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옛날이야기 15 - 궁녀 1

從心所欲 2019. 9. 1. 14:12

 

궁궐에는 왕이 산다. 물론 왕의 가족들도 있다. 얼핏 생각하면 왕의 가족들이 모두 궁궐에 모여 살았을 것

같지만, 거기에도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왕의 가족으로는 왕의 배우자와 직계 존속과 비속이 있다. 즉 왕비와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과 왕의 자손

그리고 그 배우자들이다. 왕세자가 아닌 왕의 자녀와 왕손들이 궁궐 안에서 살 수 있는 기간은 성인식인 관례와

계례(筓禮)를 치르기 전까지만 허용된다. 관례와 계례는 보통 13∼14세 때 치르지만 남자는 왕과 세자, 세손을

제외하고는 10세가 넘으면 궁궐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 남자들은 10세 미만까지, 여자들은 13세

이전까지만 궁궐에 머물 수 있었다.  대체로 8세 무렵부터 궁궐 밖에 저택을 마련해서 보모상궁과 소수의 궁녀를 

딸려 독립시켰다. 또한 왕 자녀들의 배우자는 장래 왕통을 이을 왕세자와 세손의 배우자에 한해서만 궁에서

살 수 있었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1906년 친잠례(親蠶禮) 1  후에 대신들의 부인, 궁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궁녀들은 궁중에서 왕과 그 가족들의 생활을 돕는 여인 집단이다. 물론 남자로는 내시들이 있었다. 전쟁에서

이긴 자들은 의자왕과 3,000궁녀를 연결시켜 의자왕에 천하의 호색한이라는 굴레를 씌웠지만, 궁녀는 왕의

첩실(妾室)을 가리키는 후궁(後宮)이 아니다. 궁녀는 궁중여관(宮中女官)으로, 말하자면 궁궐 근무자이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보자면 후궁도 궁녀를 가리키는 여관(女官)에 포함되기는 한다. 백제 때에 궁녀의 숫자가 3,000이라는

것도 턱없는 말이지만 혹 3,000궁녀라 하더라도 그 중에 후궁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조선 초기에는 미비했던 궁녀조직이 성종 때 ≪경국대전≫에 ‘내명부’로 명시되면서 측실(側室)로서 왕을

모시는 내관(內官)과 궁중의 살림살이와 왕의 가족들에 대한 시종 업무를 맡는 궁관(宮官) 으로 구별되었다.

내관은 후궁이고, 궁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 의미의 궁녀이다.

후궁은 대개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간택하여 맞아들이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궁녀가운데 후궁이 되는 경우다. 이것을 옛날에는 왕의 은혜를 입는다고 하여 승은(承恩)이라고 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인 시녀, 관비(官婢), 사비(私婢) 등이 왕에게 은혜를 입으면 단번에 정5품인 상궁자리까지도

올라갔다. 이들은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이들을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하였다. 하지만 승은상궁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내관인 종4품의 숙원 이상으로 봉해져 ‘승은 후궁’이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단독세대를 꾸리게 되는 것이

상례였다. 대표적 승은후궁으로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와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빈(嬪)을 거쳐 왕비까지 된 예도 있는데 문종의 비(妃)인 현덕왕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같은

경우이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사약을 마셨던, 장희빈으로 더 잘 알려진 희빈 장씨도 같은 경우다. 그러나 희빈

장씨의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는 궁녀에서 왕비로의 승격은 법령으로 금지되었다.

