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은 <호질(虎叱)>이다. 이 한문소설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관내정사(關內程史)」편 7월 28일자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호질>을 실으면서 이 글의 출처에 대하여, 북경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 묵었던 옥전현(玉田縣)의 심유붕(沈由朋)이라는 사람 점포 벽에 걸려 있는 격자(格子)에서
이 기문(奇文)을 발견했다고 그 경위를 밝혔다. 그래서 주인의 허락을 얻어 동행한 정진사와 함께 이 글을
베꼈다고 했다. 또한 <호질>의 본문을 게재한 말미에 <호질>에 대한 논평을 적으면서, 이 글은 근세 중국인이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으로서 청조(淸祖)의 위선적인 정책과 그러한 청조에 곡학아세하며 일신의 안주를 추구한
한족(漢族) 출신 유학자들에 대한 풍자 비판이라는 해석을 달았다.
이로 인하여 <호질>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인의 작품으로 보느냐 아니면 박지원의 창작품으로 보느냐
하는 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인 원작설(原作說)’은 박지원이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의견이다. 반면 ‘박지원 창작설(創作說)’은
박지원의 기술이 중국인이 지은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허구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만일 이 소설을 박지원이 직접 쓴 것으로 밝힐 경우, 소설 속의 풍자 대상은 당연히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곡학아세와 부정한 행위, 더 나아가서는 조선후기 사회 모순에 대한 풍자 비판이 되기 때문에, 그에 따라올
후폭풍을 염려한 조치라는 것이다.
박지원의 창작설을 주장을 하는 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박지원은 정진사와 나누어 글을 베꼈는데, ‘숙소로 돌아와서 등불을 켜고 훑어본즉 정진사가 베낀 몫은 오자와
낙서(落書)가 허다하고 글귀는 문리가 통하지 않는 데가 많았으므로 내 뜻을 약간 붙여 엮어 한 편의 글이
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박지원이 가필하여 소설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이다. 글에 인용된
출전이 대부분 중국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아울러 조선의 전래 고담(古談)의 흔적들이 들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 다른 근거로는 소설의 작품에 나타난 수법과 문투(文套)가 박지원 특유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울러 작품에 나타난 사상이 박지원의 다른 작품에서 지향(指向)하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고는 있지만, 지금 대부분의 경우는 <호질>을 박지원의 창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소설은 북곽선생(北郭先生)으로 대표되는 유자(儒者)들의 위선과 동리자(東里子)로 대표되는 정절
여인의 가식적 행위를 풍자한 것이다. 그렇지만 ‘범의 질책’이라는 호질(虎叱)의 대상은 유자(儒者)인
북곽선생에 맞춰져 있다.
<호질>은 「방경각외전」에 실린 소설들과는 달리 그 형식에 있어 전기체를 완전히 벗어났다. 당대에는
순정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동음어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민담과 전설을 삽입하면서 생략과 압축으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범이란 영특하고 갸륵하고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고 자애롭고 효성 있고 어질고도 슬기롭고 용맹이
놀랍고 장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건마는 비위(狒胃)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란 짐승도 범을
잡아먹고 박(駁)이라는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오색사자(五色獅子)가 큰 나무둥치 구멍에 있다가는 범을
잡아먹고, 자백(茲白)이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표견(豹犬)이란 짐승이 남아서 범을 잡아먹고,
황요(黃要)라는 짐승은 범이나 표범의 염통을 끄집어내 먹고, 뼈가 없는 활(猾)이라는 짐승은 범이나 표범이
삼키면 뱃속에서 그 간을 먹고, 추이(酋耳)란 짐승은 범을 만나면 짓찧어서 씹어 먹고, 범이 맹용(猛㺎)이란
짐승을 만나면 눈을 감아 감히 쳐다보지를 못한다1. 그러나 사람들이 맹용은 무서워하지 않고 범을
무서워하고 보니 범의 위엄이란 대단하지 않은가. 범은 개를 잡아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잡아먹으면 귀신이
붙는 법이다.
