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한 해에 흉년이 들었다. 박지원은 흉년의 피해를 감영에 보고할 때 과장하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전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매번 감영에 재해를 보고하면 피해액을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사옵니다. 이제 만일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감영이 그 절반을 삭감한다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줄 수 없게 되거늘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박지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장사치나 거간꾼들이 값을 부풀려 속여 파는 술책이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삭감될 것을 염려하여 부풀려 보고했다가 만일 보고한 대로 다 승인해준다면 그 남는 것을 장차 어떡하려느냐?”
그리하여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했는데, 감영에서는 보고한 숫자대로 승인을 해주었다.
박지원은 흉년이 든 다음 해 봄에 사진(私賑)을 시행하였다. 안의현은 피해가 극심하여 공진(公賑)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한데, 박지원은 사진이든 공진이든 각기 시행상의 애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진을 택했다. 감사도 박지원으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고는 가장 심한 재해를 당한 안의현에서 사진을 시행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여러 번 말렸지만 박지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이름은 사진이지만 곡식은 이 땅에서 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백성을 구휼하거늘 어찌 공진이니 사진이니 따질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자신의 봉록(俸祿)을 덜어서 곡식을 장만하였다.
▶사진(私賑) : 흉년에 수령이 자기의 곡식을 내어서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는 일 ▶공진(公賑) : 흉년에 나라곡식인 공곡(公穀)으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일 |
구휼(救恤) 또는 진휼(賑恤)은 백성들이 흉년 등으로 곡식이 떨어지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국가에서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구제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 코로나와 관련하여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 재난생활비, 재난지원금 등이 거론되고 시행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통상적인 재난은 지방 행정기관이 자체 예산으로 복구하지만 피해 규모가 큰 경우에는 국가에서 그 지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여 재난복구 예산을 국가에서 지원한다.
조선시대 백성의 가장 큰 재난은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었고, 따라서 나라에서는 기근 정도에 따라 나라의 개입 여부를 판단하여 진휼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진휼제도는 정조 재위 초반에 제도적으로 정비가 되었는데, 국가의 환곡을 활용하여 국가가 직접 시행하는 공진(公賑)과 지방 수령이 비축한 자비곡(自備穀)이나 개인 소유의 곡식을 활용하는 사진(私賑)으로 대별된다. 진휼은 환곡의 분급과는 달리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그 범위가 넓을수록 나라나 지방 관청의 재정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근이 심한 지역에만 국가가 개입하여 공진(公賑)을 시행했고, 그보다 덜한 지역에서는 지방 재정 등을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사진(私賑)을 시행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정조실록》정조 2년 5월 5일에는 ‘경기(京畿)·호서(湖西)·영남(嶺南)·관동(關東) 4도(道)의 진제(賑濟)를 정월부터 시작하여 설시하다가 이에 이르러 진휼(賑恤)을 마쳤다.’는 기사가 있다. 기사에 따르면 62개 고을과 진(鎭)에 공진이 시행되었는데 기민(饑民) 총수는 107,622구(口)이고 진곡(賑穀)은 41,005석이 소요되었다.
진휼은 한 달에 세 번 10일 간격으로 시행되는데, 통상 장년 남성에게는 쌀 5되, 장년 노년 여성에게는 4되, 기타의 경우에는 3되씩을 지급하고 곡물 외에 형편에 따라 죽이나 소금, 장, 미역 등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제도가 이런데도 박지원이 굳이 사진을 고집한 것은 박지원의 결벽증에 가까운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굳이 어려운 나라 살림을 축내기 보다는 자신의 봉록을 깎아 시행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때 박지원은 관아에 구휼하는 곳을 마련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었다. 박지원은 백성을 구휼하는 중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죽을 나누어주기 전에 염치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도가 바로 서지 않고서는 위아래가 뒤죽박죽이 되거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박지원은 먼저 뜰에다 금을 그은 다음 거기에 모래를 채워 위계(位階)를 표시하고 방위에 따라 거적을 깔아 동리(洞里)를 구분하였다. 또한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의 자리를 달리하였으며 양반은 앞에 앉고 백성은 뒤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은 동헌에 나와 앉아 먼저 죽 한 그릇을 들었는데,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쓰는 것과 똑같은 그릇에 먹고 소반이나 상도 차리지 않았다. 박지원은 죽을 남김없이 다 먹고는 “이것은 주인의 예(禮)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뒤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주고 곡식을 분배하였는데 일을 엄숙하게 진행하여 소란스럽지가 않았다. 양반과 백성 가운데 조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구휼하는 곳이 이렇기만 하다면야 우리가 구휼 받는 데 대해 무슨 부끄러움을 느끼겠나!” 라고 했다 한다.
