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27 - 이용후생(利用厚生)

從心所欲 2020. 5. 7. 11:50

박지원은 수령으로 있으면서 소송을 심리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 언성을 높이거나 성을 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판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인륜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유독 엄중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가 재산문제로 다투거나, 남의 아내를 간음한 일 등에 대해서는 보통보다 더 엄격히 다스렸다. 또한 죄를 지은 자가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타이르고 깨우쳐주었다.

박지원은 아랫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득이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그 맞은 곳을 주물러 열을 풀어주게 하면서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

 

박지원 휘하의 종 하나가 술만 마시면 주정을 부리며 몹시 무례하게 구는 탓에 그 동료들이 멀리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그가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박지원은 그를 동헌 앞의 작은 방에 가두어놓고 매일 몇 켤레씩 짚신을 삼게 하였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면서 달포를 보낸 뒤 그를 놓아주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 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실을 고쳐 건실한 사람이 되어 미친 듯이 날뛰던 버릇이 싹 사라졌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이상히 여겨 박지원에게 그 연유를 묻자 박지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을 보니 본래 악한 성품은 아닌데 오래 떠돌아다녀 마음을 붙들어매지 못해 그런 것으로 여겨지더군요. 내가 그놈더러 짚신을 삼게 한 것은 일에 마음을 붙여 자연스레 마음이 단속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또 읍에 사는 한 평민이 늘 사람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술과 음식을 빼앗기를 밥 먹듯이 하며 매일 싸움질을 했다. 어쩌다 관아에 끌려와 벌을 받으면 더욱 심하게 성질을 부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아전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엉금엉금 기면서 관아에 들어왔는데 손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쥐고 있었다. 그는 박지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아무개가 이 몽둥이를 갖고 소인을 때려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박지원은 웃으면서 “얼른 각수장이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수장이에게 시켜 그 몽둥이에다 이런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

 

오호라, 이 큰 몽둥이 그 누가 만들었나?

주정과 행패 너에게서 나왔으니 너에게로 돌아가야지.

이 이치는 피할 길 없으니 상해죄(傷害罪)로 다스릴 일.

이 몽둥이 걸어두세 저 마을 문 곁에다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함께 이 몽둥이로 때려주세.

사또가 이를 허락함을 이 글로 증명한다.

 

이것을 보고 아전도 웃고 물러갔다. 행패를 부리던 아무개도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다시는 야료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각수(刻手)장이 : 나무나 돌 따위에 조각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마을 문 : 예전에 마을 입구인 동구(洞口)에 세웠던 높은 문

 

[편찬연대와·제작자가 미상인 조선시대 종합 지도책인 여지도(輿地圖) 속의 안의현, 남강천은 당시 동천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위(衛)로 표시된 곳이 안의현 관아의 위치]

 

안의 읍내에는 본래 좀도둑이 많았다. 하루는 내아(內衙)에 도둑이 들었다. 그러자 박지원은 급히 이렇게 분부하였다.

“군기고(軍器庫)의 마름쇠를 가져오너라.”

또한 “대장장이로 하여금 마름쇠를 많이 만들어 들여보내도록 하라.”라고도 분부하였다.

마름쇠를 가져오자 집안사람들은 그것을 담장 밑에 쭉 깔자고 했다. 그러자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꼭 깔 것까지는 없다. 도둑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때부터 관아 부근에는 좀도둑이 싹 사라졌다고 한다.

▶내아(內衙) : 조선 시대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안채

▶마름쇠 : 도둑이나 적(敵)을 막기 위하여 뿌려놓는 마름모양의 무쇠덩이

 

[여러가지 형태의 마름쇠]

 

박지원이 안의현을 다스리던 때에 매번 장시(場市)에서 도둑을 정탐하여 나타나는 대로 현장에서 체포하면, 그때마다 꼭 토포영(討捕營)의 장교와 나졸들이 출현하였다. 저들은 도둑과 함께 다니면서 도둑으로 하여금 재물을 훔치게 하고는 훔친 물건으로 얻은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도둑을 잡는 일을 전담하는 자들이 오히려 도둑들과 짜고 농간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다 도둑이 잡힐 경우에는 관아에다 자신들이 마침 이곳을 지나던 길이라고 둘러대고는 그 도둑을 데려가 풀어주었다. 그래서 도둑들이 마음대로 날뛰면서 겁을 내지 않았다.