범이 첫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굴각(屈閣)이라는 창귀(倀鬼)2가 되어 범의 겨드랑이
밑에 붙어서 범을 끌어다가 남의 집 부엌으로 들어가 범이 그 집 솥전3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은 그만 배가
고파지면서 그 아내에게 밥을 시키게 된다고 한다. 범이 두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이올(彝兀)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광대뼈 위에 붙어서 높은 데 올라가 망을 보다가 덫이나 함정이 있을 때는
앞질러 가서 덫들을 풀어 놓아버린다고 한다. 범이 세 번재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육혼(鬻渾)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있으면서 자기가 아는 친구들의 이름을 죄다 주워섬겨
바친다고 한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더러 호령조로 말했다.
“인제는 해가 저물어 가는데 어데 가서 끼니를 치를꼬?”
굴각이 있다가
“저는 벌써 저녁 끼니를 점찍어 두었습니다. 뿔난 놈도 아니요, 깃 달린 놈도 아니고, 대가리는 새까만 놈으로
눈 가운데 걸어간 발자국으로 보아서는 조작조삭 걸음이 엉성하고 꼬리는 뒤통수에 올라붙어 항문도 못 가리는
놈입니다.” 하고. 이올이는 있다가,
“동문(東門)께에도 먹을 차반4이 있는데 이름이 의원이라고 하며 입으로는 가지각색 풀을 뜯어먹어 살에서
향내가 풍긴답니다. 서문께에도 먹을 차반이 있는데 이름을 무당이라고 합니다. 온갖 잡귀신에게 아양을 떨기
때문에 매일같이 목욕재계를 한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고기 차반이나 골라 잡수시지요.” 하니,
범은 수염을 떨치고 얼굴빛이 금방 달라지면서,
“의원이란 건 의심이렷다. 알지도 못하고 의심을 가진 채 병 고치기를 시험하다가는 멀쩡한 사람을 해마다
몇 만 명씩 잡지. 무당이란 건 무함(誣陷)5이렷다. 귀신을 속이고 사람을 흐려 말년에도 몇 만 명씩 예사로
사람을 죽이거든! 이러고야 뭇사람의 노기가 그놈의 뼈다귀에 스며들어 금잠(金蠶)6으로 화했을 터이니
독해서 그놈을 어떻게 먹겠느냐!” 하니, 이번에는 육혼이 있다가 말하였다.
“여기야말로 맛좋은 고기가 숲속7에 있습니다. 간은 어질고 쓸개는 의롭고, 충성을 안고 결백을 품고,
풍류를 머리에 이고, 예절을 행하고, 입으로는 온갖 글을 다 외우고, 세상에는 모르는 이치가 없다고 하여
이름인즉, ‘덕이 대단한 선비’라고 한답니다. 등판은 두드러지고 몸집은 뚱뚱하여 별의별 맛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범은 눈썹을 실룩거리고 침을 개개 흘리면서 고개를 젖히고는 껄껄 웃으면서,
“허! 그래서?” 하니, 창귀들은 저마다 꼬아 바치기를,
“음(陰) 하나와 양(陽) 하나8를 일러서 ‘도(道)라고 하는데 이 오묘한 이치를 선비가 다 뚫어 맞췄답니다.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육기(六氣)9가 서로 퍼지는 것은 다 선비가 이끌어 내는 조화입니다. 세상에 맛좋은
고기로서야 이 위에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범이 이 말을 듣고서는 그만 실쭉해지면서 내색이 달라지고 몸을 다시 도사리면서 달갑잖아 하였다.
“음양이란 건 원래가 한 가지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데 둘로 쪼개 놓았다니, 그놈의 고기가 벌서 잡되구나.
오행이란 건 원래 제자리를 잡고 있어 서로 낳고 말고가 없을 터인데 요즘에는 공연히 어미니 새끼를 만들어
놓고, 짜다니 시다니 갈라놓았다니 이러고야 그 맛이 성할 수 없으렷다. 육기란 것은 원래 절로 돌아가는
것이지, 일부러 당기고 말고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 함부로들, 이런 데 손을 대느니 돕나니 떠들며
제 생광(生光)10을 쓰려고 드니 이런 놈의 고기를 먹다나면 질기고 여물어서 삭여 낼 것 같지 않구나!”
