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廣文) 또는 달문(達文)이라 불리는 <광문자전(廣文者傳)>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다.
영조 초년에 태어나 정조 말년까지 생존했던 학자 이규상(李圭象, 1727~1799)은 『일몽고(一夢稿)』라는
인물지(人物誌)를 지었는데, 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유학자,
선비, 문인, 화가, 실학자 등 영조, 정조 시대의 문화부흥기를 이끈 주역들을 분야별로 나누어 망라하였다.
그 가운데 각 방면의 재인(才人)들을 묶어 소개한 <방기록(方伎錄)>에는 달문이라는 이름으로 광문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달문이란 사람은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서울 종루 거리의 걸인이다. 의협을 숭상했으며 얼굴이 크고
이마가 넓었고 입이 커서 주먹이 들락거렸다. 그는 늘그막에도 상투를 틀지 않고 총각머리를 하였으며,
온통 기운 옷을 입고 성한 옷이 없었다. 매일 밤에 각전(各廛)1의 상직(上直)2을 보았는데, 각전
주인들이 다투어 달문을 찾아서 상직을 시키면 마음을 놓았다. 서울의 여각(旅閣)3 주인들 또한
달문을 다투어 불러다가 각 고을 사람들이 보관한 귀중한 물화들을 맡아서 지키게 하였다.
달문은 서울 저자에 앉아 있었으나, 팔도에 통하는 큰 장사치로 막중한 상권을 잡은 자라도 그의 말을 받들어
그 말대로 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 대개 전적으로 신의를 가지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비록 큰 장사치와
통하였지만, 물화 하나라도 가까이 하지 않고 자기 몸은 매양 걸인 무리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이가 더욱 늙어서는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영남으로 내려가 여관에 고용되어 있다고도 한다.
그는 용모가 질박하고 말수가 적어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대의 기인이었던 광문에 대한 일화는 세간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회자되었을 것이고, 박지원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다. 지은 시기에 대해서는 이르게는 18세 때로 보기도 하고
20대 초반으로 보기도 한다.
<자서(自序)>
광문(廣文)은 궁한 거지로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4.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더구나 이름을 도적질하여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이에 광문전(廣文傳)을 짓는다.
광문(廣文)이란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5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추대하여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빌러 나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도 불쌍하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다 함께 광문을 두들겨 쫓아내니, 광문이
밤에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다가 그 집의 개를 놀라게 하였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다 꽁꽁 묶으니, 광문이 외치며 하는 말이,
“나는 원수를 피해 온 것이지 감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저자에 나가 알아보십시오.” 하는데, 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집주인이 내심 광문이 도적이 아닌
줄을 알고서 새벽녘에 풀어 주었다.
광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가지고 떠났다.
집주인이 끝내 몹시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수표교(水標橋)6에 와서 그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가만히 짊어지고 가,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다 묻고서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하는 것이었다.이에 집주인이 광문을 붙들고 사유를 물으니, 광문이 그제야 그전에 한 일과 어제 그렇게 된 상황을 낱낱이
고하였다. 집주인이 내심 광문을 의롭게 여겨, 데리고 집에 돌아와 의복을 주며 후히 대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문을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천거하여 고용인을 삼게 하였다.
오랜 후 어느 날 그 부자가 문을 나서다 말고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자물쇠가
걸렸나 안 걸렸나를 살펴본 다음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몹시 미심쩍은 눈치였다. 얼마 후 돌아와 깜짝
놀라며, 광문을 물끄러미 살펴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다가,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만두었다. 광문은 실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날마도 아무 말도 못하고 지냈으며,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부자에게 돌려주며,
“얼마 전 제가 아저씨께 돈을 빌리러 왔다가,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에 들어가 가져갔는데,
아마도 아저씨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광문에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에게,
“나는 소인이다. 장자(長者)7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앞으로 너를 볼 낯이 없다.”하고 사죄하였다.
