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13 - 민옹전

從心所欲 2019. 11. 20. 16:17

[1880년에 촬영한 숭례문 앞의 거리. 출처 시사IN]

 

박지원이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던 시절, 민유신(閔有信)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 때 박지원은 열여덟 살이었고 민유신은 73세였다. 그 후 나이 차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

말동무가 되어 수년간을 지내다가 그가 죽자 그에 대한 일화를 엮어 1757년에 <민옹전(閔翁傳)>을 지었다.

 

<자서(自序)>

민옹(閔翁)은 사람을 황충(蝗蟲)같이 여겼고

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풍자와 골계로써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민옹(閔翁)이란 이는 남양(南陽)1 사람이다. 무신(戊申)년 난리2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뒤로 집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옹(翁)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였다.

유독 옛사람들의 뛰어난 절개와 위대한 자취를 사모하여 강개(慷慨)히 분발하였으며, 그들의 전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7세 때에는 벽에다 큰 글씨로 ‘항탁(項託)이 스승이

되었다3’라고 썼으며, 12세 때에는 ‘감라(甘羅)가 승상이 되었다4’고 하고, 13세 때에는 ‘외황(外黃) 고을 아이가
유세를 하였다5’고 썼으며, 18세 때에는 더욱 쓰기를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祁連山)에 나갔다6’고 했으며,
24세 때에는 ‘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7’고 썼다. 40세가 되었으나 더욱더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기에

마침내 ‘맹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8’라고 크게 써 놓았다.

이렇게 해마다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벽이 다 온통 새까맣게 되었다. 70세가 되자 그의 아내가 조롱하기를,

“영감, 금년에는 까마귀를 그리시려우?” 하니,

옹이 기뻐하며 “당신은 빨리 먹을 가시오.” 하고 마침내 쓰기를,

“범증(范增)이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였다9.” 하니, 그 아내가 더욱 화를 내면서,

“계책이 아무리 기발한들 장차 언제 쓰시려우?” 하니, 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강태공(姜太公)은 80살에10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하였으니11 지금 나는 그에 비하면 젊고 어린

아우뻘이 아니오?” 하였다.

 

계유·갑술년간12, 내 나이 17,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彝器)13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나에게 민옹을

소개하면서, 그는 기이한 선비로서 노래를 잘하며 담론도 잘하는데 거침없고 기묘하여 듣는 사람마다

후련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함께 와 달라고 청하였다.

옹이 찾아왔을 때 내가 마침 사람들과 풍악을 벌이고 있었는데, 옹은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피리 부는

자를 보고 있더니 별안간 그의 따귀를 갈기며 크게 꾸짖기를,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 하였다.

내가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옹이 말하기를,

“그놈이 눈을 부라리고 기를 쓰니 성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므로,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옹이 말하기를,

“어찌 피리 부는 놈만 성낼 뿐이겠는가. 젓대 부는 놈은 얼굴을 돌리고 울 듯이 하고 있고, 장구 치는 놈은

시름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며, 온 좌중은 입을 다문 채 크게 두려워하는 듯이 앉아 있고, 하인들은 마음대로

웃고 떠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음악이 즐거울 리 없지.”

하기에, 나는 당장에 풍악을 걷어치우고 옹을 자리에 맞아들였다.

옹은 매우 작은 키에 하얀 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유신(有信)이며 나이는 73세라고
소개하고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배가 아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구먼.”

그리고는 드디어 문을 열고 들창을 걷어 올리니,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음속이 차츰차츰 후련해지면서, 예전과

아주 달라졌다. 그래서 옹에게 말하기를,

“저는 단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병입니다.” 했더니, 옹이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옹은 어찌하여 저에게 축하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옹이 말하기를,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재산이 남아돌 게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턱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 살면 오복(五福) 중에 수(壽)와 부(富)

두 가지는 이미 갖춘 셈이지.” 하였다.

잠시 후 밥상을 들여왔다.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음식을 들지 못한 채 이것저것 집어서 냄새만

맡고 있었더니, 옹이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내가 놀라 옹에게 왜 화를 내고 떠나려 하는지

물었더니, 옹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식사를 차려 내오지 않고 혼자만 먼저 먹으려 드니

예의가 아닐세.” 하였다.