정(鄭)나라 어떤 고을에 벼슬에 뜻이 없는 한 선비가 있어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고 불렸다. 나이 마흔에
제 손으로 교열한 책이 만 권이나 되고 사서오경의 뜻을 풀어서 다시 지은 책이 1만5천권이나 되었다. 이래서
천자는 북곽선생이 이룩한 것이 놀랍다고 칭찬을 하고 제후들까지도 북곽선생이라면 한번 찾아보기가 원이었다.
그 고을 동쪽 마을에는 일찍이 혼자된 인물로 잘난 과부가 살았는데 동리자(東里子)라고 했다. 역시 천자는
동리자의 절개가 놀라운 것을 칭찬하고 제후들까지도 그녀가 현숙하다고 떠받들어 그 고을의 몇 리 둘레를
잡아떼어 아주 동리 과부의 마을로 정해 주었다. 동리자가 수절은 잘한다하지마는 아들 오형제가 모두
각성(各姓)바지11였다.
하루는 다섯 아들이 모여,
“뒷마을에는 닭이 홰를 치고 아랫마을에는 계명성(啓明星)12이 반짝이는 이 깊은 밤에 안방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소리가 어쩌면 꼭 북곽선생의 목청만 같구나.” 하고는 오형제가 번갈아 문창 틈으로 들여다보노라니
동리자가 북곽선생에게 청하여,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그리워해 오던 차에 호젓한 이 밤 선생님의 글 읽는 목청을 한번 들었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북곽선생은 옷깃을 바로 여미면서 단정히 차리고 앉더니 시를 읊었다.
“병풍 위에 원앙 한 쌍, 반딧불은 반짝반짝, 오롱조롱 살림 그릇, 누구누구 본떴다지. 흥야(興也)13라,”
다섯 아들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북곽선생은 어진 분이라 예절로 보아 설마 과부의 문간에 발길을 들여놓을 리가 만무하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정나라 성문이 무너진 데 여우굴이 있다더라.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사람 두겁을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필시 여우가 북곽선생의 탈을 쓰고 나온 것이 틀림없구나!” 하면서, 서로 쑥덕공론하기를, “내 들은
말로는 여우 갓을 얻으면 만부자가 되고, 여우 신을 얻으면 대낮에도 제 몸이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인다 하고,
여우 꼬리를 얻으면 남을 잘 호려 반하도록 만든다는데, 어째서 이놈의 여우를 잡아 죽여 우리끼리 나눠
가지지 않을 것인가?” 하고는, 이내 다섯 아들은 안방을 둘러싸고 들이쳤다.
북곽선생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질을 치는 판인데, 행여나 제 얼굴이 탄로 날까 겁이 나서, 한 다리를
목에다 걸고는 귀신 춤에 귀신 웃음을 웃으면서 문 밖으로 튀어나와 달아나다가 그만 들판에 파 놓은
똥구덩이에 빠졌다. 똥이 가득 찬 구덩이 속에서 간신히 버둥거리면서 기어올라 대가리를 내밀고 바라본즉
범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범은 얼굴을 찡그리고 구역질이 나 코를 쥐고 고개를 외로 돌리면서 “푸우!” 하고는,
“이놈의 선비. 에이, 구린 냄새야!” 했다.
북곽선생이 머리를 조아리고 엉금엉금 기어 범 앞으로 나와 절을 세 번 하고는 꿇어앉아 고개를 젖히고 하는 말이,
“범님의 덕이야말로 정말 지극하오이다. 세상에 큰 인물들은 당신이 변화하는 재주를 볻받고, 제왕들은
당신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사람의 자식 된 자들은 당신의 효성을 법도로 삼고, 장수들은 당신의 위엄을
취하옵니다. 당신의 이름은 신령스러운 용(龍)님과 짝이 되시어 한 분은 바람을 맡고 한 분은 비를 맡으신지라
인간 세상의 천한 이 몸은 감히 당신의 아랫자리에서 삼가 모실까 하옵니다.“ 하니, 범이 꾸짖었다.
“행여 가까이 오지 마라. 내 일찍이 들으매 선비 유(儒)자는 아첨할 유(諛)자와 통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어느 날에는 천하에 못된 이름은 다 끌어 모아다가 함부로 내게 가져다 붙이더니 오늘은 다급하다 보니
얼굴 간지러운 아첨을 하는구나. 그래 누가 네 말을 믿겠느냐? 무릇 천하에 이치는 하나이어든, 범의 성품이
나쁘다면 사람의 성품도 역시 나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 것이다.
