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묵사동(墨寺洞)을 설명하면서
“옛날 허생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자못 사적이 있어
박연암이 그를 위해 전을 지었다"는 글이 있다. 이 글에 나오는 ‘허생(許生)’과 <허생전>의 주인공이 같은
인물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허생전>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실재했던 ‘허생’이라는 인물에 착안하여
박지원이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한경지략(漢京識略)』은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부지(府誌)1인데, 지은 이는 수헌거사(樹軒居士)로 되어 있다. 후세는 이 수헌거사를 4검서의 하나였던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柳本藝)로 추정하고 있다. 허생이 살던 곳은 허생전 원문에는
‘묵적동(墨積洞)’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남산골(필동)이라는 해석도 있고 동국대 후문의 북쪽인
묵정동(墨井洞)이라는 해설도 있다.
[정선 <목멱산도(木覓山圖)>, 견본담채 17.3 x 18.3cm, 고려대학교박물관]
허생은 묵적골에서 살았다. 바로 남산 밑까지 곧추 닿고 보면 거기 우물턱 위에 늙은 살구나무가 섰고 바람비를
가리지 못하는 두어칸 초가집이 이 나무를 향하여 사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인 허생은 글 읽기를
좋아하고 그의 안해는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 호구(糊口)를 하였다.
하루는 그 안해가 배가 고파 못 배겨 눈물을 지으면서,
“당신은 평생에 과거 한 번 보지 않으면서 글은 읽어 뭣 하겠소?” 하였다.
허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아직 글을 못 다 읽었소.”
“그러면 장인바치2질이라도 해 보세요.”
“장인바치질은 본디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소?”
“그러면 장사라도 해야지요.”
“막힌 말이오. 밑천 없는 장사를 어떻게 하겠소?”
안해는 화를 버럭 내면서 바가지를 긁었다.
“그래! 밤낮없이 글을 읽어 배웠다는 것이 고작 ‘어떻게 하겠소?’란 말뿐이오? 장인바치질도 못한다,
장사도 못한다, 그러면 도적질이라도 못 할 것이 뭐요?”
허생은 책을 덮고 일어서면서,
“애석하구나. 내가 당초 십 년 동안 글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했더니 금년이 칠 년이렷다.” 하고는 사립을
나섰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지라 곧추 운종가로 갔다. 그는 거리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한양성에서 갑부가 누구요?”
변씨가 제일가는 부자라고 말하는 자가 있어 그는 되잡아 변씨 집을 찾았다. 허생은 변씨를 만나 넌지시
읍을 하고는 다짜고짜로,
“내가 집이 가난한 터라 잠깐 시험 삼아 해 볼 일이 있어 그러니 임자는 나에게 돈 만 냥만 돌려 주시우.”
하니 변씨는 선뜻, “좋소! 그러시우.”란 말 한마디뿐, 선 자리에서 돈 만 냥을 내어 주었다.
허생은 끝내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가 버렸다. 옆에 있던 변씨의 자제들과 문객들은 허생을 속절없는
비렁뱅이로 보았다. 허리띠는 헤어져 속살이 이삭 패듯 나왔고, 가죽신 뒤턱은 짜그라지고, 갓모자는
주저앉고, 중치막 자락은 구질구질 멀건 콧물이 뚝뚝 들었다. 비렁뱅이 손이 간 뒤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주인장은 대관절 그 손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르네.”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돈 만 냥을 허공에 내놓고 던져 내주시면서 성명도 안 물어 보시니 대체
웬일이시오?”
“자네들이 모르는 말일세. 대체로 남에게 아쉬운 사정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제 의사를 떠벌려 먼저 신의를
자랑하면서도 어디고 그의 얼굴빛은 비굴하고 이야기는 중언부언하는 법이네. 그러나 아까 그 손님은 비록
옷과 신발이 허술하기는 하나 말은 간결하고 눈초리에 뱃심이 나타나고 얼굴에 수줍은 빛이 없으니 이런 이는
재물이 없어도 자족하는 사람일 것이네. 그가 시험해 본다는 일이 필시 작은 일이 아닐 터이니, 나 역시 그 손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안 주면 몰라도 돈 만 냥을 이미 줄 바에야 이름은 얻어서 무엇 할 것인가?”
