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26 - 의옥(疑獄) 심리

從心所欲 2020. 5. 5. 16:50

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하였을 때의 경상 감사는 정대용(鄭大容, 1749 ~ 1805)이었다. 정대용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직각을 거쳐, 1787년에는 영남좌도어사, 이듬해는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었으며, 1791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 박지원의 명성에 감복해하던 인물로, 박지원이 부임 인사차 감영에 들리자, 직접 객사(客舍)에 찾아와 박지원과 밤새 담소를 나누었다. 정대용은 박지원보다 나이가 12살 어렸지만 관찰사인 그의 품계는 종2품이었고 현감인 박지원의 품계는 종6품이었다.

 

당시 도내(道內)에는 죄상이 복잡하여 쉽게 판정하기 어려워서 해가 지나도록 종결이 안 된 범죄 사건들이 여럿 있었는데 정대용은 박지원에게 이 사건들을 모두 판결하여 억울한 사람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라고 간곡한 청을 곁들인 명을 내렸다. 이에 박지원은 감영에 며칠 머물면서 무려 1백여 건에 달하는 사건을 심리(審理)하여 판결을 바로잡았다. 『연암집』에는 박지원이 이런 의옥(疑獄)에 대한 심리결과를 감사에게 보낸 보고서들이 실려 있다.

 

중국 송(宋)나라 때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여 포청천(包靑天)으로 명성을 드높였던 포증(包拯)과 비교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TV드라마로 보는 포청천은 남송(南宋)과 금(金)나라 때부터 그를 주인공 삼아 나오기 시작한 문학작품과 수백 권으로 된 명나라 때의 소설, 청나라 때 쓰여진 장편소설 등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다. 또한 포청천이 생전에 이름이 높았던 것은 뛰어난 수사기법이 아니라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판결과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때문이었다. 박지원의 의옥(疑獄)에 대함 검토 보고서는 적어도 지금 언론에 보도되는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재판 결과들보다는 훨씬 더 상식적이고 공감이 간다.

아래의 몇 사례만 보아도 박지원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여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합리적 논리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의옥(疑獄) : 사정이 복잡하여 진상(眞相)이 확실하지 않은 재판 사건

 

경상 현풍현에 유복재(兪福才)라는 사람이 술주정을 하자 김복련과 그 아들 삭손(朔孫)이 함께 발로 차고 때려 유복재가 4일 만에 죽은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죽였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아버지가 죽였다고 진술이 바뀌어 주범을 확정하지 못한 옥안(獄案)인데 이에 대하여 박지원이 심리한 결과는 이랬다.

 

<현풍현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答巡使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이 유복재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김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순찰사(巡察使) : 각 도(道)의 군비 태세를 살피는 직책으로, 통상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였던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겸직하였다.
▶뇌후(腦後) : 정수리의 숨구멍 자리인 백회의 뒤쪽
▶인후(咽喉) : 목구멍
▶양과(兩胯) : 두 넓적다리 사이 부분, 회음(會陰)
▶시장(屍帳) : 시체(屍體)를 검안(檢案)한 기록
▶정범(正犯) : 두 사람 이상이 저지른 범죄에서 범죄 행위를 실행한 사람. 주범
▶초검(初檢), 복검(覆檢) : 조선시대 사체의 제1차, 제2차 검시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하더라도 윤리는 있는 법입니다. 부자간에 서로 그 죄를 주장하니 과연 어떤 이유겠습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 된 자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이 난 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면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할지언정, 부자가 죽음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느긋하게 있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령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낼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난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주범이 뒤바뀐 것은 풍속의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 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공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 : 「예기」에 증자(曾子)가 제자에게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신 유체(遺體)이니 부모의 유체를 움직임에 어찌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행동거지를 장중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관직에 나아가 신중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붕우 사이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싸움터에 나아가 용맹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불반병(不反兵)의 원수 : 불반병은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는다’는 뜻. 「예기」에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고 반드시 죽이며, 형제의 원수는 집으로 돌아가 병기를 찾지 않으며...”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언제나 몸에 병기를 지니고 있다가 원수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의미.

 

 

<밀양 김귀삼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答巡使密陽金貴三疑獄書>

예로부터 의옥(疑獄)이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밀양 사람 김귀삼이 그 사위 왕장손을 치사케 했다는 사건은 의혹이 극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초검에서는 실인(實因)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하였고, 복검에서의 실인도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했는데, 이번의 삼검(三檢)에서는 갑자기 강요당했다는 뜻의 ’피핍(被逼)‘ 두 글자를 덧붙여 실인을 삼았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별다른 본 것이 있어서 이 같은 단안을 내린 것입니까?

