사인, 장령

경력, 첨정

서윤, 부응교, 교감

전수, 정랑, 헌납

지평, 교리, 별좌

판관, 도사, 현령

 

수찬

좌랑, 감찰

부수찬, 교수, 현감

찰방, 주부, 전적

 

禦侮將軍

建功將軍

保功將軍

振威將軍

昭威將軍

定略將軍

宣略將軍

果毅校尉

忠毅校尉

顯信校尉

彰信校尉

敦勇校尉

進勇校尉

勵節校尉

秉節校尉

당하관

 

 

 

 

 

 

참상관

 

 

正七品

從七品

正八品

從八品

正九品

從九品

務功郞

啓功郞

通仕郞

承仕郞

從仕郞

將仕郞

 

迪順副尉

奮順副尉

承義副尉

修義副尉

效力副尉

展力副尉

참하관

조선 초기에는 문치주의가 강화되고 양반관료체제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왕족과 왕의 사위들까지도 문산계를

받도록 하였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 종친계(宗親階)와 의빈계(儀賓階)가 문산계 내에 설치되었다.

종친(宗親)은 동성(同姓)을 종(宗)이라 하고, 부계(父系)를 친(親)이라 일컬은 것으로 왕의 부계 친척을 말한다.

의빈(儀賓)은 왕이나 왕세자의 부마를 관제(官制)상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을 문산계와 별도로 두었던 것은

국왕의 족친인 이들을 우대하면서도 이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 출처 : 위키 실록사전]

 

왕의 정실부인의 아들인 대군(大君)의 자손은 현손(玄孫) 곧 4대손까지를, 후궁의 아들인 군(君)은 3대손까지

종친(宗親)으로 예우하였다. 왕의 정실부인의 딸인 공주에게 장가든 자는 종1품 숭덕대부를 초수(初授)1하고,

후궁의 딸인 옹주에게 장가든 자는 종2품 순의대부(順義大夫), 세자의 정실부인의 딸인 군주(郡主)에게

장가든 자는 정3품 정순대부(正順大夫), 세자의 후궁의 딸인 현주에게 장가 든 자는 종3품 돈신대부

(敦信大夫)를 초수하였다.

 

이상의 관계(官階)는 양반에 대한 것으로, 양반이 아닌 계층의 벼슬인 잡직(雜職)과 토관(土官)의 관계는

이것과는 별개로 설정되어 있었다. 기술직에 해당하는 잡직의 최고 품계는 정6품, 국경지역 토호세력인

토관에게 위무 차원에서 주는 벼슬은 최고 품계가 정5품이었다. 

 

여성들에게도 별도의 품계가 있었다.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다.

내명부는 후궁과 궁녀가 합쳐진 여자 관료, 즉 여관(女官)에 대한 품계이고 외명부는 특수층의 여인과 종친의

처와 문무백관의 처 등에 대한 품계이다.

 

품계

내명부

외명부

왕실(王室)

종친처(宗親妻)

문무관처(文武官妻)

無品

왕비(王妃),

세자빈

공주(公主)

옹주(翁主)

 

 

정1품

빈(嬪)

부부인
(府夫人)

부부인
(府夫人)

군부인
(郡夫人)

정경부인
(貞敬夫人)

종1품

귀인(貴人)

봉보부인
(奉保夫人)

郡夫人

貞敬夫人

정2품

소의(昭儀)

군주(郡主)

현부인
(縣夫人)

정부인
(貞夫人)

종2품

숙의(淑儀)

현주(縣主)

縣夫人

貞夫人

정3품

소용(昭容)

 

愼夫人

숙부인
(淑夫人)

종3품

숙용(淑容)

 

愼人

淑人

정4품

소원(昭媛)

 

惠人

令人

종4품

숙원(淑媛)

 

惠人

令人

정5품

상궁(尙宮),상의(尙儀)

 

溫人

恭人

종5품

상복(尙服),상식(尙食)

 

溫人

恭人

정6품

상침(尙寢),상공(尙功)

 

順人

宜人

종6품

상정(尙正),상기(尙記)

 

 

宜人

정7품

전빈(典賓),전의(典衣),

전선(典膳)

 

 

安人

종7품

전설(典設),전제(典製),

전언(典言)

 

 

安人

정8품

전찬(典贊),전식(典飾),

전약(典藥)

 

 

端人

종8품

전등(典燈),전채(典彩),

전정(典正)

 

 

端人

정9품

주궁(奏宮),주상(奏商),

주각(奏角)

 

 

