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19 - 우상전 2

從心所欲 2019. 11. 30. 18:15


여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에는 이상조를 두고 ‘파리한 모습에 손가락이 길었다’라고

묘사했고, 제자였던 우선 이상적은 ‘총기가 세상에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스승

이용휴는 제자의 유고집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생각이 현묘한 지경까지 미쳤으며, 먹을 금처럼 아꼈고, 문구 다듬기를 마치 도가에서 단약(丹藥)을 만들

듯했다. 붓이 한 번 종이에 닿으면 전할 만한 글이 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먹을 금처럼 아꼈다는 말은 시를 쓰면서 그 표현에 꼭 필요한 글자만 썼다는 뜻이고, 단약을 만들 듯했다는 말은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번 갈고 닦았다는 뜻이다. 그는 타고난 천재일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쉬움과 함께 이뤄진 것들이다. 박지원과 이덕무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전기를 지었지만 정작 그 가운데 이상조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상조를 직접 만나고 글을 쓴 사람들은 일본에 있었다.

2005년 5월에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 일본의 다카하시 히로시(高橋博巳) 교수가 일본에서 발굴한 이상조에

대한 자료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이상조가 계미년(1763년) 통신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문인들이 이상조를 만나서 나눈 필담을 기록한 책들이 30여종 남아 있다고 했다. 그 중, 이야세 류몬

(宮瀨龍門)이라는 학자의 필담집 <동사여담(東槎余談)>에는 이언진(이상조)의 초상화도 들어있었다.



[이언진 초상, 이야세 류몬 <동사여담(東槎余談)>]


‘해람편’ 을 소개한 뒤 이어지는 박지원의 <우상전>이다.


위의 시로 볼 때 우상 같은 자는 이른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신종(神宗) 만력(萬曆)1 임진년에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엄습하여, 우리의

삼도(三都)2를 유린하고 우리의 노약자들을 코를 베어 욕보였으며, 왜철쭉과 동백을 우리나라 각지에 심었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3이 의주로 피난을 가서 천지에 사연을 아뢰자, 천자가 크게 놀라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으로 구원을 보냈다. 당시에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마귀(麻貴),

유정(劉綎), 양원(楊元)은 모두 다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으며, 어사 양호(楊鎬), 만세덕(萬世德), 형개(邢玠)는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고 도략이 귀신을 놀래킬 만했으며, 그 군사 역시 모두 진봉(秦鳳), 섬서, 절강, 운남,

등주, 귀주, 내주(箂州)의 날랜 기병과 활 잘 쏘는 군사들이며, 대장군의 가동(家僮) 1천여 명과 유계(幽薊)4

검객들이었다. 그런데도 끝내 왜적과 화평을 맺고 겨우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사신의 행차가 자주 에도(江戶)를 내왕하였다. 그러나 사신으로서 체통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느라 그 나라의 민요, 인물, 요새, 강약의 형세에 대해서는 마침내 털끝만큼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왔다갔다만 하였다. 그런데 우상은 힘으로는 붓대 하나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 나라의 정화(精華)를 붓끝으로 남김없이 빨아들여 섬나라 만리의 도성(都城)으로 하여금 산천초목이 다

마르게 하였으니, 비록 ‘붓대 하나로써 한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상의 이름은 상조(湘藻)5이다. 일찍이 손수 제 화상(畵像)에 제(題)하기를,


공봉백(供奉白)6과 업후필(鄴侯泌)7

철괴(鐵拐)8와 합쳐 창기(滄起)가 되나니

옛 시인과 옛 선인(仙人)

옛 산인(山人)이 모두 이씨(李氏)라네.


했는데, 이(李)는 그의 성이요, 창기(滄起)는 그의 또 다른 호(號)이다.

