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17 - 김신선전

從心所欲 2019. 11. 27. 13:36




[김홍도 <운상신선도(雲上神仙圖)1> 지본담채, 28.3 x 41.5cm, 간송미술관]


<김신선전(金神仙傳)>은 박지원이 20대 전후에 썼던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다른 소설들보다는

좀 더 후기의 작품이다. 글 속의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박지원이 28세 때인 1764년(영조 40) 이후에 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전히 전(傳)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세월이 흐른 탓인지 문체는 조금 더

수필체에 가까워졌다. 글에는 옛 한양의 지명과 호칭이 많이 나와 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자서(自序)>

홍기(弘基)는 대은(大隱)이라

노니는 데 숨었다오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2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김 신선(神仙)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3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4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1744년 ~ 1760년 사이에 제작된 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5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니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희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입니다.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6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봉사(奉事)7라 합니다.

누각동8 김첨지(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만호(萬戶)9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 사는 이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10 사는 서초관(哨官)11과 모교(毛橋)12사는 장첨사(僉使)13와 사복천14 가에

사는 지 승(丞)15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16 조봉사(奉事)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심겨져 있고, 계동 유판관(判官)17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손님 둘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丈人)18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처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시옵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19이나 회현방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 배오개, 구리개, 자수교(慈壽橋), 사동(社洞), 장동(壯洞), 대릉(大陵), 소릉(小陵) 등지20

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倉橋)21

사는 임 동지(同知)22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십니까?’ 하였더니, ‘한 잠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 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23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밈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소’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24.”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깜깜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福)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25이었다.


그 이듬해26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 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띄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참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27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와 노송은

더욱 푸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道僧)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庵)28에 벽곡(辟穀)29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절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김윤겸(1711 ~ 1775) <장안사도(長安寺圖)>, 1768, 지본수묵담채, 21.0 × 25.3㎝, 국립중앙박물관]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30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31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32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김홍도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中 <진주담>, 견본담채, 30.4㎝ x 43.7㎝, 개인소장]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船庵)은 수미봉

(須彌峰)33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탑(榻)34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35.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다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仙)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산에 들어가는 사람(入山)을

신선(屳)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僊)36이란 너울너울(僊僊) 춤을 추듯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37.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박지원이 언제나 김홍기를 만날까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글의 결말이 너무 허무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을 두고 ‘신선이란 허구를 타파하려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평이 있는데, 견강부회

(牽强附會)란 느낌이 든다. 박지원은 글머리에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밝혔다. 유학(儒學)을 했지만 도학(道學)을 배척하지 않은 개방적 사고에서 비롯된

호기심을,못내 놓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그 실체를 알고 싶어 했던 박지원의 뚝심이 대단할 뿐이다. 하지만

글말미를 보면 박지원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참고 및 인용 : 서울지명사전(20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2001.세종대왕기념사업회),