박지원이 행한 구휼의 절차를 읽고도 지금 우리는 별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이런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무엇이 특별한 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시 다른 고을의 구휼 상황은 어땠을까? 안의현에 구휼이 시행되고 난 뒤 이웃 고을인 단성현(丹城縣) 현감이 보내온 편지에, 박지원이 답장으로 진정(賑政)을 논하여 보낸 글에는 다른 고을의 진휼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울러 왜 구휼하는 데 예(禮)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박지원은 자세하면서도 강경하게 논박했다.
▶단성현(丹城縣) : 경상남도 산청 지역의 옛 지명. 단계현(丹溪縣)과 강성현(江城縣)을 합쳐 이루어진 현으로 안의현에 바로 이웃한 위치였다 ▶진정(賑政) : 진휼(賑恤)에 관한 정사(政事) |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봄날이 쌀쌀한데 정무에 분망하신 몸이 더욱 안중하시다니 우러르고 그리던 마음이 매우 흐뭇합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편지에 “예(禮)라 예라 이르지만, 기민 구제를 이른 것이겠는가?(禮云禮云 賑民云乎哉)”라는 대목이 있으니, 말이 어긋날뿐더러 생각지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지난번에 갈 길이 바빠서 긴 이야기는 못 하고, 다만 예(禮)를 진정(賑政)에 적용할만하다고 했습니다. 말이 비록 두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 짐작이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을뿐더러 갑자기 한꺼번에 끄집어내었으니 그대는 본래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해괴하게 듣고는 도리어 그 말을 구실로 삼아 나를 오활하고 괴벽스러워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웃었습니다. 오활한 점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마음에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약 ‘기민 구제가 예(禮)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르신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아! 군자가 정치를 하면 어디에 가도 ‘예’ 아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진정은 국가를 다스리는 큰 경사요 많은 목숨이 매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운한(雲漢)」을 상고해도 관련 예의를 상고할 길 없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희락한 데 비해 비참한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운한(雲漢) :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의 노래 이름.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앙)로 인하여 하늘에 빌자, 백성들이 그 덕을 기리는 노래. ▶향음주례(鄕飮酒禮) : 조선시대 향촌의 선비와 유생(儒生)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예(禮)로써 주연(酒宴)을 함께 즐기는 향촌의례(鄕村儀禮) |
그러나 군사를 먹이는 것을 ‘호(犒)’라 하고 노인에게 잔치 베푸는 것을 ‘양(養)’이라 하여 모두가 의식(儀式)이 있으니, 백성이 주리다 못해 달려들면 그 빈궁을 구해주는 것을 진휼(賑恤)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에만 규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온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서 먹이기로 하면 ‘호’와 같고, ‘양’이라는 점에서는 잔치와도 같은데, 남녀가 섞여 앉고 어른 아이가 자리를 다투니 어찌 이렇게 분별이 없고 질서가 없습니까?