내가 사과를 하고는 옹을 주저앉히고 빨리 식사를 차려 오게 하였더니 옹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

올린 다음 수저를 시원스레 놀려 먹어 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돌고 막혔던 가슴과 코가 트이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밤이 되자 옹은 눈을 내리감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하였으나, 옹은 더욱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아 나는 꽤나 무료하였다. 이렇게 한참이 나자자 옹이 갑자기 일어나서 촛불을 돋우면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적에는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 버렸는데 지금은 늘었소 그려. 그대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번 눈으로 읽어 보고 나서 외우기로 하세. 만약 한 자라도 틀리게 되면 약속대로 벌을 받기로 하세나.”

하기에, 나는 그가 늙었음을 업수이여겨, ‘그렇게 합시다.“ 하고서, 곧바로 서가 위에 놓인 『주례(周禮)』를

뽑아 들었다. 그래서 옹은 「고공기(考工記)」를 집어 들었고 나는 「춘관(春官)」을 집어 들었는데 조금

지나자 옹이, ’나는 벌써 다 외웠네.”하고 외쳤다.

그때 나는 한 번도 다 내리 읽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놀라서 옹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옹이 자꾸만

말을 걸고 방해를 하여 나는 더욱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옹에게 묻기를, “어젯밤에 외운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옹이 웃으며,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를 않았다네.” 하였다.

하루는 옹과 더불어 밤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옹이 좌중의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매도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막아 낼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옹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여 옹에게 물었다.

“옹은 귀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옹이 눈을 부릅뜨고 물끄러미 둘러보다가 손님 하나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외치며,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하였다.

그 손님이 노하여 따져 들자,

“밝은 데 있는 것은 사람이요, 껌껌한 데 있는 것은 귀신인데, 지금 그대는 어두운 데 앉아 밝은 데를 보고
제 몸을 감추고 사람들을 엿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하였다.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손님이 또 물었다.

“옹은 신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신선이 어디에 있던가요?”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옹은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을 보았소?”

“보았지. 내가 아침나절 숲 속에 갔더니 두꺼비와 토끼가 서로 나이가 많다고 다투고 있더군. 토끼가

두꺼비에게 하는 말이 ‘나는 팽조(彭祖)14와 동갑이다. 너는 나보다 늦게 태어났다’하니, 두꺼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더군. 토끼가 놀라 ‘너는 왜 그처럼 슬퍼하느냐?’ 하고 물으니, 두꺼비가 말했지. ‘나는 동쪽

이웃집의 어린애와 동갑인데 그 어린애가 다섯 살 먹어서 글을 배우게 되었지. 그 애는 목덕(木德)으로

태어나서 섭제격(攝提格)으로 왕조의 기년(紀年)을 시작한 이래15 여러 왕대를 거치다가, 주(周)나라의

왕통(王統)이 끊어짐으로써 순수한 역서(曆書) 한 권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진(秦)나라로 이어졌으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를 거친 다음 아침에는 송나라, 저녁에는 명나라를 거쳤지. 그러는 동안에 갖가지

일을 다 겪으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으며, 죽은 이를 조문하기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져 왔지. 그런데도 귀와 눈이 밝고 이와 머리털이 자라더니, 나이가 많기로는

그 어린애만한 자가 없겠지. 팽조는 기껏 800살 살고 요절하여 시대를 겪은 것도 많지 않고 일을 겪은 것도

오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나는 슬퍼한 것이다.’ 토끼가 이 말을 듣고는 거듭 절하고 뒤로 물러나 달아나면서

‘너는 내 할아버지뻘이다.’ 하였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될 걸세.”

“옹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보았소?”

“보았지. 달이 하현(下弦)이 되어 조수(潮水)가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그 땅을 갈아 염전을 만들어 염분이

많은 흙을 굽는데, 알갱이가 굵은 것은 수정염(水晶鹽)이 되고 가는 것은 소금이 된다네. 온갖 음식 맛을 내는

데에 소금 없이 되겠는가?”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불사(不死)약만은 옹도 못 보았을 것입니다.” 하니,

옹이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내 아침저녁으로 늘 먹는 것인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깊은 골짜기의 반송(盤松)에 맺힌 감로가

땅에 떨어져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靈)이 되지16. 인삼은 나삼(羅蔘)17이 최상품인데 모양이 단아하고 붉은

빛을 띠며, 사지를 다 갖추고 동자처럼 쌍상투를 틀고 있지. 구기자(枸杞子)는 천 년이 되면 사람을 보고 짖는다

하네. 내가 이것들을 먹은 다음 백일가량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지냈더니 숨이 차면서 곧 죽을 것만 같았네.