그리고는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부자와 큰 장사치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을
하고, 또 여러 종실(宗室)8의 빈객들과 공경(公卿) 문하(門下)의 측근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칭찬을 해대니,
공경 문하의 측근들과 종실의 빈객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자기네가 섬기는 분들이 잠을 청할 적에
들려주었다. 그래서 두어달이 지나는 사이에 사대부들까지도 모두 광문이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 서울 안에서는 모두, 전날 광문을 후하게 대우한 집주인이 현명하며 사람을
알아본 것을 칭송함과 아울러, 약국의 부자를 장자(長者)라고 더욱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과 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 전장(田莊)9, 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분의 삼이나 십분의 오를 쳐다 돈을 내주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 냥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
광문은 사람됨이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는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만석희(曼碩戲)10를 잘하고 철괴무(鐵拐舞)11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兄)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댔는데, 달문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도 역시 옷을 홀랑 벗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땅에 금을 그어 마치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는 것을 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다 웃어 대고 싸우던 자도 웃음이 터져, 어느새 싸움을 풀고 가 버렸다.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머리를 땋고 다녔다.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남들이 집을 가지라고 권하면,
“나는 부모도 형제도 처자도 없는데 집을 가져 무엇 하랴. 더구나 나는 아침이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저자에 들어갔다가, 저물면 부귀한 집 문간에서 자는 게 보통인데, 서울 안에 집 호수가 자그마치 팔만 호다.
내가 날마다 자리를 바꾼다 해도 내 평생에는 다 못 자게 된다.”고 사양하였다.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12가 전(展)의 별감(別監)13,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가야금을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선뜻 추지를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座)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눈가는
짓무르고 눈곱이 끼었으며 취한 척 게욱질을 해대고, 곱슬머리로 북상투[北髻]14를 튼 채였다.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좇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박지원이 처음에 썼던 <광문자전>은 여기서 끝이다. 그리고 후에 박지원은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라는
글을 다시 써 덧붙였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몹시 병을 앓아서, 늘 밤이면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여염(閭閻)15에서 일어난 얘깃거리 될 만한 일들을 묻곤 하였는데, 대개는 광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 나는 한창 문장을 배우기에 힘쓰던 판이라,
이 전(傳)을 만들어 여러 어른들에게 돌려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옛날의 문장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크게
받게 되었다.
광문은 이때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고,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다.
바닷가에서 온 거지 아이 하나가 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16에서 빌어먹고 있었다. 밤이 되어 그 절의
중들이 광문의 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며 흠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 거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거지 아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마침내 광문의 아들이라 자청하니, 그 절의 중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까지 그에게 밥을
줄 때는 박짝에다 주었는데, 광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씻은 사발에 밥을 담고 수저에다 푸성귀랑
염장을 갖추어서 매번 소반에 차려 주었다.
이 무렵에 영남에는 몰래 역모를 꾀하는 요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아이가 이와 같이 융숭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대중을 현혹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여 가만히 거지 아이를 달래기를, “네가 나를 숙부라 부르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뒤, 마침내 자신은 광문의 아우라 칭하고 이름까지도 광손(廣孫)이라 하여
광문에게 갖다 붙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광문은 본래 제 성도 모르고 평생을 형제도 처첩도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지금 어떻게 저런 나이 많은
아우와 장성한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고변(告變)을 하였다. 관청에서 이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광문과 대질심문을 벌였는데, 제각기 얼굴을 몰랐다. 이에 그 요사한 자를 베어 죽이고 거지 아이는
귀양 보냈다.
1755년 나주에 귀양 가 있던 소론(少論)의 윤지(尹志)가 민심을 동요시켜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다. 이를 나주(羅州) 벽서(壁書) 사건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나주목사(羅州牧使) 이하징(李夏徵)도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하징의 서얼인 이태정(李太丁)이란 인물이
영조 40년(1764년)에 광문의 동생 달손(達孫)을 자처하면서, 광문의 아들이라는 자근만(者斤萬)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체포되었다. 그래서 1764년 4월 17일에 자근만, 홍유, 이상묵, 이달손, 강취성, 도행,
문담 등이 영조의 국문을 받았는데. 광문도 덩달아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이태정과 형제가 아니고
자근만과도 부자 관계가 아님이 밝혀져 역모 혐의는 벗었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도 머리를 땋고
총각의 모습으로 꾸며서 인심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광문은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된 것으로 전해진다. 위 박지원의 글은 그런 사정을 대략 에둘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글에 박지원은
광문이 석방되었다고 했는데, 귀양을 안 갔다는 말인지 아니면 조사를 받고 풀려나 귀양가기 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광문이 석방되자, 늙은이며 어린애들까지 모두 가서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비게 되었다. 광문이 표철주(表鐵柱)17를 가리키며,
“너는 사람 잘 치던 표망동이(表望同)가 아니냐. 지금은 늙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했는데,
망동이는 그의 별명이었다. 서로 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광문이 물었다.