지난번에 이러고저러고 말한 것은 주린 백성에게 읍양(揖讓)을 행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휼하는 마당에서 여수(旅酬)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쪽박으로 조두(俎豆)를 익히자는 말도 아니요,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하(肆夏)에 맞추어 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섭자(攝齊)를 힘쓰라는 것도 아니요, 부황 난 사람에게 유철(流歠)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읍양(揖讓) : 읍하여 겸손한 뜻을 표시함 ▶여수(旅酬) : 제사에서 술을 올리는 예식이 끝난 뒤, 손님들이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술잔을 받는 것 ▶조두(俎豆) : 제사(祭祀) 때 쓰는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종류 ▶사하(肆夏) : 주나라 때의 궁중음악인 구하(九夏)의 하나로, 행진곡처럼 걸음걸이의 절도를 이루는 음악 ▶섭자(攝齊) : 당(堂)에 오를 때 옷자락을 끌어당겨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함과 동시에 상대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예법 ▶유철(流歠)하지 말라 : 「예기」에 나오는 식사 예법으로, 죽이나 국물을 단번에 후루룩 들이키지 말라는 뜻 |
대개 예의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는 것이요, 법률이란 일이 생긴 뒤에 금하자는 것인데, 각 기민들이 얼굴빛은 부어터지고 의복은 남루하여 바른손에는 쪽박을 들고 왼손에는 전대를 들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으로 허리 굽혀 관청에 나아오고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지난번 진주(晉州)를 가는 길에 귀하의 고을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진휼하는 날이라 수천 수백 명의 주린 백성들이 문 부근에 모여들었는데, 관아의 문은 안으로 닫히고 문지기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통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뭇 사내 뭇 계집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애를 이끌고, 혹은 관문을 두들기며 크게 외치기도 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외모를 보면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형상이었으나 그 뜻을 살피면 모두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둠을 믿고 당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찮은 교졸(校卒)이 와서 뭇 백성에게 타이르기를, “새벽부터 죽을 끓이는데 솥은 크고 쌀은 많고 하여 무르익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우선 잠깐만 기다려 주면 곧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군중이 성을 내며 일제히 일어나 떼로 덤벼들어 그 교졸을 두드려 패어 옷을 찢고 갓을 부수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수염을 뽑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한 사람은 갑자기 제 코를 쳐서 피를 내어 낯에 바르고 큰소리로 ”사람 죽인다!“ 외치니 뭇 백성들이 모두 함께 외치기를, ”아전이 주린 백성을 친다!“ 하였습니다.
▶교졸(校卒) : 군교(軍校)와 나졸(羅卒)을 합쳐서 부르는 말 |
저들이 비록 사정이 급하여 진휼을 받자고 문 열기를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그 야료 꾸미는 것을 보면 이만저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에 손님(연암 자신을 가리킴)을 맞기 위하여 문이 드디어 열리자 군중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관청에 밀어닥쳤으며, 이어서 음식을 제공하니 그 시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날 광경은 문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대는 듣도 보도 못 했을 것입니다. 피차 인사를 차린 뒤에, 그대가 먼저 아까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
“백성들 사는 곳이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므로 여기 오는 것도 선후가 있어서, 먼저 온 자는 부엌을 에워싸고 불을 쪼이며 끓이는 죽이 절반도 안 되어서 뭇 쪽박으로 지레 휘저어 대니 온 솥이 무너질 지경이므로, 부득불 문을 잠그고 백성을 못 들어오게 하여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지 감히 손님을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여, 마침내 주인과 손님이 서로 한바탕 웃었지요. 그런데 아까 목도한 광경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 비단 이야기가 장황한 데다 좌중에 진정을 감찰하는 감영의 비장(裨將)이 있어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까지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굶주린 백성은 비유컨대 오랜 병에 시달린 아이와 같아서,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 부모 된 자는 아무쪼록 잘 타일러서 그 뜻을 순순히 받아 줄 따름이지, 어찌 그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를 평소와 같이 할 수야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장(裨將) : 조선시대 감사·절도사 등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무관 벼슬의 막료(幕僚) |
공자는 말씀하기를, “정령(政令)으로 이끌고 형법으로써 단속하면 백성은 죄를 면하기는 하나 염치가 없어지고, 도덕으로써 이끌고 예의로써 단속하면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률로 백성을 이기기보다 차라리 예의로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하겠으니, 왜 그렇겠습니까? 법률로 강요하자면 형벌과 위엄이 뒤를 따르게 되고, 예의를 사용하게 되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앞을 서게 됩니다. 백성 중에 만약 위엄과 형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법률을 무서워하는 자에게는 이길 수가 있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도리어 지게 되는 것인데, 더더구나 주림을 빙자하고서 마구 대드는 자에게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정령(政令) : 나라를 다스리는 목적으로 내려진 명령 |
무릇 인지상정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보다 더함이 없고, 잠시 동안은 한 사발 국물에도 염치를 차리는 법입니다. 이래서 내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혐의를 사지 않게 남녀를 가르고 어른 아이의 순서에 따라 줄을 만들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명분을 구별하여, 질서 정연하게 서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있는 힘을 다해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이 제 본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섭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못하고, 억눌러 이기는 것은 순순히 굴복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른바 ‘죄는 면하되 염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김을 두고 이름이요,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굴복시킴을 두고 이름입니다.