이웃 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 ’그대는 주림[기(饑)]병이 들었소. 옛날 신농(神農)씨가

온갖 풀을 맛본 다음에야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였소. 무릇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 되고 주림병을 고치는 것은

밥이 되니, 그대의 병은 오곡이 아니면 낫지 못하오‘ 하고는 밥을 지어 먹여 주는 바람에 죽지 않았지.

불사약으로는 밥만 한 것이 없네. 나는 아침에 밥 한 사발 저녁에 밥 한 사발로 지금껏 이미 70여 년을 살았다네.“ 하였다.

민옹은 말을 할 때면 장황하게 하면서도 이리저리 돌려대지만, 어느 것 하나 곡진히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속에는 풍자를 담고 있었으니, 그는 달변가라 할 만하다. 손님이 옹에게 물을 말이 다하여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분이 올라 하는 말이,

“옹도 역시 두려운 것을 보았습니까?” 하니, 옹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 눈은 용이 되고 왼 눈은 범이 되며18, 혀 밑에는 도끼가

들었고 팔은 활처럼 휘었으니, 깊이 잘 생각하면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겠으나19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되놈이 되고 만다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

버릴 것이지. 이 때문에 성인은 사심(私心)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간 것이며 사악함을 막아 진실된 자신을

보존한 것이니20,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네.” 하였다.

수십 가지 난제(難題)을 물어보아도 모두 메아리처럼 재빨리 대답해내는 까닭에 끝내 아무도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어올리고 칭찬하는 반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롱하고 업신여기곤 하였다.

사람들이 옹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어도 옹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황해도는 황충(蝗蟲)이 들끓어 관에서 백성을 독려하여 잡느라 야단들입디다." 하니, 옹이, "황충을 뭐

하려고 잡느냐?"하고 물었다.

"이 벌레는 크기가 첫잠 잔 누에보다도 작으며,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털이 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을

명(螟)이라 하고 볏줄기에 기어오른 것을 '모'(蟊)라 하는데, 우리의 벼농사에 피해를 주므로 이를 멸구21

부릅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파묻을 작정이지요." 하니 옹이 말하기를,

"이런 작은 벌레들은 근심거리도 못 된다네. 내가 보기에 종루(鐘樓)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황충이오. 길이는 모두 7척 남짓이고,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해치우는 것이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큰 바가지가 없어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네." 하였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정말로 이러한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하루는 옹이 오고 있기에, 나는 멀리서 바라보다가 은어(隱語)로, ‘춘첩자방제(春帖子狵啼)’라는 글귀를 써서

보였더니, 옹이 웃으며.

"춘첩자란 문(門)에 붙이는 글월(文)이니, 바로 내 성 민(閔)이요, 방(狵)은 늙은 개를 지칭하니, 바로 나를

욕하는 것이구먼. 그 개가 울면(啼) 듣기가 싫은데, 이 또한 나의 이가 다 빠져 말소리가 분명치 않은 것을

비꼰 것이로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가 늙은 개를 무서워한다면, 개 견(犬) 변을 떼어버리면 될 것이고,

또 우는 소리가 듣기 싫으면, 그 입 구(口)변을 막아버리면 그만이지22. 무릇 제(帝)란 조화를 부리고, 방(尨)은

큰 물건을 가리키니, 제(帝)자에 방(尨)자를 붙이면 조화를 일으켜 큰 것이 되니23, 바로 용(龍)이라네.

그렇다면 이는 그대가 나를 욕한 것이 아니라, 그만 나를 크게 칭송한 것이 되어 버렸구먼." 하였다.

 

다음 해에 옹이 죽었다. 옹이 비록 엉뚱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지만, 천성이 곧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 데다,

『주역(周易)』에 밝고 노자(老子)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책이란 책은 안 본 것이 없었다 한다. 두 아들이

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은 받지 못했다.

금년 가을에 나의 병이 도졌으나, 이제는 더 이상 민옹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와 함께 주고받은 은어와

우스갯소리, 담론과 풍자 등을 기록하여 <민옹전>을 지었으니, 때는 정축년(1757, 영조33) 가을이다.

나는 민옹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뇌문(誄文)24을 지었다.