여기서 허생이 빌린 ‘만 냥’이라는 돈이 과연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가장 흔히
동원되는 방법이 쌀값 비교인데, 조선시대의 쌀값이 늘 일정한 것도 아니고 또 쌀을 계량하는 단위도 지금과
차이가 있어 정확한 계산이 쉽지는 않다. 또한 효종 때로 추정되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아직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기도 전이다. 상평통보의 공식적인 단위는 푼[分]으로, 상평통보가 열 개,
즉 10푼이면 1전(錢)이 되고, 10전이면 1냥(兩)이 된다. 그러니까 1냥은 100푼인 것이다.
지금 추정하는 1냥의 가치는 현재 가치로 적게는 1만원부터 많게는 5만원까지로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그
중간치인 3만원으로 치면 만 냥은 3억이다. 그런데 허생이 변씨에게 빌린 것이 돈인지 아니면 은인지 분명치가
않다. 조선시대에는 은이 대표적인 결제수단이기도 했는데, 은과 상평통보의 교환 비율이 대개 1:4였다고 한다.
그래서 허생이 빌린 것이 은이라면 그 금액은 12억까지도 높아진다. 앞의 글에서 변승업이 병들었을 때 그 재산을
조사해보니 은 50만 냥이라고 하였는데, 이 계산법에 따르면 600억이 되는 셈이다.
허생은 만 냥을 얻어 가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인지라 허생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허생은 대추, 밤, 감, 배, 석류, 감자, 귤 등속을
시가의 배 값으로 무역해 두었다. 허생이 과일을 무역해 쌓아둔 뒤로 국내에서는 잔치고 제사에 소용할 과일이
없어져서 허생에게 배 값을 받아 갔던 장사치들이 이번은 열 배 값을 내고 되사게 되었다. 허생은 이것을 보고
깊게 한숨짓고, “돈 만 냥으로 이렇게 판을 치게 되니, 우리나라 바닥을 짐작할 수 있구나.” 하였다. 허생은
다시 칼, 호미, 마포, 백목 등 피륙을 가지고 제주로 들어가 말총을 있는 대로 끌어 모으면서, “몇 해를 못 가서
온 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싸 동이지 못할걸!” 하였더니, 과연 얼마 안 되어 망건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어느 날 바닷가로 가서 늙은 사람을 보고 물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살 만한 먼 섬이 없을까?”
“있소이다. 일찍이 제가 풍랑에 불려 바로 서쪽으로 사흘 동안 표류해 가서 어떤 빈 섬에서 밤을 묵었는데,
아마도 사문(沙門)과 장기(長崎) 어간인 듯합니다. 꽃과 나무가 저 혼자 피고 나무 열매, 풀 열매가 저 혼자
익고 사슴이 떼를 짓고 물고기가 놀라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길잡이를 하게나. 나와 같이 부귀를 누릴 걸세.”
사공은 그 말을 좇아서 즉시로 좋은 바람을 맞아 동남으로 향하여 그 섬에 닿았다. 허생은 높은 둔덕에 올라
한참 바라보더니 서글픈 기색으로, “땅이 천 리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볼 것인가? 그래도 흙이 기름지고 샘물
맛이 좋으니 넉넉한 집 주인 늙은이 노릇하기에는 알맞겠구나!” 하였다.
사공이 있다가,
“사람 없는 빈 섬에 누구와 함께 살 것입니까?” 하니, 허생은 “덕(德)이 있는 곳에 사람이 붙는 법이라네!