지금 영남은 온 도(道)가 불행히도 대흉년을 만나서 대대적인 진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을 수령 된 자는 힘을 다해 곡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가려 뽑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백성을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조정의 성대한 마음을 본받고 우리 임금의 근심 걱정하시는 마음의 만의 하나나마 보답하려 아니 하겠습니까! 더더구나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벌주는 일이 이 한 번의 거행에 달렸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독려하다 보면, 명예를 구하는 겉치레로 돌아가기도 쉽고, 위로하고 구호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도리어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을 부르게 됩니다.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 달렸으니 : 공진을 마치면 그 내용을 기록하여 장계(狀啓)로 보고하도록 되어있고, 진휼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수령에게는 포상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
그리고 공진이든 사진이든 뒷날에 계속하기 어려움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공이 되든 죄가 되든 대부분 목전의 미봉책만 힘씁니다. 준비한 곡물도 많고 구제한 민중도 많으며 모든 진정에서 잘못한 고을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두려운 것은 진정을 철회한 뒤입니다. 겨우 연명해 가던 남은 목숨을 무슨 수로 구제하며, 은례만 바라고 사는 안이한 풍속을 장차 무슨 법률로 억누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한 예의란 것은 통상적인 진휼 방식을 버리고 별도로 다른 법식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 주는 속에서도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나눠 주고 먹여 주기 전에 먼저 그 염치부터 길러서, 반드시 남녀는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 아이는 자리를 따로 하고 사족은 앞에 앉히고 서민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하여 각각 제자리를 찾고 서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 되면 죽을 나눠 줄 때 남자는 왼편으로 여자는 바른편으로 되어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질서 정연할 것이며, 늙은이는 앞서고 젊은이는 뒤로 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양하게 될 것이며, 곡식을 나눠줄 때에 앞에 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해서 시세우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가 차례를 기다려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저 예의란 것이요 기민(饑民) 구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연암집』중 <진정에 대해 단성현감 이후에게 답함, 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
▶대체(大體) : 천부적인 도덕성. ▶단성현감 이후(李侯) : 후(侯)는 이름이 아니고 공(公)과 같은 명칭. 단성현감의 이름은 이영조(李榮祚) |
박지원이 왜 세상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편지다. 이 편지를 받은 단성현감은 박지원이 말한 ‘구휼의 예’에 대해 이해야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일장 훈계를 들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려다 설파한 ‘법 대신에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이끌어 염치를 알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시민의식을 고취시켜 성숙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니 유학적이면서도 또한 얼마나 민주적인 발상인가! 이것이 아마도 ’소소한 은혜 대신 큰 은덕‘을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아야 한다는 박지원의 본뜻이었을 것이다.
박지원이 진정(賑政)에 대하여 쓴 또 다른 글이 있다. 대구 판관 이단형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신(答丹大邱判官李侯端亨論賑政書)이다. 이단형이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지쳐 근심하고 고민하는 편지를 보내자 박지원은 이렇게 그를 위로했다.
“내 신세를 돌이켜 보건대 50년 동안 겨우 끼니를 때우고 쌀독도 자주 비어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주제에, 임금님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갑자기 부자 영감이 되어, 뜰에다 수십 개의 큰 가마솥을 벌여놓고 1,400여 명의 못 먹어 부황 들어 쓰러져 가는 동포들을 불러다가 한 달에 세 번씩 먹이는 즐거움을 실컷 누리니, 즐거움치고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어디 있겠소?”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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