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17 - 육담(肉談)

從心所欲 2019. 9. 28. 21:10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문물, 세태 풍속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떠도는 가설항담(街說巷談)ㆍ기담(奇談),

이문(異聞) 등의 짤막한 이야기를 패설(稗說)이라고 한다. 이러한 패설을 모은 책으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 아마도「고금소총(古今笑叢)」일 것이다. 「고금소총」은 1958년에 민속학자료간행회에서 간행한

소화집(笑話集)이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서거정(徐居正, 1420 ~ 1488)이 성종 때에 편찬했다는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을 포함하여 《어면순》, 《속어면순》, 《촌담해이》, 《명엽지해》,

《파수록》, 《어수신화》, 《진담록》, 《성수패설》, 《기문》, 《교수잡사》등 11개의 한문(漢文) 소화집에

있는 825편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소화(笑話)는 우스갯소리라는 뜻이지만 고금의 우스갯소리를 모았다는

「고금소총」은 실제로 음담패설(淫談悖說)로 더 유명한 책이다. 예전에는 음담패설을 육담(肉談)이라고 했다.

육담은 성에 관한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있을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들을 포괄한다.

이들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남녀 간의 성적 관계에 국한되어 있으면서, 이야기에서 선악(善惡)은 중요 관심사가

아니다. 정상적으로 성적 욕구를 해소할 방법이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문헌 육담에서는 혼외정사나

겁간(劫姦)과 같은 비정상적 방법들이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도덕적 고민이나 윤리적 갈등 없이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해도 권선징악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선악의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희화(戱畵)한다. 이를 골계(滑稽)라고 한다. 골계는 기지, 풍자, 반어, 해학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육담이면서 소화(笑話)인 것이다.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춘의도(春意圖)>]

 

조선시대의 한문 소화집 가운데 <이야기책(利野耆冊)>이라는 패설집이 있다. 이 책 중간에 “근래에 이희룡도

자못 말에 능했는데, 그는 들은 바를 기록하여 졸음을 깨고 적막함을 달래는 도구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어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가 이희룡(李喜龍, 1639 ~ 1697)이 살았던 때와 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 권율과 이항복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편 실려 있다. 권율(權慄, 1537 ~ 1599)장군은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한 명장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은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 더불어 ‘오성과 한음’의 일화 때문에

영의정을 지낸 대신임에도 불구하고 장난꾸러기의 이미지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오성(鰲城)’은

이항복이 1602년 오성부원군(府院君)1에 진봉된 데서 따온 호칭이다. 이항복은 1574년(선조 7) 18세 때

도원수 권율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권율의 집은 인왕산 남쪽 필운대 아래에 있었는데

이항복은 젊었을 때 이 집에서 장인과 함께 살았었다.

 

백사(白沙)·이항복이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할 때였다. 장인과 사위는 서로 뜻이 잘 맞아

평상시에도 항상 장난을 일삼았다. 특히 권율이 오줌을 눌 때면 이항복은 몰래 뒤를 쫓아가서 그 물건을

훔쳐보곤 했다. 권율은 그런 상황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은 오줌을 싸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물건은 자네 장인일세. 어찌하여 자네는 장인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권율이 오줌을 다 누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이항복이 권율의 뒤에서 나와

권율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이 무슨 거조(擧措)2냐? 이게 무슨 짓이냐?”

권율이 크게 놀라 말하자 이항복이 느긋하게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 오줌을 누고 바지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실 즈음에, 제 장인어른의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대시더군요. 사위인 제가 감히 그걸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급히 장인어른을 잡고

있는 놈의 뺨을 때려 내려놓도록 했을 뿐입니다.”

이에 권율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좆의 사위라 해도 성내지 않겠구나.”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이항복 초상. 작자 및 제작연도 미상. 견본채색. 35.0 x 59.5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도원수 권율 부부는 금실이 좋아서 매일 초저녁만 되면 침실에서 관계를 가졌다. 어느 날 이항복이 몰래 와서

엿들으니, 방 안에서는 운우(雲雨)의 즐거움이 한껏 무르익은 상태였다.

부인이 도원수에게 물었다.

“영감, 지금 심정은 어떠하신지요?”

“두 귀가 모두 막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소.”

권원수도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 심정이 어떠하오?”

“사지가 모두 뜯겨나가는 것 같네요.”

문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항복이 일부러 밖에서 기침 소리를 냈다.

권원수는 놀라고 민망하여 물었다.

“이서방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밖에 서 있는가?”

“잠은 오지 않고 심심하여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앉게.”

이항복이 들어와 앉자, 권원수는 짐짓 훈계조로 말했다.

“자네의 문장과 재주는 이 시대 최고이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걸세. 다만 흠이 있다면 말을 삼가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으니, 모름지기 힘쓰시게.”

“가르치심이 참으로 지당하옵니다. 이후로는 비록 다른 사람의 사지가 뜯겨나간다 해도 마땅히 두 귀를

막아 성급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권원수 부부는 이항복이 몰래 엿들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야기책(利野耆冊)>에는 또 이수만(李壽曼, 1630 ~ 1690)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3편이 있다.