대체로 선비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고 자신을 몰라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지 못하는

법이다. 교청(鵁鶄)9과 계칙(鸂鷘)10은 새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새이지만, 그럼에도 제 깃털에 도취되어

물에 비추어 보고 서 있다가 다시 하늘을 맴돌다 내려앉거늘, 사람이 지닌 문장을 어찌 고작 새 깃털의

아름다움에 비하겠는가. 옛날에 경경(慶卿)11이 밤에 검술을 논하자 합섭(篕聶)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어

나가게 하였으며12, 고점리(高漸離)13가 축(筑)14을 연주하자 형가(荊軻)가 화답하여 노래하더니 이윽고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붙들고 운 일이 있었다15.

무릇 그 즐거움이야 극에 달했겠지만, 더 나아가 울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복받쳐서 엉겁결에

슬퍼한 것이다. 비록 그 당사자에게 물어본다 해도 역시 그때 제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문장으로써 서로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이 어찌 구구한 검사(劍士)의 한 기예 정도에 비할 뿐이겠는가?

우상은 아마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일까? 그의 말에 어쩌면 그렇게도 슬픔이 많단 말인가?

그의 시에,


닭의 머리 위 벼슬은 높기가 관과 같고

소의 축 처진 멱미레16는 크기가 전대 같네

집에 있는 보통 물건이란 하나도 기이할 것 없지만

크게 놀랍고 괴이한 건 낙타의 등이로세.


하였으니, 우상은 늘 자신을 남다르게 여겼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그동안 지어 놓은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누가 다시 알아주겠는가.”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공자가 말하기를, “ 재주 나기가 어렵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하였다.

자공(子貢)이 묻기를, “저는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호련(瑚璉)17이다” 하였다.

이는 자공의 재주를 칭찬하면서도, 작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릇에 비유되고 재주는 그 속에 담기는

물건에 비유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결이 쪼록쪼록 저 옥 술잔이여, 황금빛 울창주(鬱鬯酒)18

그 속에 들었도다‘ 했고,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솥이 발이 부러져 공(公)의 먹을 것이 엎어졌도다19

했으니, 덕만 있고 재주가 없으면 그 덕이 빈 그릇이 되고,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그 재주가 담길 곳이

없으며, 있다 해도 그 그릇이 얕으면 넘치기가 쉽다. 인간은 천지와 나란히 서니 바로 삼재(三才)20

된다. 그러므로 귀신은 재(才)에 속하며21 천지는 큰 그릇이 아니겠는가?

깔끔을 떠는 자에게는 복이 붙을 데가 없고, 남의 정상(情狀)을 잘 꿰뚫어 보는 자에게는 사람이 붙지 않는

법이다. 문장이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다. 오묘한 근원에서 정화(精華)를 끄집어내고, 형적이 없는 데서

숨겨진 이치를 찾아내어 천지 음양의 비밀을 누설하니, 귀신이 원망하고 성낼 것은 뻔한 일이다.

재목[木] 중에 좋은 감[才]이 있으면 사람이 베어 갈 생각을 하고, 재물[貝] 중에 좋은 감[才]이 있으면

사람이 뺐어갈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재목 재(材)자와 재물 재(財) 자 속에 있는 ‘재(才)’자의 글자 모양이

밖으로 삐치지 않고 안으로 삐치는 것이다.


우상은 일개 약관에 불과한 자로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소문이 제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벼슬아치들이

그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다 밖 만리의 나라에 드날리고, 몸소 곤어(鯤魚)22

고래와 용과 악어의 소굴까지 뒤졌으며, 솜씨는 햇빛과 달빛으로 씻은 듯 환히 빛났고, 기개는 무지개와

신기루에 닿은 듯이 뻗치었다. 그러므로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23’고 한 것이며,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24’고

한 것이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성린, 사로승구도 中 <오이가와(大井川) 건너기>]



[조선선 입진지도, 1855년 대마도에 다녀간 역관 김계문의 배, 게이오대학 도서관 소장]



[통신사방정성도(通信使訪淀城圖)25, 교토대학 문학부 도서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영인본]


승본해(勝本海)26를 지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맨발의 왜놈 사내 몰골조차 괴상한데

압색(鴨色)27의 윗도리 등엔 별과 달이 그려져 있네

꽃무늬 적삼 입은 계집들 달음질해 문 나서니

머리 빗다 못 마친 양 그 머리 동여맸네.