덕이 없음을 걱정할 일이지 사람 없는 걱정이야 할 것이 없네!” 하였다.
이때 변산에는 도적 떼가 수천 명이나 몰려 있었다. 지방 관청에서는 군사를 풀어 놓아도 잡을 수가 없었으나
도적 떼도 역시 나와서 노략질을 못 하고 바야흐로 주려서 곤경에 빠진 터인데, 허생이 그들을 찾아갔다.
허생은 대뜸 물었다.
“자네들은 여편네를 가졌나?”“없소이다.”
“그러면 논밭을 가졌나?”
도적들은 비웃으면서,
“여편네가 있고 논밭이 있을 바엔 무엇이 답답해서 도적질을 하겠소?” 하니, 허생은
“그럴 일이다! 그러면 왜 새 장가를 들어 집을 짓고, 소를 사고, 농사를 지으며 살지 않는가? 도적이란 이름을
면하고 앉아서 부부의 낙을 즐기고 나가서 쫓기고 붙들릴 걱정 없이, 같이 잘 먹고 잘 입고 배부르게 살지를
않는가?” 하고 물었다. 여러 도적들이,
“어째서 그것을 마다하겠소? 다만 돈이 없다오.” 했다.
허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들은 도적질을 하면서 어째서 돈 걱정을 하나? 내가 자네들을 위해 변통해 주겠네. 내일 바다에 나가
보면 붉은 깃발을 단 배가 모두 돈을 실은 배일 터이니, 마음대로 가져들 가게!”
허생이 도적떼와 약속을 하고 간 후에 도적들은 모두들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 이튿날이 되어 도적들이
바다에 나가 보니 허생이 돈 30만 냥을 싣고 왔다. 보두들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죽 늘어서서 절을 하면서,
“그저 장군의 명령대로 하오리다.” 하였다.
허생은 그들에게
“그저 힘대로들 지고 가게나.” 했더니, 이때야 여러 도적들이 다투어 가면서 돈 짐을 지는데, 애달프게도
한 사람이 백 냥 더는 지지 못하였다. 허생이, “자네들이 힘이 부족해서 백 냥밖에 들지를 못하니 그러고야
무슨 도적질을 하겠나. 비록 자네들이 지금 양민이 되려 해도 이름이 도적 명부에 실려 있고서 돌아갈 수도
없겠구나. 내가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자네들은 각각 백 냥씩만 가지고 가서 여편네 한 명, 소 한 마리씩만
데리고 오게나.” 하니, 여러 도적들은 “네.” 하고는 다 흩어져 갔다.
허생은 2천 명이 한 해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해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도적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돌아왔다. 그들을 함께 배에 싣고는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이같이 도적떼를 몰아간 뒤에 나라에서는
마음을 놓게 되었다.
섬에 도착한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를 엮어 바자3를 만들었다. 아직 손도 대보지 못한 생땅이라
백 가지 씨앗이 무성하고 묵밭4 새밭도 없이 한 줄기에 아홉 이삭씩 여물었다. 그 해에 3년 먹을 양식을
저장하고는 남은 곡식을 몽땅 배에 실어 장기(長崎)5로 가서 팔았다. 장기란 땅은 일본에 딸린 고을로서 호수가
31만인데, 때마침 큰 흉년이 들었던 터에 이 곡식을 풀어서 은 백만 냥을 얻었다. 허생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이제는 시험을 좀 해 보았구나!”