박지원이 부임한 초기에 세 번 도둑을 잡았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토포영 장교와 나졸들이 나타났다. 박지원은 그들의 하는 짓을 간파하고는 잡은 도둑을 장교와 나졸들에게 내주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또한 토포영에도 이렇게 공문을 보냈다.

“우리가 도둑을 잡았을 때 그쪽의 장교와 나졸이 나타나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들 또한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함께 다스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자 안의현에는 도둑이 사라져 밤에도 문을 닫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다.

▶장시(場市) : 조선시대 후기 지방에서 열렸던 사설 정기 시장

▶토포영(討捕營) : 인조 때부터 전국의 내륙지방에 산적, 화적을 포함한 도적과 반란세력을 수색, 체포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영(軍營).

 

함양군은 안의현에서 40리 거리였다. 그런데 함양 읍내 부근의 지형이 낮아서 여름 장마를 한번 겪으면 둑이 터져 해마다 둑을 다시 쌓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이웃 고을의 장정들까지 함께 징발이 되어 동원되었다. 가서 먹을 식량을 싸들고 오게 하면서 일을 시켰지만 인력을 제대로 통솔하지도 못하고 일하고 쉬는 것을 알아서 하게 맡겨두는 바람에 여러 날이 지나도 일에 진척이 없었다.

박지원의 부임 초기에 또다시 둑 쌓는 일이 생겨 안의현에서 5백여 명을 징발해야 했다. 그러자 박지원은 사전에 장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오(隊伍)가 없으면 힘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또 각자 식량을 준비하게 하면 어떤 사람은 배불리 먹고 어떤 사람을 굶주리게 된다. 둑 쌓는 일이 지체되고 쌓은 둑이 견고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는 각자 종이를 바른 작은 대나무 조각을 몸에 꽂게 하여 자신이 속한 대오의 표시로 삼게 하고는 다섯이면 다섯, 열이면 열씩 대오를 갖추게 하였다. 박지원은 대열의 맨 뒤에 참여하여 현장까지 직접 따라가서는 함양군수와 이렇게 약속했다.

“이 고을 저 고을 장정들이 서로 뒤섞여 함께 일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간하기 어렵소이다. 그러니 서로 구역을 나누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우리 고을 장정들에게 맡겨주시오. 그리하여 그 담당한 구역의 둑이 온전한가 무너지는가를 보아서 만일 무너진다면 한 해에 열 번 부역해도 원망하지 않겠소만, 만일 온전하다면 1백년이 지나더라도 다시 우리 장정들을 동원하지 말기 바라오.”

그리고는 관아의 주방에서 식량을 날라와 열 사람에 한 솥씩 배치하게 하였다. 또한 아전과 장교들을 여기저기 분산시켜 밥 먹이는 일을 주관하게 하는 한편, 북을 치며 큰소리로 일을 독려하게 하였다.

모든 장정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흙과 돌이 순식간에 쌓였고 이에 힘써 달구질을 하고 발로 다지자 아침 6시경 시작하여 오후 4시쯤이 되자 공사가 모두 끝났다. 그러자 안의현 장정들은 “매번 이 일에 동원될 때마다 배고프고 목이 탔으며, 닷새나 엿새가 지나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근데 오늘 공사는 어찌 이리도 빨리 끝났지?” 하며 서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이 안의현에 있던 5년 동안 다시는 이 일로 부역하는 일이 없었다.

 

1794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양반과 서민 가운데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 모두 그 신분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의 품계를 하사하려고 전국에 해당자들을 찾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안의현에서도 70세부터 91세까지의 노인 50여 명을 보고하여 모두 품계를 하사받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 품계 중 하계(下階)

▶통정대부(通政大夫) : 정3품 품계 중 상계(上階)

 

이에 박지원은 아전들을 불러 “임금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가 이러하니 그에 보답하는 행사가 있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날을 정해 품계를 하사받은 노인들로 하여금 일제히 모이게 하면서 아들, 사위, 손자, 증손자 등을 모두 데리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 관아의 주방에 명령하여 미리 잔치 음식을 장만하게 하고, 또한 노인들의 숫자만큼 대나무를 베어다가 꽃, 새, 풀, 나비 등의 그림을 인두로 새겨 넣은 지팡이도 만들어 놓았다.

