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50살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정조가 이조판서 유언호에게 “지금 재주가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 채 불우하게 지내는 자가 누가 있는가?”고 묻자 유언호는 “신(臣)이 벼슬하기 전에 사귄 박지원이라는 자가 있사옵니다.”라고 답을 했다. 이에 정조도 “나도 오래전에 그 자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경(卿)이 책임지고 천거하도록 하라.” 해서 1786년 7월에 선공감감역에 임명되었다. 선공감(繕工監)은 공조(工曹) 소속으로 토목과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서이고 감역(監役)은 종9품(從九品)의 관직이다. 박지원이 늦은 나이에 이런 미관말직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평생의 벗인 유언호도 그런 박지원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정조에게 그를 천거했던 것이다.
박지원은 1789년 6월에 평시서 주부(注簿)로 승진한다. 평시서(平市署)는 시전(市廛)과 도량형, 그리고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고 주부(注簿)는 관부에 따라 정6품으로부터 종8품까지 품계가 다른데 평시서 주부는 종6품이다. 이후 다시 사복시 주부로 직책이 바뀌었는데 사복시(司僕寺)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서다. 이때 이서구가 승지로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서구와의 친분 관계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오해를 살까봐 취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원은 의금부 도사로 전보되었다. 의금부(義禁府)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 하던 조선시대 사법기관이고 도사는 종6품 관직이다.
▶시전(市廛) : 성읍(城邑)의 상설 점포. |
박지원이 의금부 도사로 근무하던 시절 정조가 갑자기 효창묘(孝昌墓)에 행차하는 일이 생겼다. 박지원은 의금부 도사로서 고훤랑(考喧郞)의 임무를 맡아 왕의 가마를 수행하게 되었다. 고훤(考喧)은 임금이나 왕비가 대가(大駕)로 거둥할 때 행차에 지장이 없도록 잡인들이 떠드는 것을 막고 살피는 일이고 고훤랑은 그 임무를 맡은 관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행차 중에 임금에게 격쟁하며 호소하려는 백성들이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정조가 고환랑(考喧郞)에게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알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선전관이 말을 타고 달려와 정조의 분부를 전한 뒤 박지원의 화살 하나를 뽑아 갔다. 호훤랑은 행차 때 활과 화살을 의장(儀仗)으로 갖추어야 하고 화살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가마 출발 전에야 겨우 활과 화살을 빌릴 수 있어 화살에다 미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화살을 뽑아 갔던 선전관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려와 나중에 체포하여 죄를 묻겠다는 왕의 분부를 전하고 돌아갔다. 왕의 행차가 다 끝나고 청덕궁 돈화문에 들어서자 정조는 “고훤량이 잘못을 범한 것은 오활(迂闊)한 탓이니 특별히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오활'은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이에 박지원은 죄를 짓고 왕의 용서를 받은 것이 마음이 편치 못하여 병을 핑계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효창묘(孝昌墓) :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 원래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 공원에 있었으나 1944년에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격쟁(擊錚) : 조선시대에 왕이 거둥하는 때를 기다려 징, 꽹과리[錚], 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선전관(宣傳官) :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담당하는 무관(武官)으로, 무(武)와 관련한 사안에 대하여 승지 역할을 했다. |
이후 박지원은 사헌부(司憲府) 감찰에 임명되었는데 관청의 명칭이 자신의 작은 아버지 이름 사헌(師憲)과 음이 같은 것을 꺼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릉령(齊陵令)에 임명되었다. 제릉은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태조 정비(正妃) 신의왕후의 무덤이고 능령(陵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벼슬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에 의하면 박지원은 당시 명성이 일세(一世)에 진동했으며 정조 또한 박지원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을 비쳤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차 정조가 파격적인 은총을 내릴 것으로 여겼다. 그러자 박지원을 이끌어주려는 사람도 있었고 반면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그들 모두에 대하여 담담한 태도를 취하였는데, 급기야 제릉령에 임명되자 박지원은 한가로운 곳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저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그간 주변에서 떠들어대던 말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사람들의 헐뜯는 소리가 사라진 것을 더 기뻐하였다. 또한 제릉이 연암골과 가까운 곳이라 일에서 벗어나면 연암골에 들어가 소요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박지원은 제릉령으로 근무한 지 15개월 만인 1791년에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다. 판관은 종5품 관직이다. 이조에서 말망(末望)으로 추천하였는데 정조의 낙점을 받아 지방의 한직에서 서울의 경관직(京官職)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말망(末望) : 조선 시대의 인사 추천제는 삼망(三望)이라 하여 보직 후보자로 3인을 왕에게 올리는데 제1후보를 수망(首望), 제2후보를 부망(副望), 제3후보를 말망(末望)이라 한다. 왕이 세 후보자 가운데 마땅한 사람 위에다 점을 찍어 인사를 선발하고 이를 낙점(落點)이라 한다. |