 

드라마에서는 늘 남의 시중만 받는 것처럼 보이는 후궁들에게도 각기 업무가 있었다. 1품인 빈과 귀인은 왕비를

도와 여인들의 예를 의논하며, 2품 소의와 숙의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고 3품 소용과 숙용은 제사지내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고 4품 소원과 숙원은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하면서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해마다 바쳐야 했다. 또한 후궁들은 종친의 내연(內宴)에 왕비를 따라 참석하고, 때로는 왕비의 소생을 맡아 키우기도 하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궁녀는 정5품부터 종9품까지의 품계를 받는 궁관과 품계가 없는 잡역 궁인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품계를 받는

궁관은 상궁, 나인, 그리고 나인의 견습생격인 애기나인의 세 등급으로 나뉜다. 궁관은 일정한 직임과 품계를

가지고 궁중 운영의 핵심이 되었던 계층으로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품계를 받지 못한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부렸다. 이 궁관 조직의 가장 높은 직위가 정5품의 상궁(尙宮)이다. 문과과거에 장원급제했을 때

처음 주어지는 품계가 종7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품계임을 알 수 있다. 상궁은 속해있는 궁(宮)의

궁녀들을 관장하면서 모시는 상전의 거동 때 상전을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정5품에서 종6품까지 앞에 상(尙)자가 붙은 직책이 8개나 되는데 상자 뒤에 붙는 글자는 담당하는 업무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상궁(尙宮)도 그런 직책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정5품의 또 다른 직책인 상의(尙儀)는 궁내의 의례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궁관이다.

하지만 이는 특별한 의식 때 소임업무에 따른 분류이고, 평상시는 모두 상궁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7품 상궁도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각각 모시는 상전의 거처 단위로 운영되었던 궁녀조직의 특성상, 해당 처소의 최고 책임자 궁관을 의례적으로 상궁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왕의 처소인 대전, 왕비의 처소인 중궁전, 대비전 같은 경우는 정5품의 상궁이 있었겠지만 후궁 처소에는 품계가 낮은 7품의 궁관이 상궁 역할을 하면서 상궁으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녀들의 지위는 입궁 연조와 소속처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입궁이 빠르면 지위가 높을 것은 당연하지만, 궁녀들 사이에서는 소속처가 어디냐에 따른 위계질서도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왕이 거하는 대전 소속의 궁녀의 위세가 가장 크지만, 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대비전의 위세가 더 당당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 뒤를 이어 , 왕비의 내전, 왕세자의 동궁전, 후궁 처소 등으로 자연스럽게 궁녀들 간의 암묵적 위계가 정해지는 것이다.

또한 같은 전(殿) 소속이라도 근무처에 따라 위계가 달라진다. 큰 전의 궁녀들은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내소주방(內燒廚房), 외소주방, 생과방(生果房), 세답방(洗踏房)의 일곱 군데의 독립 처소와 세수간, 퇴선간(退膳間), 복이처(僕伊處), 등촉방(燈燭房)의 부설 근무처로 나뉘어 임무를 맡는다.

지밀(至密)은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럽다는 뜻으로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大殿)이나 왕비의 내전(內殿)을 가리키는 말이다. 침방과 수방은 궁궐에서 쓰이는 의복을 만들고 수를 놓는 곳이다, ‘사를 소’에 ‘부엌 주’의 소주방(燒廚房)은 요리를 담당하는 곳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궁녀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소주방이다. 일반적으로 소주방과 수라간은 같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소주방은 음식을 조리하는 곳이고, 수라간은 음식을 차리는 곳이다. 소주방은 다시 또 왕과 왕비 등의 일상적인 수라상을 만드는 내소주방(內燒廚房)과 잔치음식을 장만하던 외소주방(外燒廚房)으로 나뉜다. 생과방은 생과, 차, 화채, 죽과 같은 별식과 후식을 만들던 곳이고 세답방은 빨래와 염색, 다리미 등의 옷 손질, 세수간은 세숫물과 목욕물, 타구와 변기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퇴선간은 탕을 데워 수라상을 차리는 곳인데, 소주방과의 사이에 중간부엌으로