어린아이 칭얼대며 어미젖을 빨아내니

어미가 등을 토닥이자 울음소리 잦아드네

이윽고 북 울리며 관인(官人)28이 들어오니

오만 눈이 둘러싸고 활불(活佛)인 양 여기누나

왜놈 관리 무릎 꿇고 절하며 값진 보물 올리는데

산호랑 대패(大貝)29를 소반 받쳐 내오누나

주인과 손님이 늘어섰으나 실로 벙어리인 양

눈짓으로 말을 하고 붓끝으로 얘기하네

왜놈의 관부(官府)에도 정원 풍취 풍부하여

종려나무 푸른 귤이 뜨락에 가득 찼네30


배 안에서 치질 병이 생겨 누워서 매남(梅南) 스승님31의 말씀을 생각하며 다음의 시를 지었다.


공자의 유교와 석가의 불교는

각각 경세(經世)와 출세(出世)32로서 해라면 달이로세

서양 선비33 일찍이 오인도(五印度)34 가 보았으나

과거나 현재에 부처 하나 없었도다

유가에도 장사꾼이 있기로는 마찬가지

붓과 혀를 까불러서 괴이한 학설 퍼뜨려

산발을 하고 불이 난 채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생시에 남 속인 죄 마땅히 받으리라

독한 불길이 진단(震旦)의 동쪽35에도 미쳐 와서

화려하고 큰 절들이 도시와 시골에 널렸구나

섬 백성 흘겨보며 화복(禍福)으로 겁을 주니

향화(香火)라 공양미가 끊일 날이 없고말고

비하자면 제 자식이 남의 자식 죽여 놓고

들어와 봉양하면 어느 부모 좋아하랴

육경(六經)36이 중천에서 밝은 빛을 비추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눈에 옻칠한 듯하네

양곡(暘谷)이나 매곡(昧谷)37이 이치가 둘이겠나

순종하면 성인되고 배반하면 악인되네

우리 스승 나더러 대중에게 고하라기

목탁 대신 이 시 지어 네거리에 울리노라38


우상의 이러한 시들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다. 나중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들렸더니 그새 이 시들이 모두

책으로 인출(引出)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상과는 생전에 상면이 없었다. 그러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시켜 나에게 시를 보여 주며 하는 말이,

“유독 이분만이 나를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했다기에,

나는 농담 삼아 그 사람더러 이르기를,

“이거야말로 오농(吳儂)의 간두러진 말투39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 했더니,

수상이 성을 내며, “창부(倡夫)40가 약을 올리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어 중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

얼마 후 우상이 죽으니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의 집안사람이 꿈속에서 신선이 술에 취하여 푸른

고래를 타고 가고 그 아래로 검은 구름이 드리웠는데 우상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후에 우상이 죽으니,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이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들 말하기도

하였다. 아! 나는 일찍이 속으로 그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 그럼에도 유독 그이 기를 억누른 것은, 우상이

아직 나이 젊으니 머리를 숙이고 도(道)로 나아간다면, 글을 저술하여 세상에 남길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상은 필시 나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상의 죽음에 대해 만가(輓歌)41를 지은 이42가 있어 노래하기를,


오색을 두루 갖춘 비범한 새가

우연히도 지붕 꼭대기에 날아 앉았네

뭇사람들 다투어 달려가 보니

놀라 일어나 홀연 자취를 감추었네


하였고, 그 두 번째 노래에,


까닭 없이 천금을 얻고 나면

그 집엔 재앙이 따르는 법

더구나 이처럼 세상에 드문 보배를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리오


하였고, 그 세 번째 노래에,


조그마한 하나의 필부였건만

죽고 나니 사람 수가 준 걸 알겠네

세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많다마는


하였다. 또 노래하기를,


그 사람은 쓸개가 박마냥 크고

그 사람은 눈빛이 달같이 밝고

그 사람은 팔목에 귀신 붙었고

그 사람은 붓 끝에 혀가 달렸네


하였고, 또,


남들은 아들로써 대를 잇지만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혈기(血氣)야 때로는 끊어지지만

명성은 끝질 날이 없으리.