박지원이 한성부에서 근무하게 된 그 해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전국의 곡물상들이 모두 한양으로 모여들어 곡물 값이 오른 것을 이용하여 매점매석으로 큰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부자들도 역시 곡물을 사들여 쌓아두면서 곡물 값은 점점 더 폭등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곡물가격을 억제하는 한편 매점매석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임금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기 전에 관련 관청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때 박지원은 이런 의견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옛 사람이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그 흐름을 교란하지 말라고 경계한 까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상인이란 싼 곳의 물건을 가져와 비싼 곳에다 파는 존재이며, 백성과 나라는 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진실로 장사하는데 이익이 없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게 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값을 내려서 팔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명령을 시행한다면 한양의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데로 옮겨가 버릴 것입니다. 또한 매점매석을 막는다면 서울로 오던 사방의 곡물상들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는 필시 다시는 경강(京江)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의 식량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경강(京江) : 조선시대 뚝섬에서 양화 나루에 이르는 한강 일대를 이르는 말로 당시의 한강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남동 앞쪽은 한강, 동작동 앞쪽은 동작강, 원효대교 일대를 용산강, 서강대교와 양화대교 지역은 서강,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祖江)으로 나누어 불렸는데 이를 합쳐 오강(五江)이라고도 했다. |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임금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거늘 만일 온 지방의 곡물을 모두 서울에만 모아놓고 그것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면, 장차 지방의 백성들은 내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상인은 관에서 조정해서는 안 됩니다. 조종하면 물건 값이 고정되고, 물건 값이 고정되면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가격을 조절하는 시장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궁해지고 백성들은 살아갈 바탕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싼 곳의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행위는 실로 넘치는 것을 밀어내어 부족한 데다 보태주는 이치인 것입니다. 이는 비유컨대 흐르는 물 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고루 퍼져 솟은 곳도 패인 곳도 없게 됨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비록 사사로이 쌓아두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또한 비축해두는 효과가 없지 않습니다. 물가의 등락은 시세를 따르고, 쌓아두거나 내다파는 것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가령 금년에 물가를 억제하여 곡물을 모두 내다팔게 했다가 내년에 또 흉년이 들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명령은 결코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지원의 주장은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극단적인 자유 경쟁의 시장 경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시대에 조선에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박지원이 시대에 앞섰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요즘도 공무원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사람이 많은데, 까탈스러운 성격에 마음속에는 큰 뜻을 품은 박지원이 미관말직에서 5년 반을 버텼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좀 놀랍기도 하다. 가난 때문에 어떻게든 버텼으리라 짐작한다. 박지원이 어떻게 견뎠을까?
아들 박종채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는 일을 처리함에 큰 원칙이나 법도와 관련된 경우에는 한결같이 그 규정을 엄격히 지키셨으며 비록 윗사람이라 할지라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인데도 혹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청탁이 많이 들어와 말하고 상대하는 데 힘은 들면서도 일을 매듭짓기 어려운 경우에는 문득 우스갯소리를 하여 상황을 완화시킴으로써 분란을 풀곤 하였다. 그래서 그때마다 일이 해결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 또한 언짢게 여기지 않았다. 송원(松園) 김이도는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암처럼 매서운 기상과 준엄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만일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세상에 위태로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
그 해 겨울 박지원은 안의현감(安義縣監)에 임명되었다. 안의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지역이고 고을의 치소(治所)인 읍치(邑治)는 안의면 금천리,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지리산과 북쪽으로는 덕유산, 동쪽으로는 가야산에 쌓여 있는 지역이다.
박지원은 6년간이나 관직에 있었어도 워낙 박봉이라 경제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었다. 또한 나이도 점점 많아져 관직에 있을 날도 많지 않았기에 고을 원(員)으로 속히 나가야 될 처지였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참고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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