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16 - 궁녀 2

從心所欲 2019. 9. 2. 18:51

 

성종 때만해도 왕의 대전에 잡역 궁인을 제외한 궁녀의 수는 20명, 왕비의 내전에도 10명이 안 될 정도로

조촐한 편이었다. 그러다 인조 대에는 전체 궁녀의 수가 230명 정도였다가 왕실 구성원이 늘고 임무가

늘어나면서 영조 대에는 600명 정도로 불어났다.

 

궁녀들은 소속된 전(殿)을 둘러싼 행랑의 방에서 살았는데 정식나인이 되면 방이 주어져 2~3명이 함께

사용했으며 이때 한방을 같이 쓰는 나인들은 상궁이 될 때까지 20년 가까이를 방 동무로 지내야 했다고 한다.

각 나인의 처소에는 방청소와 심부름을 하는 하녀도 한명씩 배정되어 일상적인 일보다 주어진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같은 궁녀라도 상궁과 일반 나인 간의 신분적 격차는 컸다. 상궁이 되기 전에는 항아(姮娥,

嫦娥)님이라 불리다가 상궁이 되면 대가(大家)댁 소실(小室)을 높여 부르는 말인 ‘마마님’이라 불렸다. 또한

소속 궁 안에 방을 하나 배정받아 따로 세간을 내는 특전을 받아 따로 밥 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독방살림을

하는데 그 하녀들을 각방서리라 했다.

 

궁녀들 중에도 권력과 금력이 있는 것은 지밀상궁들, 그중에서도 제조상궁으로 자신의 친정 동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관대작들에게 전답(田沓)이나 취직에 관한 부탁을 할 정도의 권세와 지위를 갖고 있었다.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입궁 연조와 소속 처소에 따른 차등이 가장 기본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속해있는

처소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달랐다. 형식상 가장 높은 권위는 대비전의 궁녀였고 그다음이 대전, 중궁전,

그리고 세자궁의 순서였다. 비록 왕이라고 해도 대비전의 궁녀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는데, 이는 어머니인

대비를 모시는 궁녀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주인인 어머니에게 불효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유교적 인식

때문이었다. 같은 상전을 모시는 여관들끼리도 지밀나인, 도청나인(침방과 수방소속 내인), 처소나인의 순서로

엄격한 서열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지밀여관들의 근무형태, 인원, 근무자등은 궁궐의 최고기밀사항이라 관료조차 알 수 없었으며 관심을 가져서도

안됐다고 한다. 밤 근무를 하는 지밀나인은 상전의 침실을 지켜야하는데 대전의 경우 평균적으로 8명의

지밀궁녀가 왕이 자고 있는 방 주변에서 숙직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강녕전 같은 경우는 우물 정(井)자

형태로 방이 9개인데 그 중 제일 가운데 방이 왕의 침실로, 지밀나인들이 사방 8개의 방에 한 명씩 자면서 왕의

취침을 지켰으며 이불 같은 것은 없고 나무 목침 하나씩만 주어졌다 한다. 혹 왕이 어떤 궁녀를 취해 같이 잠을

자는 경우에도 민망하지만 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지밀은 이처럼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와 기거(起居)에서

의식(衣食)까지 그리고 잠자는 것까지 일체의 시중과 물품관리를 최측근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입궁해서

상궁까지 오르는 기간이 30~35년이 걸리는 다른 처소나인들에 비해 훨씬 빠른 25년 정도였다고 한다.

 

[복원된 경복궁 강녕전 내부, 문화유산채녈 사진]

 

 

[복원된 경복궁 강녕전 내부, 문화유산채녈 사진]

 

 

6처소의 궁녀들은 보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8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격일 근무제였다.

다만 침실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은 12시간을 근무하고 3교대 근무를 했다. 숙직을 한 궁녀들은 날이 밝으면 주간 근무자와 업무교대를 하고 퇴근을 해 24시간 휴식을 취한 뒤 그 다음에는 주간 근무를 하였다.

 

후궁들인 내관들과는 달리 궁관들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태종1년에 ‘태상전의 여관에게 월록(月祿)을 주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하지만 이내 국가재정의 낭비라는 이유로 중단이 되었다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궁녀들에게는 꾸준히 보수가 지급되었다. 궁녀들의 급여인 삭료는 온공상, 반공상, 반반공상으로 연조와 직위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궁녀들의 급여인 삭료는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처음 나인이 되면 쌀 4말 콩1말 5되 북어 13마리를 받고, 정5품 상궁이 되면 씰 16말 5되, 콩 5되, 북어 80마리, 아기나인은 쌀 4말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따로 옷감을 내려주고 연말이나 명절에는 특별 상여금 형식의 별도 하사품이나 보수도 있었다고 한다. 궁녀들은 궁중에서 식생활이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충분히 쓰고 남을 정도라 친가 부모·형제들에게 보탬을 줄 수 있었다.

 

궁녀들은 근무하는 날의 식사는 근무처에서 해결하였다. 왕과 왕비의 수랏상 물린 것을 퇴선(退膳)이라 하는데

저녁 퇴선은 다음 날 아침에, 아침 퇴선은 그날 저녁에 궁녀들이 퇴선간에서 먹었다고 한다. 퇴선을 하면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인 두리반에 음식을 옮겨 나이 순서대로 3~4차례에 걸쳐 먹는 방식이었다.