당일에 박지원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여러 노인들과 함께 객사(客舍)로 향했는데 박지원의 뒤를 따르는 어른과 아이들이 수백 명이나 되어 길거리가 꽉 메워졌다. 객사에 이르러 전패(殿牌)를 향해 사은숙배(謝恩肅拜)의 예를 올린 뒤 박지원은 노인들을 거느리고 다시 관아로 돌아왔다.

동헌 앞뜰에 널따란 차일을 펴고 박지원은 공복 차림으로 주인 자리에 앉고 노인들도 차례로 착석하였으며 따라온 사람들 역시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박지원은 꿇어앉아 소매를 높이 들어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말한 다음 다시 몸을 굽혀 머리를 조아려 조정에서 내린 명령에 공경의 뜻을 표하였다. 이에 듣는 사람 대부분이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어 잔치를 베풀고 술을 내오게 하고 음악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기생들은 춤을 추었다. 이런 성대한 행사는 안의현에서는 처음 있는 것으로 관아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잔치가 끝난 후 노인들에게는 지팡이를 하나씩 선물하였는데, 이는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으로서 국가의 일 때문에 퇴직시킬 수 없는 자에게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는 궤장제도를 본받아 행한 것이다.

▶공복(公服) : 관원(官員)이 조정(朝廷)에 나아갈 때 입는 관복(冠服).

▶객사(客舍) :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 여기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로인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편, 객사는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사은숙배(謝恩肅拜) : 관료로 처음 임명된 자가 대전, 왕비전, 세자궁에 가서 국궁사배(鞠躬四拜)하여 왕은(王恩)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 승진하거나 재로운 직(職)에 발령을 받은 경우, 출장이나 휴가를 가거나 돌아왔을 때에는 임금에게만 사은숙배하였다.

 

[ 개성에서 열린 노인잔치를 그린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 中 부분]

 

박지원은 북경에 갔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들의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구들을 자세히 살폈었다. 귀국 후에 돌아와 그런 기구들을 만들어 조선에도 통용시키고 싶어 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막상 시도해보지는 못하였다.

선공감에 근무할 때 선공감 제조(提調)였던 호조판서가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 계단을 쌓는 일에 대하여 박지원에게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다. “전좌(殿座)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보조계단을 설치하느라 돈과 힘이 낭비되고 있소이다. 만일 대(臺)를 쌓는다면 경비는 얼마나 들겠소? 또 그 형태는 어떠해야 하겠소?”

이에 박지원은 “벽돌을 구워 대를 쌓는다면 열 번쯤 보조계단을 설치하는 비용은 들겠으나, 견고하고 영구적이므로 장차 보조계단을 설치하고 철거하는 비용을 완전히 없앨 수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호조판서 서유린은 박지원의 의견을 정조에게 아뢰었고, 정조는 와서(瓦署)에 벽돌 굽는 가마를 설치하여 박지원의 재량껏 벽돌을 굽게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박지원은 중국의 제도에 의거해 가마를 제작하여 몇 십만 개의 벽돌을 구워냈는데 비용이 많이 절감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에 일이 생겨 춘당대에 대를 쌓지는 목하고 벽돌은 다른 데 사용되었다. 박종채는 후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벽돌만으로 성을 쌓은 것은 박지원의 방법을 따라 진행된 것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안의현에서 벽돌을 구워 관아 안에다 정자를 짓고 담을 쌓기도 하였다. 또한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들을 가려 뽑아 양선(颺扇), 베틀,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를 제조케 하여 시험해보았다. 그 결과 힘은 적게 들이고도 일을 빨리 할 수 있어 수십 명이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알았지만, 이 기구들을 본떠 만드는 사람들이 없어 결국 국내에서는 통용되지 못했다.

▶전좌(殿座) : 신하들이 임금에게 하례하는 예식 때 임금이 옥좌(玉座)에 나와 앉는 것

▶와서(瓦署) : 조선시대 궁궐을 조성하는 데 소용되는 기와·벽돌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로 현재의 서울 용산에 있었다.

▶양선(颺扇) :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에 섞인 검불이나 티끌을 날리는데 쓰는 농기구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 : 논에 물을 대는 관개용 수차(水車)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