孺人

종9품

주변치, 주치, 주우,

주변궁

 

 

孺人

 

내명부의 가장 높은 자리는 왕비다. 하지만 왕비는 따로 품계가 없다. 품계가 없는 것은 왕세자빈(王世子嬪)도

마찬가지지만 내명부는 왕비 소관이다. 1품에서 4품까지는 후궁이고 5품에서 9품까지가 궁녀이다. 희빈, 경빈

같은 명칭은 정1품의 위호(位號).인 빈(嬪) 앞에 희(禧)자와 경(敬)자를 붙인 것일 뿐 위계상의 차이는 없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는데 무수리는 이 품계에 들지 못하는 여종의 신분이다. 5, 6품의

상(尙)과 7, 8품의 전(典) 뒤에 붙는 글자는 담당하는 업무 내용을 의미한다. 또한 9품의 주(奏) 다음에 들어가는

글자는 궁상각치우 5음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왕의 딸들안 공주와 옹주는 외명부에 속하고 역시나 무품(品)이다. 왕실의 정1품 부부인(府夫人)은 왕비의

친정어머니에게 주어지는 품계이고, 종친의 부부인(府夫人)은 대군의 부인, 즉 왕의 며느리에 대한 품계였다.

봉보부인(奉保夫人)은 왕의 유모에게 내려지는 품계인데 왕자가 왕이 되었을 때 책봉된다.

문무관처(文武官妻)의 품계는 문무관 대신들의 품계에 따라 그 부인들에게 주어진다. 즉, 정경부인은 문무관

정·종 1품 대신의 부인에게 주어지는 위호이다.

 

이외에 일명 동궁(東宮)으로 불리는 세자궁(世子宮)에도 별도의 품계가 있었다.

 

[<왕세자출궁도>2 中 제2면, 1817, 지본채색, 34.0 × 46.5cm, 고려대도서관]

 

[<왕세자출궁도> 中 제4면, 1817, 지본채색, 34.0 × 46.5cm, 고려대도서관]

 

[<왕세자출궁도> 中 제5면, 1817, 지본채색, 34.0 × 46.5cm, 고려대도서관]

 

사극을 보면 왕 앞에 엎드린 관리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신(臣)들이....”라고 하는 대사들이 나온다.

또 삼강(三綱)에 군위신강(君爲臣綱)이라는 말이 있듯, 왕권시대의 관리는 신하를 의미한다. ‘신(臣)’은 본래

‘포로’를 뜻했던 글자였다. 고대에는 잡히거나 항복한 포로들을 왕실의 노예로 삼았었다. 상형문자의 ‘臣’자는

고개를 숙인 사람의 눈을 그린 것으로, 왕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그린 것이라 한다.

‘신(臣)’은 비록 신분이 하인이었지만 그들은 권력자의 측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권력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이들 신(臣) 집단이 관료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 고위 관료의 칭호였던 재상(宰相), 복야(僕射), 시중(侍中)의

내력을 보아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재(宰)는 요리사였고, 상(相)은 왕에게 면복(冕服)을 입히는

노복(奴僕), 복인(僕人)과 야인(射人)은 군주의 측근 환관(宦官), 시중(侍中)도 환관으로서 천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재상(宰相)은 왕을 보필하던 최고위 정치담당자를 부르던 칭호가 되었고 시중(侍中)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재상직을 통칭하는 의미를 비롯하여 으뜸벼슬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시앗’의 의미로 쓰이는 첩(妾)도 원래는 여자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첩(妾)이란

한자에는 계집종이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에는 부처(副妻)를 의미하는 잉(媵)이란 말이 따로 있었고,

이때의 첩(妾)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시침(侍寢)의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귀족이 몰락하고

전제군주권이 신장되면서 일반민 중에 부유한 자들이 부처를 삼을 목적으로 여자노예를 샀는데, 이들을

복첩(僕妾)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후 첩이란 말에 의미 변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잉(媵)이란 말은

조선시대까지도 쓰였다.

‘신첩(臣妾)’이란 말은 여자가 임금에게 자기를 낮추어 부르던 일인칭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신(臣)이 남자노예, 첩(妾)이 여자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하니 ‘신첩(臣妾)’은 원래 남녀노예를 합쳐 부르던

단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관료가 노예였던 신(臣)에서 유래된 점을 감안하면, 왕권시대의 관료들에세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봉사와 복종이 요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1. 벼슬을 처음으로 줌  [본문으로]
  2. 왕세자출궁도는 전체 16폭 3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화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