반면 제조상궁에 대한 음식 대접은 임금님의 수라상과 가짓수를 같게 하고 분량만 적게 하였다고 한다. 평소

궁녀들이 비번으로 처소에 있을 때에 필요한 야채나 고기 같은 부식은 내수사(內需司)1에서 대어주었다.

 

궁녀들은 격일근무와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놀이나 바느질, 뜨개질, 투호,

글씨연습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은 궁녀들의 전문성이다. 궁녀들은 열 살 전후에 입궁해서 특정 가사 노동에

수십 년 넘게 종사하는 궁중 가사노동의 전문가들이었다. 조선시대 궁궐 안의 바느질, 자수, 아이 양육, 음식 등

궁중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해온 사람들이 바로 이들 궁녀들이다. 지금 우리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복식과

자수, 음식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궁중 복식, 궁중 자수, 궁중 음식이 모두 이들 궁녀들의 업무 결과였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일자리를 잃은 궁정요리사들이 나와 궁중요리를 일반에 소개함으로써 프랑스 음식과

음식문화의 질을 높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듯이, 조선시대 이들이 왕실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들을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구경하고 맛 볼 수 있는 것도 대한제국의 종말로 궁중을 떠나게 되자 명월관이라는

조선요리점을 열어 궁중음식을 일반에 소개한 이 궁인들의 덕이 크다.

 

조선궁녀들의 궐 밖 외출은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월급을 타면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외출을 하려면 먼저 윗전 상궁에게 허락을 받고 또 담당 환관에게 승인을 받아 ‘출(出)’이라고

쓰인 패를 받아야만 궐 밖을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나들이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 패는 반납해야했다. 그리고

출입 장부에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자세히 기록하여 궁녀들의 대궐 밖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궁녀는 일단 궁궐에 들어온 뒤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생 궁중에서 살아야 했지만 한번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어서도 궁궐 귀신이

되어야한다는 궁녀들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중병이 들거나 가뭄 등 천재(天災)가 나타난 경우에는 궁녀의

방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모시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에는 중도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궁녀들을 출궁시킨 경우가 숙종과 영조 때에 두 번 있었는데 결혼하지 못한

여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문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었다. 그 원한을 풀어준다는 의미에서 궁녀를

출궁시켜 가난 때문에 결혼을 못한 노총각과 결혼을 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 경우에는 궁궐에서

나온 뒤에라도 궁녀의 혼인은 금지되었었다. 《경국대전》에 전직 궁녀나 무수리를 처 혹은 첩으로 삼는

관료들에 대해 곤장 100대라는 중형을 가한다는 규정을 두었을 정도이다.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상궁으로 나이가 들어 맡은 직임이 없으면서도 궁에 머무르고 있는 원로상궁들이 있었는데 그런 상궁들이 병들어 궁을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모시던 상전이 죽어서 불가피하게 궁을 나가야 하는 궁녀들의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의탁할 사가(私家)가 있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궁녀들은 지금의 동대문 밖 숭인동에 정업원이라는 절에 의탁하여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비구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내려주고, 공로가 있을 때에는 특별한 혜택도 주었다.

 

왕조 500년에 그 많은 궁녀들 속에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고 수많은 궁녀들의 얘기가 지금도 회자되지만,

그 중에서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섰던 궁녀도 있었다.

 

1896년 2월 11일 친일내각과 조선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이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전해에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군이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경복궁에 감금하다시피 하였던 고종이 궁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역사에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대사건을 성사시킨 결정적 인물이

‘엄상궁’이라 불리는 궁관이었다.

아관파천을 하기 전부터 엄 상궁은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계속하면서

궁궐의 출입을 감시하던 일본군의 환심을 사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다 자신의 가마 출입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것을 확인하자, 엄 상궁은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을 자신이 타고 다니던 가마에 태워 궁을 빠져

나가게 하여 러시아 공관에 피신토록 한 것이다. 이는 고종의 뜻을 따른 엄 상궁이 러시아 공관과 친러파,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결하며 계획하고 실행했던 사건이었다.

 

암 상궁은 5살 때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자리에 올라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 사실을 안 황후는 1885년 엄 상궁을 궁 밖으로 쫓아냈다. 엄 상궁이 32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은 5일 후에 고종이 엄 상궁을 다시 불러, 10년 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사진으로 전하는 엄 삼궁의 외모는 미인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외모관 때문이 아니라 엄 상궁은

당대에도 박색으로 평가됐었다고 한다. 고종이 엄 상궁의 총명함과 대담한 기질을 좋아했다는 설이 있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2 사진]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던 엄 상궁은 아관파천 다음 해인 1897년, 42세에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았다. 그리고 정식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되어 귀인과 순빈(淳嬪)을 거쳐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엄 상궁을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지만 숙종이 장희빈을 계기로 세워놓은 ‘궁녀는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황후에는 오를 수 없었다.

엄황귀비는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私財)를 들여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

(明新女學校)를 설립했으며, 또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던 양정의숙(養正義塾)에도 도움을 주었다.

또한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로 궁중에서 쓰는 미곡, ·포목,·잡화와 노비 등에 관한 일도 같이 담당했다 [본문으로]
  2. 순헌(純獻)은 황귀비가 된 엄 상궁의 시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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