이때야 허생은 남녀 2천 명을 죄다 불러 놓고,
“내가 처음 자네들과 함께 이 섬에 들어온 후 먼저 살림살이부터 풍족하게 만든 뒤에 따로 글자도 만들고
제도도 장만할 작정을 했더니, 땅은 작고 또 내 덕이 박한지라 나는 오늘로 떠나겠네. 아이를 낳거든 오른손으로
수저를 잡도록 가르치고, 하루라도 먼저 안 이에게는 사양해서 먼저 먹게 하도록 가르치게.” 하고는 다른
배들을 죄다 불사르고는, “안 가면 못 오겠지!” 하였다. 은 50만 냥을 바다에 던져 넣고는, “바다가 마를 때는
가지는 자가 있겠지. 백만 냥이라면 온 나라에서도 용납할 수 없을 터인데 더구나 작은 섬에서랴!” 하고
글 아는 자를 모두 함께 배워 태워서 데려 나오고는, “이 섬이나마 화근을 끊어야만 하지!” 했다. 온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고루 구제하고 났으나 아직도 10만 냥이 남았다.
“응! 이 돈은 변씨에게 갚아야 되겠군!” 하고는 변씨를 찾아가서,
“당신은 나를 기억하겠소?” 하니, 변씨는 깜짝 놀라서,
“당신의 얼굴빛이 옛날보다 조금도 나은 데가 없으니 만 냥 돈을 치패6보지나 않았소?”
하니, 허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재물 때문에 얼굴이 돋보이는 것은 임자네 들 일일 것만 같소. 만 냥 돈이 어찌 도를 살찌울 수야 있겠소?”
허생은 이러고야 은 10만 냥을 변씨에게 내어 주면서,
“내가 한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글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당신에게 돈 만 냥을 꾸게 되어 미안하오.” 하였다.
변씨는 깜짝 놀라 일어서서 절을 하고는 사양하면서 십분의 일만 이자로 받겠다고 하니 허생은 크게 화를 내며,
“임자는 어째서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옷을 뿌리치고 가 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뒷발만 밟아 따라가
바라보니 그 손은 남산 밑으로 가서 어느 오막살이집으로 들어갔다. 웬 늙은 노파가 우물 둑에서 빨래를 하고
있어 변씨는 물었다.
“저 오막살이집은 뉘 집인가요?”
노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허생원 댁입니다. 허생원이 집은 가난한데다가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하루아침에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은 지가 벌써 오년이나 되었답니다. 그 부인이 혼자 남아 있으면서 그가 집 나간 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제사를 지낸답니다.” 하였다.
변씨가 비로소 그 손님의 성이 허씨인 것을 알고는 한숨을 짓고 돌아왔다고 한다. 변씨는 그 이튿날로 받은 돈을
죄다 가져다가 돌려주니, 허생원은 사양하면서,
“내가 부자가 되려고 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가지겠소?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의지 삼아 살 터이니,
당신은 가끔 나를 보살펴 식구에 따라 양식을 보내 주고 몸을 재서 옷감이나 보내 주면 일생을 이것으로
만족하겠소. 누가 재물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겠소?” 하였다. 변씨는 허생을 백방으로 달랬으나 필경 어쩔 수
없었다. 변씨는 이때부터 허생의 살림살이를 대중하여 군색할 만하면 언뜻 자신이 용돈을 가지고 가서 주곤
했다. 허생은 흔연히 받다가도 혹시 더 올 때가 있으면 몹시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어째서 나에게 재액7을 보낸단 말이오?”
술을 가지고 갈 때는 매우 좋아하면서 서로 권커니 잣커니 취하도록 마셨다. 벌써 몇 해를 두고 정분은 날로
두터워져 변씨가 한번은 5년 동안에 어떻게 해서 백만 냥을 벌었냐고 조용히 물으니 허생이 말했다.
“이것이야 알기 쉬운 일이오. 조선은 배가 외국으로 통하지 못하고 수례가 국내에 다니지 못하므로 온갖
물건이 제 바닥에서 나서 제 바닥에서 잦아지게 마련이오.
