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운상신선도(雲上神仙圖)1> 지본담채, 28.3 x 41.5cm, 간송미술관]
<김신선전(金神仙傳)>은 박지원이 20대 전후에 썼던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다른 소설들보다는
좀 더 후기의 작품이다. 글 속의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박지원이 28세 때인 1764년(영조 40) 이후에 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전히 전(傳)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세월이 흐른 탓인지 문체는 조금 더
수필체에 가까워졌다. 글에는 옛 한양의 지명과 호칭이 많이 나와 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자서(自序)>
홍기(弘基)는 대은(大隱)이라
노니는 데 숨었다오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2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김 신선(神仙)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3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4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1744년 ~ 1760년 사이에 제작된 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5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니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희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입니다.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6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봉사(奉事)7라 합니다.
누각동8 김첨지(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만호(萬戶)9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 사는 이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10 사는 서초관(哨官)11과 모교(毛橋)12사는 장첨사(僉使)13와 사복천14 가에
사는 지 승(丞)15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16 조봉사(奉事)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심겨져 있고, 계동 유판관(判官)17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손님 둘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丈人)18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처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시옵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19이나 회현방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 배오개, 구리개, 자수교(慈壽橋), 사동(社洞), 장동(壯洞), 대릉(大陵), 소릉(小陵) 등지20
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倉橋)21에
사는 임 동지(同知)22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십니까?’ 하였더니, ‘한 잠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 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23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밈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소’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24.”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깜깜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福)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25이었다.
그 이듬해26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 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띄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참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27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와 노송은
더욱 푸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道僧)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庵)28에 벽곡(辟穀)29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절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김윤겸(1711 ~ 1775) <장안사도(長安寺圖)>, 1768, 지본수묵담채, 21.0 × 25.3㎝, 국립중앙박물관]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30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31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32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김홍도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中 <진주담>, 견본담채, 30.4㎝ x 43.7㎝, 개인소장]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船庵)은 수미봉
(須彌峰)33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탑(榻)34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35.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다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仙)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산에 들어가는 사람(入山)을
신선(屳)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僊)36이란 너울너울(僊僊) 춤을 추듯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37.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박지원이 언제나 김홍기를 만날까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글의 결말이 너무 허무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을 두고 ‘신선이란 허구를 타파하려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평이 있는데, 견강부회
(牽强附會)란 느낌이 든다. 박지원은 글머리에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밝혔다. 유학(儒學)을 했지만 도학(道學)을 배척하지 않은 개방적 사고에서 비롯된
호기심을,못내 놓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그 실체를 알고 싶어 했던 박지원의 뚝심이 대단할 뿐이다. 하지만
글말미를 보면 박지원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참고 및 인용 : 서울지명사전(20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2001.세종대왕기념사업회),
관직명사전(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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