 

아아!, 민옹이시여

괴상하고 기이하기도 하며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기뻐함직도 하고 성냄직도 하며

게다가 밉살스럽기도 하구려.

벽에 그린 까마귀

매가 되지 못하였듯이

옹은 뜻 있는 선비였으나

늙어 죽도록 포부를 펴지 못했구려

내가 그대 위해 전(傳)을 지었으니

아아! 죽어도 죽지 않았구려.

 

[스코틀랜드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作 서울 동쪽의 달빛(moonlight at east seoul), 1920]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현재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일대 [본문으로]
  2. 영조 3년인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본문으로]
  3. 진(秦)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감무(甘茂)의 손자인 감라(甘羅)는 여불위(呂不韋)의 가신(家臣)으로 있었다. 사기 ‘감무열전‘에 의하면 감라가 여불위를 설득하면서 ’항탁은 7세에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가 유세 다니던 중, 길에서 7세의 항탁을 만나 대화를 주고받은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본문으로]
  4. 감라가 12세 때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성(城) 5개를 말로 얻어오자 진시황이 기뻐하며 그를 상경(上卿)에 임명한 고사 [본문으로]
  5. 항우가 외황을 공격하다 늦게 항복한 것에 화가 나서 15세 이상 남자들을 생매장 하려고 했는데 마을의 13세 소년이 항우를 설득하여 외황 백성들을 살린 고사 [본문으로]
  6. 곽거병이 18세 때 외삼촌인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정하여 21세 때 기련산에서 공을 세운 일 [본문으로]
  7. 항우가 처음 거병(擧兵)하여 오강(烏江)을 건넌 것이 24세 때였다 [본문으로]
  8. 맹자 ‘공손추(公孫丑) 上’에 맹자가 “나는 40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9. 중국 초나라 항우(項羽)의 모사. 기묘한 계교에 능하여 항우로 하여금 제후의 패자가 되도록 도왔다 [본문으로]
  10. 강태공은 80살에 문왕(文王)을 만나 그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정복하였다 [본문으로]
  11. 시경 에 ‘태사(太師) 상보(常父)는 당시 매가 날아오르는 듯 하였네.’라는 구절이 있다 [본문으로]
  12. 1753 ~ 1754년 사이 [본문으로]
  13. 골동품 [본문으로]
  14. 800살까지 살았다는 도교의 전설적 인물. 중국 역사상 확인된 최고(最古)의 왕조는 은(殷, B.C. 16세기~B.C. 11세기)이지만, ‘신선전’에 따르면 팽조는 그보다 더 오랜 하(夏, B.C. 21세기~B.C. 16세기경?) 왕조의 황제의 증손자로서 은대 말에 이미 7백 살이 넘었지만 마치 소년처럼 젊게 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중국의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천황씨(天皇氏)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이전 중국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십팔사략’은 ‘천황씨(天皇氏)가 목덕으로 왕이 되고 해가 섭제(攝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첫머리를 시작한다 [본문으로]
  16. 복령(茯靈)은 버섯의 일종인 복령(茯笭)을 말하는데, 송진이 땅에 떨어져 천 년이 되면 변하여 복령이 되고, 복령이 변하여 호박(琥珀)이 된다고 한다 [본문으로]
  17.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나는 인삼, 또는 영남지방에서 나는 인삼을 뜻한다. 순조 때 박사호(朴思浩)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사행일기(使行日記)인 ‘심전고(心田稿)의 응구만록(應求漫錄)에 의하면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 집에서 재배하는 인삼은 가삼(家蔘)이라 했다 한다 [본문으로]
  18. 용정호목(龍睛虎目)은 위엄이 있거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9. 맹자에 ‘대인이란 그의 갓난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구절 [본문으로]
  20. 원문은 극기복례(克己復禮) 한사존성(閑邪存誠)이다. 극기복례는 논어에, 한사존성은 주역의 건괘(乾卦) 풀이에 나오는 공자의 말 [본문으로]
  21. 한자로는 ‘곡식을 멸한다’는 멸곡(滅穀)으로 썼다 [본문으로]
  22. 방(狵)자에서 큰 개를 뜻하는 개사슴록변(犭)을 떼어내어 尨자를 만들고 제(啼)자에서 입 구(口)면을 떼어 帝자를 만든다는 의미 [본문으로]
  23. 예전에는 용(龍)자를 帝와尨을 합친 자로도 썼다고 한다 [본문으로]
  24. 추도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