하였다.

나는 이전에 우상을 보지 못하여 매양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 문장까지 불살라서 남은 없다 하니, 세상에 그를

알 사람이 더욱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자 속에 오래 수장한 것을 꺼내어 그가 예전에 보여 준 것을 찾았는데,

겨우 두어 편뿐이었다. 이에 모조리 다 기록하여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에게 아우43가 있는데, 그 역시도  - 

(이하 원문이 빠짐)




[<이언진 7언절구 자작 자필시>, 왼쪽 상단의 글씨는 李松穆館自書詩(이송목관의 친필 시이다).

李惠寰靑批(이혜환(이용휴)이 푸른색 비점44을 찍었다.)]


이상조의 유고집인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에는 「호동거실(衚衕居室)45」이라는 제목아래 무려

157수의 시가 실려 있다. 연작시인 셈이다. 거리 호(衚)와 거리 동(衕)을 쓴 호동(衚衕)은 길거리나 골목으로

해석되어 「호동거실(衚衕居室)」은 길거리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 된다., 그의 시 구절에는 ‘그는 바로

호동 이씨(是衚衕姓李人)라고 하여 호동을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쓰기도 했다. 한시(漢詩)는 통상 오언시

(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로 쓰여지는데 이 시는 특이하게도 육언시(六言詩)이다. 다음은 연작시 중 일부다.



1

오경이 되면서 종이 울리니

길거리가 뛰어달리 듯 분주해지네.

가난한 자는 먹이를 천한 자는 벼슬을 구할 테니

만인의 속마음을 앉아서도 알겠네.


3

물렀거라 외치는 소리가 천둥치듯 하니

사람들이 길을 피해 집의 문을 잠그네.

세 살 먹은 아이까지도 울음을 그치니

벼슬아치가 참으로 호랑이보다도 무섭구나.


4

소와 말이 오고 가기에

시장 길바닥에는 오줌과 똥이 널려 있건만,

선생의 콧구멍은 맑고 깨끗해

상머리에 향을 한 촉 태우네.


10

시장 바닥은 언제나 시끌벅적해

되놈 말인지 왜놈 말인지 분간을 못하겠네.

쌀에는 모래 섞고 은에는 구리 섞어

지나가는 촌놈들 잘도 속이네.


13

밥 한 사발 먹은 뒤에 배부르면 쉬다가,

큰 길 곁에서 팔베개하고 잠자네.

눈 덮인 새벽길을 날마다 왕궁으로 출근한다고,

초라한 거지아이가 승지를 가엽게 여기네.


이상조의 유일한 유고집으로 알려졌던『송목관신여고』외에 2008년에는 친필 서첩인『우상잉복(虞裳剩馥)』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해람편(海覽篇)>을 비롯하여 시 3편, 기행일기 6편, 편지 5편 등이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이언진 친필 서첩 『우상잉복(虞裳剩馥)』의 <해람편> 본문]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중국역대인명사전(임종욱, 2010,

이회문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원형백과(문화콘텐츠닷컴)