무릇 천 냥 돈이란 그리 많은 재물이 못 되므로 그리 많은 물건을 도거리로 살 수는 없고 보니 이것을 열로 쪼개면
족히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소. 물건이 가벼우면 옮기기가 쉬우므로 열 가지 물건 중에서 한 가지 물건이 비록
물리더라도 아홉 가지 물건이 펴 나가면 이익이 서로 보충될 터이니 이것은 이익을 보는 안전한 방법이기는
하나 좀스러운 장사 방법이라오. 무릇 돈이 만금이 되면 족히 물건을 다 끌어 모을 수 있으므로 수레에 실으면
온채 수레가 되고 배에 실으면 온 배에 실을 수 있고 고을로 치면 한 고을을 도맡을 수 있어 그물의 토처럼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끌어들일 수 있소.
육지에서 나는 물건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통거리8로 사 두든지,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재화 중에 한 가지만
통거리로 사 두든지, 만 가지 약재 중에 한 가지만 통거리로 사 둔다면 한 가지 물화가 꼬리를 감추고 백 명의
장사치들은 손속이 말라 들 것이니, 이는 백성을 해치는 장사 방법으로 뒷날 세상이라도 일 맡은 자가 이런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좀먹을 것이오.“
변씨가 물었다.
“애초에 당신은 어떻게 내가 돈 만 냥을 낼 줄 알고 나를 찾아와 청했는지요?”
“꼭 당신만이 아니라 만 냥을 가진 자라면 내어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내 짐작으로 내 재주라면 능히
백만 냥은 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마는 운수야 하늘에 있는 것이라 내가 어찌 꼭 알 수야 있었겠소? 그러매 나를
부리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일 터라 반드시 부유한데 더욱 부유할 것도 역시 하늘 운수일 것이오. 이러고야 어찌
돈을 꾸어 주지 않겠소? 벌써 돈을 꾼 다음에는 돈 임자의 복을 빙자해 장사를 했으므로 손만 대면 성공하게
되었으니 만약에 내 자신의 돈으로 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단정하지 못할 것이오.”
변씨는 다시 물었다.
“지금 사대부들은 남한산성의 치욕9을 설분10코저 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뜻 있는 선비로서 한번 팔뚝을
걷고 지혜를 짜낼 때입니다. 당신 같은 재주로 어찌하여 이렇게 스스로 세상모르게 파묻혀 있습니까?”
“예로부터 자취 없이 숨어 있다가 사라진 사람을 꼽아 보면, 어찌 능히 적국에 사신으로 갈 만한 인물로 누더기
속에서 늙어 죽은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11 같은 인물에 한할 것이며, 전쟁이 나면 군량을 이어 댈 만한
인물로 바다 구석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은 반계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12 같은 이에 그치겠소?
오늘 나라 정치를 맡아 보는 사람들이야 알 만하오. 나는 결국 장사를 잘하는 사람이오. 버린 돈은 능히
구왕(九王)13의 머리를 살 수 있었지마는 이것을 바다에 던지고 온 것은 돈이 쓸 데가 없었던 까닭이라오.”
변씨는 “후유”하고 한숨을 쉬고 나갔다.
변씨는 본디 정승 이완(李浣)14과 사이가 좋았다. 이완은 당시 어영대장으로 있었는데, 일찍이 그가 변씨에게,
요즘 시정 여염에 파묻혀 있는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로 함께 큰일을 할 만한 인물이 없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변씨가 허생 이야기를 했더니 이공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정말 그런 인물이 있나? 이름은 뭐라 하나?”
“소인과 삼 년 동안을 같이 지냈지마는 끝내 이름을 모릅니다.”
“그는 틀림없이 이인(異人)일세. 그대와 함께 가 보세.”
이완은 밤을 타서 탈것과 하인들을 물리치고 혼자 변씨와 함께 도보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 밖에 세워 두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찾아온 사연을 죄다 이야기했더니,
허생은 들은 척도 않고는, “여보, 당신 옆구리에 차고 온 술병이나 끌러 놓으소. 한잔 맛있게 먹읍시다.” 하였다.
변씨는 이 대장이 한데서 오래 서 있는 것이 민망하여 여러 번 귀띔을 했으나 허생은 듣지 않았다.