네가 주절거려대는 천만 마디 말이 오상(五常)을 떠나지 않고, 남을 훈계하거나 권고할 때는 으레 삼강(三綱)을
둘러메고 나오지마는 사람 많이 사는 데서 바닥 거리에 돌아다니는 코 떨어진 놈, 발뒤꿈치 없는 놈, 상판에
먹침을 맞은 놈들14은 죄다 무지막지한 망나니 놈들로서 날마다 먹을 아무리 갈아 대고 연장을 아무리 벼려
내도 그놈의 나쁜 버릇을 막아낼 재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범의 집안에는 이런 형벌이란 것이 본디부터 없다.
이로써 보건대 범의 성품이 역시 사람의 성품보다는 어질지 않은가!
범이야 푸성귀나 과일 따위에 입을 대지 않고, 벌레나 생선 같은 것을 먹지 않고, 잡스러운 누룩, 국물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새끼 가진 짐승이나 알 품은 짐승이나 하찮은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산에 들면 노루, 사슴이나
사냥하고 들에 내리면 마소나 잡아, 아직까지 배를 채우는 끼닛거리 때문에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송사질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범의 도덕이 얼마나 광명정대한가!
범이 노루, 사슴을 잡아먹을 때 너희 놈들이 범을 밉다, 곱다 끽소리 없다가도 범이 한번 마소를 잡아먹을 때는
너희 놈들이 범을 원수로만 여기니, 이것은 노루, 사슴이 사람에게 덕 되는 데가 없고 마소는 너희들이 부려
덕을 본다고 해서 그러는 것이지. 그렇지마는 너희 놈들은 마소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 태워 주고 부리던
고생도, 심부름하고 주인을 따르던 정성도 알아줄 까닭 없이 날마다 푸줏간이 비좁도록 몰아넣어 뿔다귀 한 개,
갈기 한 오리도 남기지 않을뿐더러 이것도 부족하여 내 양식인 노루, 사슴에까지 손을 뻗쳐 우리들이 산에서는
배를 못 불리고 들에서는 끼니까지 건너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쯤 되고 보면 어디 하늘더러 이 사정을 한번
처리해 달라고 해 보자. 네놈들을 우리가 잡아먹어야 할 것이냐, 그만두어야 할 것이냐.
무릇 제 것 아닌 물건을 가져가는 놈을 불러서 도적놈이라 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고 물건을 해치는 놈을
가져다가 화적(火賊) 놈이라고 하느니라. 네놈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팔뚝을 뽐내고 눈을 부릅뜨고
잡아채고 훔치고 하건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까지 하고15,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제 계집조차 죽이는 놈이 있는 데야16 삼강오륜을 더 이야기할 나위가 어데 있겠느냐. 어디
그뿐이냐. 메뚜기에게서 밥을 가로채고,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고, 벌떼를 쫓고는 꿀을 도적질하고, 더 악착한
놈은 개미 새끼로 젓을 담아 제 할애비 제사를 지내는 놈까지 있으니, 잔인하고도 악착한 버릇이 네놈들을
덮을 놈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
네가 세상 이치를 펴 늘어놓을 때는 걸핏하면 하늘을 둘러메고 나서지마는 참말 하늘이 마련한 대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 물건이어든, 천미만물이 살아나가는 어진 도리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다 사람과 함께 같이 살아야 마땅하지, 서로 등지고 지낼 터수가 아니렷다. 또 이것을 선악을
두고 따져 본다면 드러내놓고 벌과 개미집을 털어가는 놈이 천하에 큰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이며,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훔쳐가는 놈이 의리로 보아 큰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범이 여태껏 한 번도 표범을 잡아먹지 않은 것은 제 동류에게는 차마 손을 못 대는 탓이요, 범이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는 수효는 사람이 잡아먹는 수효처럼 그렇게 많지 못하고, 범이 마소를 잡아먹는 수효도 사람처럼은 많지
못하니라.
그런데 지난해 관중(關中)에 큰 가뭄이 들었을 적에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수만 명이요, 몇 해
전에 산동서 큰물이 졌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역시 수만 명이나 되지 않았더냐.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람 잡아먹은 수효가 많기로는 어디 춘추(春秋) 때만큼 많았던 적이 또 언제 있었겠는가?