  1. 종은 명(明)나라 13대 황제로 만력(萬曆)은 그때의 연호(年號) [본문으로]
  2. 경주(東都), 한양, 평양(西都) [본문으로]
  3. 선조(宣祖) [본문으로]
  4. 거란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연운) 16주(州) 지역 [본문으로]
  5. 원래 이름은 이언진(李彦瑱)이고 상조는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공봉한림(供奉翰林)에 제수되었다 [본문으로]
  7. 신선술을 좋아햇던 당나라의 문장가 이필(李泌). 업후(鄴侯)에 봉해졌다 [본문으로]
  8. 중국 도가의 전설상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 [본문으로]
  9. 해오라기. 푸른 백로 [본문으로]
  10. 비오리 [본문으로]
  11. 전국시대 말기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 진(秦)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연(燕)나라로 망명하여 태자 단(丹)과 모의하여 진나라 왕인 정(政, 秦始皇)을 죽이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12. 형가가 어느 고을을 지나다 만난 인물인데 서로 검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합섭이 성을 내자 형가가 기분이 상하여 집을 나와버린 일이 있었다 [본문으로]
  13. 전국 시대 말기 연(燕)나라 사람으로, 축(筑)을 잘 탔다. 형가(荊軻)의 친구로, 형가와 함께 진시황(秦始皇)을 살해하려는 모의에 가담했다 [본문으로]
  14. 비파 비슷한 현악기 [본문으로]
  15. 합섭은 형가를 몰라준 인물, 고점리는 알아준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형가의 이야기는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으로]
  16. 소의 턱밑 살 [본문으로]
  17. 오곡(五穀)을 담아 신께 바치던 제기(祭器) [본문으로]
  18.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 제사(祭祀)에서 강신(降神) 때 씀 [본문으로]
  19. 여기서 공(公)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소인(小人)이 대신의 중책을 감당하지 못해 국사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0. 天、地、人 [본문으로]
  21. 예기(禮記)에 ‘그러므로 사람이란 천지의 덕(德)이며, 음양이 서로 교통하고, 귀신이 서로 만난 것’이란 구절에 바탕을 둔 서술 [본문으로]
  22. 장자(莊子)에 나오는 북쪽 대해(大海)에 산다는 큰 물고기 [본문으로]
  23. 주역에 나오는 구절 [본문으로]
  24. 노자와 장자에 나오는 구절 [본문으로]
  25. 1748년 통신사행이 요도조(淀城)에 도착하는 모습. 강물 안에 금루선과 예선들이 있고 물 밖에는 많은 인파가 보인다. [본문으로]
  26. 잇키섬(壹岐島) 주변 바다 [본문으로]
  27. 오리 머리 빛깔인 녹색 [본문으로]
  28. 조선 사신을 가리킴 [본문으로]
  29. 큰 바닷조개 [본문으로]
  30. 이 시는 일기도(壹岐島)라는 제목으로 송모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31. 이상조의 스승 이용휴(李用休, 1708 ~ 1782)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이자 남인 실학파의 중심이었던 이가환(李家煥)의 아버지이다. [본문으로]
  32. 유교의 현세(現世)주의와 불교의 내세(來世)주의를 가리킴 [본문으로]
  33. 예수회 선교사들 [본문으로]
  34. 예전에 인도가 동서남북과 중(中)의 5구역으로 구획되어 생긴 이름. 인도를 오천축(五天竺)이라고도 했다 [본문으로]
  35. 고대 인도에서는 중국을 ‘진단’으로 불렀다. ‘진단의 동쪽’은 일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6.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6가지 경서 [본문으로]
  37. 양곡은 해 뜨는 곳인 일본을, 매곡은 해지는 곳인 중국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8. 이 시는 ‘동짓날 배 안에서 혜환 스승님의 말씀을 생각하며(壹陽舟中念惠寰老師言)’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39. 오농은 오(吳)나라 사람, 즉 화려하고 세련됨을 추구한 강남(江南)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말투가 간드러진 기색이 있어 예전부터 오농교어(吳儂嬌語), 오농연어(吳儂軟語), 또 원문에 쓰인 오농세타(吳儂細唾) 같은 표현들이 있었다 [본문으로]
  40. 시골뜨기라는 뜻으로 오나라가 있는 강남 사람들이 중원(中原)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르던 말. [본문으로]
  41.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나 가사 [본문으로]
  42. 송복관신여고에 ‘만이우상(輓李虞裳)’이라는 제목의 5언 고시 10수가 실려 있고, 그 작자가 스승인 이용휴로 되어 있다. 박지원은 그 중 5수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43. 이언로(李彦璐, 1748년 생). 1773년에 역시 한어(漢語) 역과에 합격하였다. [본문으로]
  44. 비점은 시가나 문장 따위를 비평하여 아주 잘된 곳에 찍는 점을 말함. [본문으로]
  45. 많은 곳에 ‘동호거실’로 소개되고 있는데 서울대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가 잘못을 지적하고 이름을 바로 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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