밤이 깊어서야 허생은 손을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이 대장이 들어와도 허생은 앉은 채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어색하여 몸 가눌 바를 모르고 이내 국가에서 어진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허생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했다.
“밤은 짧고 이야기는 길어 듣기 지루하오. 대인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소?”
“대장이올시다.”
“그러면 당신은 즉 국가의 신임 받는 신하이구려. 내 마땅히 와룡(臥龍) 선생을 추천할 터이니 당신이 능히
임금께 청하여 세 번씩 그 오막살이를 찾도록 할 수 있겠소?”
이 대장은 고개를 드리우고 한참 있다가는 대답하였다.
“어렵습니다. 다음 계책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아직 다른 계책은 배운 것이 없소.”
이 대장은 그래도 자꾸만 물었다. 허생은,
“명나라 장사들이 조선에 대하여는 묵은 은혜가 있다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들 조선으로 와서 홀아비 신세로
이리저리 유랑하고 있으니, 그대가 조정에 청하여 종실의 딸들을 그들에게 고루 시집보내고 훈척(勳戚)15
세가들의 저택을 빼앗아 그들에게 살도록 할 수 있겠소?” 하니, 이 대장은 고개를 늘이고 한참 있다가는 대답하였다.
“어렵습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고만 하니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여기 가장 쉬운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대가 할 수 있겠소?”
“죄송합니다. 들려주십시오.”
“무릇 대의를 천하에 소리치려고 할진대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어 결탁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요.
남의 나라를 치려고 하면서 먼저 간첩을 쓰지 않고는 성공한 자가 없는 법이오. 지금 만주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고 나서 중국과는 친하지 않다고 자인하고 있지마는 조선은 다른 나라보다 앞장서서 그들에게
복종한 까닭에 그들은 조선을 신뢰하고 있소이다.
이런 기회에 옛날 당나라, 원나라 때 모양으로 조선의 자제들을 보내어 유학시키고, 벼슬하게 하고, 상인들이
마음대로 출입하도록 청한다면 조선이 자기들과 친해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할 것이오. 이렇게 되면 국내의
청년자제들을 뽑아 머리를 깎고 되복을 입히고, 선비들은 과거를 보이고, 평민들은 강남 지방까지 멀리 장사를
나가도록 하여, 그 나라의 허실을 엿보고 지방의 호걸들과 결탁을 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요,
나라의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이외다.
이리하여 만약 주씨(朱氏)16를 구해 보아도 얻지 못한다면 천하의 제후와 상의하여 좋은 사람을 하늘에
천거해야 하오. 이렇게 한다면 나아가서는 대국의 스승이 될 것이요, 물러나서는 백구(伯舅)17의 나라가
되기는 어렵잖을 것이오.“
이 대장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모두 예법을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으니 누가 머리 깎고 되복 입기를 좋아하겠습니까?”
허생은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기를,
“그래! 소위 사대부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오랑캐 땅에 나서 자칭 사대부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래위 입성18을 소복으로 한다는 것은 이것이야 상복(喪服)이 아닌가? 머리를 쥐어 묶어 삐쭉하게 쏘았으니
이거야 남방 오랑캐의 북상투가 아닌가? 무엇이 예법이란 말인가? 번오기(樊於期)19는 자기의 사사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20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되복 입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금 명나라를 위하여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 머리칼 한오리까지 아끼고
앞으로 장차 전장에 나가 말을 달리고 칼을 내두르고 창을 쓰고 돌을 날릴 궁리를 한다면서도 그놈의 넓은
소매를 그대로 두는 것이 소위 예법이란 말인가?
내가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되 너는 한 가지도 들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고도 네 입으로 조정의 신임 받는
신하라고 하니, 대체 신임 받는 신하 꼴이 이렇단 말인가! 이 죽일 놈 같으니!“ 하고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환도를 찾아 찌르려고 드니, 이 대장은 대경실색하여 벌떡 일어나 뒷바라지를 차고 뛰어나가 갈팡질팡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허생의 집에 가 본즉 허생은 사라지고 빈 방만 남아 있었다.