“영성군(靈城君)과 풍원군(豊原軍)은 무고들 하신가18?”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다네.”
“김군경(金君擎)은 시방 무슨 벼슬을 하고 있나?”
“용호장(龍虎將)19이 되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말했다.
“이 녀석은 미남자로서 몸이 그렇게 뚱뚱했어도 기생을 껴안고 담을 잘도 뛰어넘었으며 돈 쓰기를 더러운
흙 버리듯 했는데, 지금은 귀인(貴人)이 되었으니 만나 볼 수가 없겠군. 분단(粉丹)이는 어디로 갔지?”
“벌써 죽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탄식하며 말했다.“옛날에 풍원군이 함께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불이 켜진 초를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20를
태워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21 5천문22을 주었지. 나는 그때 분단이의 수파(首帕)와 부군(副裙)23을 들고 난간
밑에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도깨비처럼 서 있었네. 풍원군이 방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다가 문단이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저 시커먼 것이 무엇이냐?’ 하니, 분단이가 대답하기를 ‘천하사람 중에 누가 광문을 모르리까?” 했지.
풍원군이 웃으며 ’바로 네 후배(後陪)24냐?‘ 하고는, 나를 불러들여 큰 술잔에 술을 한 잔 부어주고, 자신도
홍로주(紅露酒)25 일곱 잔을 따라 마시고 초헌(軺軒)26을 타고 나갔지. 이 모두 다 예전 일이 되어버렸네 그려."
요즈음 한양의 어린 기생으로는 누가 가장 유명한가?“
“작은아기(小阿基)라네.”
“조방(助房)27은 누군가?”
“최박만이지.”
“아침나절 상고당(尙古堂)28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29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나무를 심어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철돌(鐵突)30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
“철돌은 지금 그 형제가 다 유명하다네.”
“그런가? 이는 김정칠(金鼎七)의 아들일세. 나는 제 애비와 좋은 사이였거든.”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글퍼하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다 나 떠난 후의 일들이군.” 하였다.
광문은 머리털을 짧게 자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쥐꼬리처럼 땋아 내리고 있었으며, 이가 빠지고 입이
틀어져 이제는 주먹이 들락거리지 못한다고 했다.
광문이 표철주더러 말하였다.
“너도 이제는 늙었구나. 어떻게 해서 밥을 먹고사나?”
“집이 가난하여 집주릅이 되었다네.”
“너도 이제는 궁함을 면했구나. 아아! 옛날 네 집 재산이 누거만(累巨萬)31이었지. 그때에는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그 투구 어따 두었노?”
“나는 이제야 세상 물정을 알았다네.”
광문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네 꼴이 마치 ‘재주를 다 배우고 나니 눈이 어둡다’는 격이로구나32.” 하였다.
그 뒤로 광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참고 및 인용 : 18세기 조선인물지 병세재언록(성균관대학교 민족문학사연구소 ,1997, 창작과비평사),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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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의 호이다. 그는 골동품과 서화의 감식가이자 소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18세기 문인 사회에서 골동, 서화 수집의 가치를 깨닫고 취미로 정착하는 데 공헌하였다 [본문으로]
- 서대문 밖 아현동 부근에 있었던 고개 [본문으로]
- 당대의 거문고 명수로 알려진 김철석(金哲石)이다.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가기(歌妓) 추월(秋月), 매월(梅月), 계섬(桂蟾) 등과 한 패를 이름을 날렸다. [본문으로]
- 여러 거만(巨萬)이라는 뜻으로, 썩 많은 액수(額數)를 나타내는 말 [본문으로]
- ‘복이 박하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열상방언(洌上方言)에는 ‘기술 익히자 눈에 백태 낀다(技纔成 眼有眚)’는 유사한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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