춘추 적 세상에는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 갚는다고 일으킨 난리가 서른 번에,
피가 천리 어간에 흐르고 거꾸러진 시체가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집안에서는 홍수나 가뭄을 모르고
보니 하늘을 원망할 리 없고 덕이고 원수고 다 잊어버리는 지라 세상에 미운 것이 없고, 하늘의 마련대로
따라 살다나니 무당이나 의원의 농간에 넘어갈 턱이 없고, 타고난 성품에 따라 저 생긴 대로 살다나니
더러운 세상살이 잇속에 병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범이 영특하고 갸륵하다는 말의 내력인 것이다.
한 가지 얼룩을 보아 열 가지 문채를 세상에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치의 병장기를 손에 대지 않고도
다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만 가지고서 위풍을 천하에 뽐내고 범의 형상을 그린 제기(祭器)들로써 효성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가르친다. 하루에도 한 끼는 까마귀, 솔개미, 개미 떼가 대궁을 갈라 먹으니 우리들의
어진 행실이야 이루 다 칠 수 없을 것이고, 애매하게 남에게 먹힌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병자나 폐인을
잡아먹지 않고 상주를 잡아먹지 않으니 의로운 행실까지도 이루 다 들 수 있겠느냐?
정 모질구나, 네놈들이 잡아먹는 버릇이야말로. 덫과 함정이 부족하다 하여 새 그물, 노루 그물, 후리 그물,
반두 그물, 자 그물들을 만들었으니 대관절 맨 처음에 그물을 뜨기 시작한 놈이 화근을 세상에 퍼뜨린 놈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뾰족 창, 접적 창, 긴 창, 삼지창, 도끼, 환도, 비수, 쇠꼬치가 있지 않나, 또, 한 방만 터트리면
소리는 산악을 무너뜨리고 불길을 번쩍번쩍 토하면서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폭약까지 있다. 이것도 제
마음대로 포악을 부리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여 이번에는 부드러운 털을 아교풀로 붙여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대추씨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먹물에 덤벅 찍어서는 이것으로 가로 찌르고 모로 찌르면 굽은 놈은
갈구리창 같고, 날이 선 놈은 칼 같고, 뾰족한 놈은 검 같고, 갈라진 놈은 가장귀창 같고, 곧은 놈은 화살 같고,
둥그레한 놈은 활같이 생겨 이놈의 병기들이 한번 움직이는 곳에서 뭇 귀신들이 밤 울음을 울게 되는 판이다.
참혹하게 서로들 잡아먹는 데야 누가 너희 놈들보다 더 심할 것이냐?"
북곽선생은 자리를 옮겨서 머뭇머뭇 땅에 코를 박고 두 번씩 머리를 조아렸다.
“옛글에도 있지만 아무리 악한 놈이라도 목욕재계를 하고 나면 하느님이라도 모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 천한 이 몸이지마는 감히 당신의 아랫자리에서 삼가 모셔 받들까 하옵니다.”
북곽선생은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마는 아무런 분부가 없었다. 황송해서 조심조심
손길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날은 훤히 샜는데 범은 벌써 가고 말았다.
새벽에 밭일 나온 농부가,
“선생님! 이 꼭두새벽에 벌판에 대고 절은 웬 절이십니까?” 하니, 북곽선생은
“내 들으매 하늘이 높다 해도 머리를 마음대로 못 들고, 땅이 두텁다 해도 발을 마음대로 못 디딘다고 했다.” 하였다.
같은 박지원의 소설인데 방경각외전에 들어있던 앞의 소설들과 문체가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글 번역자가
다른 탓이다. 여기에 인용한 <호질>은 리상호라는 북한의 학자가 1955년 한글로 옮긴 글이다. 시대적 차이도 느껴진다.
참고 및 인용 :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2010, 이수웅),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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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오자 노나라 목공은 오기(吳起)를 대장군으로 기용하여 제나라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대부 전거(田居)의 딸이라 혹시라도 오기가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할까 의심하여 목공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오기는 자기 손으로 아내를 죽여 노나라에 대한 충정을 표시하고 장군에 오른 고사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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