참고 및 인용 :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국역 국조인물고( 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임종욱, 김해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지방 행정 단위를 기초로 하여 작성된 지리지. 예를 들어 읍을 단위로 한 지리지는 읍지(邑誌) [본문으로]
- 장인(匠人)을 낮잡아 이르는 말 [본문으로]
- 울타리를 만드는 데 쓰기 위하여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로 발처럼 엮거나 결어서 만든 물건 [본문으로]
- 오래 내버려 두어 거칠어진 밭(묵정밭) [본문으로]
- 일본 규슈(九州) 북서부에 있는 나가사키 [본문으로]
- 치패(致敗) : 살림이 아주 결딴남 [본문으로]
- 재액(災厄) : 재앙으로 인한 불운 [본문으로]
- 한꺼번에 통째로 흥정하거나 사고파는 일 [본문으로]
- 병자호란 [본문으로]
- 설분(雪憤) : 분한 마음을 풂 [본문으로]
- 조성기(1638 ~ 1689) :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몸에 고질이 생겨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방에 들어앉아 공부하기를 30년간이나 계속하여 천지만물과 우주의 이치에 통관하였다고 한다. 후에 김창흡(金昌翕)은 그의 묘지명에 “선생은 세상에 드문 호걸(豪傑)의 재주로써 고명(高明)한 학문에 완심(玩心)하여 비록 외진 시골에 살았지만 풍기(風氣)에 갇히지 않았으며, 승습(承襲)한 바가 없었으되 능히 마음으로부터 스승을 얻었으니, 대체로 천인(天人)을 합일(合一)하고 고금(古今)을 관통하여 도리와 사리를 융합(融合)하고 도덕과 법을 종해(綜該)하였다.”고 적었다. [본문으로]
- 유형원(1622 ~ 1673) : 서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2세 때에 아버지가 옥사(獄死)하였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기 시작해 20년 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 은거하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 농촌에서의 체험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경세제민(經世濟民)에 관한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을 썼다. 죽은 뒤 100년이 지나서야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왕인 영조도 관심을 가져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청(淸)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14번째 아들인 다이곤(多爾袞). 형이자 대청제국의 황제인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밑에서 중용되어 내몽고를 정벌하는데 공헌하여 예친왕(睿親王)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홍타이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티는 동안 강화도를 공격했다. [본문으로]
- 이완(李浣, 1602 ~ 1674) : 조선 중기 효종 때의 무신. 무장으로서 정치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 국방체계·군비·병력 정비에 기여하였다.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북벌정책에 핵심 무관으로 역할 하였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1650년에는 어영대장에 올랐다. 무신으로서 현달하였고 야심찬 북벌 정책을 추진했다는 특이한 성격으로 인하여 야사와 설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 나라를 위하여 드러나게 세운 공로가 있는 임금의 친척 [본문으로]
- 명나라 황실의 성씨 [본문으로]
- 중국에서 옛날에 천자(天子)가 성(姓)이 다른 제후(諸侯)에 대하여 일컫던 말 [본문으로]
- 옷, 옷차림 [본문으로]
- 전국 시대 말기 사람으로, 본래 진(秦)나라의 장군이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사형을 당하자 연(燕)나라로 달아나 연나라 태자(太子) 단(丹)에게 투항했다. 진나라 왕이 현상금으로 금 천 근과 만 가(家)의 읍(邑)을 걸고 그 목을 구했다. 자객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러 떠날 때 그의 목을 바치면서 기회를 노리겠다고 하자, 자신과 가족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본문으로]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왕. 조나라의 위치가 북방민족인 호(胡)와 가까워,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가는 과정에서, 호의 전법을 배워 호복(胡服)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도입하여 시행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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