관직명사전(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화제로 쓴 ‘이룡면법(李龍眠法)’은 호(號)가 용면거사(龍眠居士)였던 중국 북송 때의 문인화가 이공린의 화법을 따랐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시경(詩經)-국풍(國風)-패풍(邶風)-웅치(雄雉) 4장(四章)에 나오는 ‘부기불구(不忮不求)’라는 구절 [본문으로]
  3. 불에 익힌 음식, 또는 그 음식을 먹는 것 [본문으로]
  4. 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후광문전서(後廣文傳書)에 ‘예전부터 집안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얘깃거리를 들었다고 썼는데, 윤생(尹生)과 신생(申生)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 박지원의 집에서 잡일을 맡아보던 겸인(傔人)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 한양에 있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지금의 동화면세점 부근 [본문으로]
  6. 체부동(體府洞) :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동네로 조선시대 이곳에 비상시 군대를 지휘하거나 기타 군사업무를 맡았던 체부청(體府廳)이라는 관청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본문으로]
  7. 조선 시대에, 관상감ㆍ돈령부ㆍ훈련원 및 기타 하급관청에 두었던 종8품 벼슬 [본문으로]
  8. 누각동(樓閣洞) : 종로구의 누상(樓上)동과 누하(樓下)동, 체부동 일대에 걸쳐있던 마을 [본문으로]
  9.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萬戶府)의 무관(武官) 관직 [본문으로]
  10. 중구 남대문로1가와 을지로1가에 걸쳐 있던 마을. 미동(美洞) [본문으로]
  11. 초관 : 조선 후기 각 군영에 두었던 최하위장교로서 종 9품의 무관직 [본문으로]
  12. 중구 무교동과 다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근처에 있었다 [본문으로]
  13. 첨사는 원래 조선 시대 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기록에는 전혀 이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의 직위로 첨사가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변방의 국경 수비를 맡는 무관직을 변장(邊將)이라고 했는데 변장은 종3품의 첨사(僉使), 종4품인 만호(萬戶), 종9품인 권관(權管)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런 연유로 종9품인 권관(權管)을 그 당시에는 관습적으로 첨사로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본문으로]
  14. 사복천(司僕川) :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앞을 흐르던 계천(溪泉) [본문으로]
  15. 승(丞) : 시(寺), 서(署), 창(倉), 감(監) 등 중앙의 각 관청에 두었던 종5품에서 정9품까지의 관원 [본문으로]
  16. 이문안(里門內) : 종로구 인사동, 공평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근처에 순화궁(順和宮)의 이문(里門)이 있던 데서 이름이 유래 [본문으로]
  17. 판관 : 돈녕부(敦寧府), 한성부(漢城府) 등 중앙 관청의 종5품 벼슬 또는 주요 주(州), 부(府)의 소재지에서 지방 수령의 속관으로 민정(民政)의 보좌 역할을 담당하던 직위 [본문으로]
  18. 노인에 대한 경칭 [본문으로]
  19. 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의 창고(倉庫) 부근에 있던 동네로 현재의 남대문 시장 지역 [본문으로]
  20.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에 있던 고개, 구지개는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고개, 자수교는 광해군이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옥인동에 창건한 자수궁(慈壽宮) 부근 다리, 사동은 사직공원 근처 마을, 장동(壯洞)은 효자동 일대, 대릉과 소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묘인 정릉이 자리하고 있던 정동(貞陵) 일대의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이르는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 언급된 지명은 경복궁 주변부터 남대문 일대까지의 동네 이름들이다 [본문으로]
  21. 장창교 : 청계청 삼일빌딩 근처에 있던 다리로,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장창교(長倉橋)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성부 중부 8방 중의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에 있어 장통교(長通橋)로도 불린다 [본문으로]
  22. 대부분의 사전에는 ‘동지사(同知事)의 줄임말로 조선시대 종2품 관직’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다. 관직명사전에 의관(醫官), 역관(譯官)의 체아직(교대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거나 주기 위해 만든 관직)으로도 소개가 되고 있다 [본문으로]
  23. 포리 : 포도청이나 지방 관아에 속하여 죄인을 잡는 일을 맡아보던 구실아치 [본문으로]
  24. 소설의 앞에 박지원이 기술한 내용과는 다르고, 말한 이의 계산에 따르더라도 홍기의 나이는 사십 전후가 되어야 한다. 김홍기에 대하여 이러저러 신빙성 없는 말이 많았다는 의미에서 옮긴 말로 보인다. [본문으로]
  25. 1763년(영조 39). 박지원의 나이 27세 [본문으로]
  26.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는 을유년, 즉 1765년 유언호, 신광온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였다고 나온다. 뒤에 쓴 박종채의 계산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본문으로]
  27. 녹나무의 일종 [본문으로]
  28. 금강산(金剛山)의 4대 사찰 중 하나인 표훈사(表訓寺)의 산내(山內)암자로 지장봉(地藏峯)에 있다. 지금 선암은 터만 남아있는데 1,200여m의 높이에 있어 전망대로 이름이 높다 [본문으로]
  29. 벽곡(辟穀) : 신선이 되는 수련 과정의 하나로,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같은 것만 먹으며 도를 닦는 일 [본문으로]
  30. 내금강 초입에 있는 절 [본문으로]
  31. 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만폭동에 있는 폭포. 외금강팔담 중의 하나로 팔담 가운데서도 제일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본문으로]
  32. 영원(靈源), 백탑(白塔) : 내금강 명경대 구역에 있는 골짜기 이름 [본문으로]
  33. 내금강 수미동(須彌洞)의 막바지 영랑봉과 릉허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 [본문으로]
  34. 작은 평상 [본문으로]
  35.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것을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표현을 쓴다. [본문으로]
  36. ‘僊’자는 춤출 선, 신선 선 [본문으로]
  37. 석명(釋名, 중국 한나라 말기의 훈고학자 유희(劉熙)가 사물의 명칭을 분류하여 뜻풀이한 백과사전 성격의 책)이나 자휘(字彙, 명나라 때 완성된 한자 사전)등의 사전류에서 ‘仙’ 자의 풀이를 인용한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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