설치된 곳이다. 복이처는 아궁이에 불을 때고, 등촉방은 등촉(燈燭)과 촛불을 뜻하는 납촉(蠟燭)을 담당한다. 각 전(殿)에소속된 궁녀의 수는 전(殿)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상궁과 나인을 합하여 15인 정도이고, 지밀은 20인 정도였던 것으로 전한다. 물론 그 밑에 품계가 없는 무수리 같은 잡역궁인들은 이 숫자에 들지 않는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2』중 반차도(班次圖) 부분, 월간문화재 자료]

 

 

[ 위 반차도 부분확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가는 상궁과 걸어가는 나인의 모습]

 

궁녀의 격은 지밀이 가장 높았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이었다.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이들이 맡은 소임이 마루 위나 방에서

하는 일이었기에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었다. 위 세 처소

외의 다른 처소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렸다.

 

상궁은 입궁 후 대체로 35∼36년이 되어 왕으로부터 정5품의 상궁 봉첩(奉牒)을 받는다. 따라서 애기나인이 상궁이

되려면 대략 나이가 40세 정도가 되는 것이다. 상궁이라도 직책에 따라 지위의 차이가 있었다. 가장 지위가 높은 상궁은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수백 명의 나인을 총괄하는 자리다.

제조상궁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였는데, 많은 궁녀들 중에 가장 높은 어른이다.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고(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아랫고[下庫]라 불리는 내전의 창고(倉庫) 물품 출납을 관리했다. 일명 지밀상궁으로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는 임무였으니 그 위세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 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함께 왕비나 왕대비의 특사로 왕비 친정을 왕래하는 역할도 하고, 국상(國喪) 때에는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은 각 왕자녀궁에 1명씩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는 당연히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이외에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하는 감찰상궁(監察尙宮)도 있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상궁들의 복장으로, 저고리와 비슷하나 길이가 무릎 근처까지 닿고, 둥근 곡선의

도련에다 옆이 겨드랑이에서부터 터져있는 겉옷이 있다. 초록이나 연두색 옷감에 자주색 고름이 달린 옷이다.

당의(唐衣)라 불리는 옷인데 평복 위에 입는 것으로 조선시대 양가(良家)에서는 예(禮)를 갖추어야 할 때 입는

예복(禮服)이었다. 하지만 궁중에서는 상궁들의 평상복이었다.

 

[당의, 서울역사박물관]

 

나인은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상궁을 포함하여 궁관 전체를 가리키던 호칭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상궁이 아닌 하급 궁관을 부르는 호칭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나인은 직책에 따라 지밀, 침방, 

수방, 소주방 등 7개 분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궁중 안살림을 분담하였는데, 지밀을 제외한 나머지를 6처소

(六處所)라 하였으며, 6처소에 속한 나인들을 처소나인이라 하였다.

애기나인은 성년식(成年式)인 관례(冠禮) 전의 소녀나인으로, ‘생각시’와 ‘각시’의 두 종류가 있었다. 생각시는

지밀, 침방, 수방 소속의 견습나인에게만 생머리가 허용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기나인은 입궁 후 15년이 되어야 관례를 치루고 정식 나인이 되는데, 통상적으로 7, 8세 때 입궁하는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22 ~ 23세경이 된다. 애기나인이 나인으로 승격할 때는 왕이 나인에게 첩지와 옷감을 내리고,

동시에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다. 정식 나인이 되면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3를 단

복장을 하게 된다. 나인에서 상궁까지 올라가려면 다시 또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의식 [본문으로]
  2.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 절차와 과정을 정리기록한 문서 [본문으로]
  3. 첩지는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장신구인데 나인들이 꽂는 첩지에는 한쪽 끝에 개구리 장식이 달려있었다 한다 [본문으로]

'우리 옛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날이야기 17 - 육담(肉談)  (0) 2019.09.28
옛날이야기 16 - 궁녀 2  (0) 2019.09.02
옛날이야기 14 - 벼슬  (0) 2019.08.27
옛날이야기 13 - 구도장원공  (0) 2019.08.21
옛날이야기 12 - 초시, 선달, 첨지  (0) 2019.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