현종 6년인 1665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주부사 등을 거쳐 정4품 관직인 사헌부의 장령(掌令)과

세자시강원의 필선(弼善)에 임명되는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수만의 자는 여로(汝老)이다.

 

이여로가 함경 도사(都事)3가 되었을 때 거산(居山)4 찰방도(察訪道)5 백일장 시관(試官)6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여 만났다. 다음 날 아침 본부의 판관(判官)7 권시경이 한 기생을 잡아와 중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여로가 이를 보고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판관이 말했다.

“지난밤 이 여인에게 거산 찰방의 잠자리에 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잠자리를 거역했다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비록 몸을 파는 천한 기생이라 해도 구실아치8에게 눈길을 받은 자나 지아비를 정해 같이 사는 자는

흔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 이 기생은 평소 음탕하기로 소문난 자로, 이른바 물 위에 놓인 다리[臥水者]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리의 대상을 거산 찰방으로 정하지 말아야 했소. 당신은 ‘물에서 사는 것(居水)이 산에서

사는 것(居山)보다 낫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12잡가의 하나인 ‘어부사(漁父詞)’에도 나오는 ‘거수승거산(居水勝居山)’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거산(居山)

찰방을 비유한 것)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크게 웃었다.

 

이여로의 양물은 지나치게 컸다. 여로가 벗들과 함께 밖에 나갔다가 같이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친구가

여로에게 말했다.

“자네는 병신일세. 반드시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걸세. 그런데도 어찌 치료하지 아니하는가?”

“나도 고민일세. 어찌하면 그것을 치료할 수 있겠나?”

“아주 쉽지! 술에 진탕 취해 인사불성일 때 허투루 양물을 크게 움직여 곧고 단단하게 세우게. 그리고 솜씨

좋은 목수에게 분부하여 미리 만들어둔 작은 도끼를 갈게. 아주 날카롭게 간 도끼날로 그것을 살짝살짝

깎아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만들게. 그렇게 한다면 어찌 잠자리에 불편함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여로가 대답했다.

“근래 자네 집에 땔감이 비어 아침저녁으로 밥을 빌어먹다보니 매번 때를 놓칠 때가 많다지. 그러니 내

그것에서 깎아낸 부스러기라도 아주머니께 보내줄까?”

모든 친구들이 크게 낭패를 당해 다시는 말을 잇지 못하더라.

 

여로는 여러 차례 아내를 잃었지만 또 첩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창동에 사는 이진사에게 배다른

누이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이진사에게 중매를 놓으니, 이진사가 허락하였다.

혼인날이 가까워지자, 이진사의 친구 심대재(沈大哉)가 그 사연을 듣고 이진사에게 말했다.

“여로에게는 이러저러한 병이 있어서 여러 차례 아내를 잃었네.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혼인을 허락하였는가?”

이진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여로와의 혼사를 물렸다.

그후 여로가 한 친구의 모임에 갔는데, 심대재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여로에게 물었다.

“자네가 이진사 집과 혼인을 약속했다는 말이 있던데, 어찌하여 함께 해로하지 않았는가?”

“한 괴악한 놈팡이가 저 집에 가서 이간질하기를 ‘여로의 그 힘이 심대재(甚大哉, 매우 크도다)라’ 한 까닭에

저 집에서 혼사를 물렸다네.”

심(沈)과 심(甚)의 음이 비슷한 까닭이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더라.

 

위에 소개한 이야기들은 옛 패설집에 있는 육담 가운데 거의 애피타이저 수준의 이야기들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어쩌면 아무런 감흥도 없을 이런 이야기를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억압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성에 대해 얘기했고 그 이야기 속에 해학을 잃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만일 지금 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까지 하는 어떤 인물이 룸살롱 가서 털주(酒)나 마신 이야기를 누군가가 글로 기록하여 남긴다면 후세는 이 시대의 격조 없음을 얼마나 한탄하겠는가!

앞에 소개한 신윤복의 작품으로 전(傳)해지는 《건곤일회첩》中 <춘의도(春意圖)> 그림을 다시 보자.

 

 

 

언뜻 보면 기방에서 기생 옆에 누워 빈둥대는 사내 모습을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기생의 앉은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엉덩이가 들린 모습이다. 누워있는 사내의 한 손이 보이지 않는다. 또 장죽을 물고 있는 기생의 오른 손도.

조선시대의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 찬찬히 음미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책(利野耆冊)>의 이야기들은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조선후기 성소화선집(김준형 옮김, 2010)에서 인용.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임금의 장인 또는 정1품 공신에게 준 작호 [본문으로]
  2. 말이나 행동 따위를 하는 태도 [본문으로]
  3. 종5품 외직으로 감영에서 관찰사(觀察使)를 보좌하는 수령관 [본문으로]
  4. 함경도 북청군 거산면 [본문으로]
  5. 찰방은 조선시대에 각 도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이며, 찰방도는 한 찰방의 책임 하에 있는 도로의 구간 [본문으로]
  6.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관여했던 벼슬아치들의 총칭 [본문으로]
  7. 소속관아의 행정실무를 지휘,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과 군정에 참여하던 종5품 관직 [본문으로]
  8.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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