대저 이 옥사는 이미 세 차례 검험(檢驗)을 거쳤으나 내내 어림짐작이어서, 상처 난 자국의 치수에 가감된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 조차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제 와서 논단하면서 검안(檢案)에 자상하고 소락함이 심하게 차이 난다 하여 초검과 복검을 모조리 의심하고 삼검에만 무게를 두어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실인(實因) : 살해(殺害)된 사람의 사망 원인.
▶피핍(被逼) : 강요당하다.
▶검험(檢驗) :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담당 관원이 시체를 검증하고 검안서를 작성하던 제도
▶활투두(活套頭), 사투두(死套頭) : 투두는 자살할 때 목을 매는 올가미. 활투두는 고를 늦추었다 죄였다 할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사투두는 고가 움직이지 않아 그대로 죽게 될 수밖에 없는 올가미다.

 

대개 장손이 목을 맨 것은 딴 여자를 얻어 들인 데서 발단하였고, 소를 두고 다툰 데서 결과한 것이니 저 길 가는 사람이 사연을 듣더라도 당연히 그 장인에게 의심을 많이 둘 것입니다. 하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검관(檢官)의 도리로서 혹시 숨은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캐보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에 목매달아 죽은 나무에 대하여 가까운 곳을 피하고 먼 곳을 대는 등 진술이 여러 번 뒤바뀌니, 묵은 의심 새 의심이 무진무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삼검의 실인에 있어 갑자기 ‘피핍’이란 단안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말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긴요하고 무게 있는 말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면 이렇다 할 형적이 없는 것입니다. 혹 뜻밖에 의심을 받거나 일이 당초 마음먹은 것과 어긋날 경우에, 빈정대는 것도 아니요 나무라는 것도 아니나 오는 말이 가시가 돋쳐,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타서 더더욱 답답하고 원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쓰라리고 괴로운 심정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마는, 조급하고 경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살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것은 왕왕 이와 같은 것으로서, 원인이야 비록 남 때문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시행한 것이니, 지금 비록 ‘피핍’이란 두 글자를 덧붙인다 해도 옥사의 진상에는 별로 가중될 것이 없습니다.

▶검관(檢官) : 조선시대 변사자의 시체를 검사하던 관원

 

이제 의심 갈 만한 자취를 들어 용서할 만한 정상을 참작해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일찍이 눈 부라리고 말다툼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소 찾는 일로 인하여 어찌 암암리에 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의복을 망가뜨리고 문기(文記)를 찢어버린 것을 보면 비록 정을 아예 끊어 버린 듯도 하지만, 상놈들이란 분이 나면 들이받고 치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인지라 조금 지나 술을 받아 함께 취토록 마시고 한 이불 속에 자고 나면 묵은 감정은 하마 풀리고 옛정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졸지에 스스로 목매달았다는 것은 실로 상정(常情)이 아닌 것입니다.

▶문기(文記) : 땅이나 집 또는 그 밖의 권리(權利)를 증명하는 문서
▶상정(常情) :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통의 인정(人情)

 

대저 장손의 자결은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 사들일 논 값은 얼마이며, 전에 기르던 소 값은 얼마인가, 딴 여자에게 장가가던 첫날밤부터 온갖 계획이 이 소 한 마리에 달려 있었는데, 급기야 소를 찾으러 와서는 비단 당초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한한 비웃음과 꾸지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빼기 어렵다’는 격이라, 분김에 멍청한 꾀를 내어 죽어 버리겠다는 말로 남을 위협하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농지거리한 것이 마침내 참말로 되어 버린 것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남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써 딴 여자를 보았으나 소까지 몰고 이 집을 아주 떠난다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니었으며, 전에 살던 곳을 잊기가 어려워 옛집을 다시 찾아갔으나 두루 질책만 쏟아져 몸 둘 곳이 없었으며, 옛날을 그리는 정은 심중에 간절했지만 성깔 사납고 투정 많은 계집은 돌아보는 척도 않아서 한밤중에 서성대고 기다려도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영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는 격이어서, 떠나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원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술김에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또한 정세를 들어 말하더라도 귀삼은 늙고 잔약한 몸이오, 장손은 힘있는 장정이니, 설사 귀삼이 정말로 몰래 해칠 계획을 지녔더라도 장손이 어찌 남에게 제 목을 매라고 내맡기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며 그대로 얽어 매였겠습니까? 설혹 늑살(勒殺)이라 한다면 어찌하여 빨리 구렁에 밀어 넣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죽은 자의 친척에게 급급히 통부(通訃)를 했겠으며, 기필코 검험하고 말 관가에 허둥지둥 알리어 자진해서 원범이 되어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갔겠습니까? 통탄할 바는 목매단 장소를 끝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아니하여 옥사의 진상에 의혹을 자아내게 한 것인데, 오직 이 어리석은 백성이 헛되이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를 내어 이와 같이 어물어물한 것이요, 장손이 제 손으로 목매어 제가 죽은 것만은 매한가지입니다. 등유목(燈油木)에 목을 매었건 도리목(都里木)에 목을 매었건 간에 그 죄에는 그다지 경중의 차이가 있지 않은 것인데, 즉시 장소를 바른대로 대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을 따져 보면 비록 교활하고 흉악한 듯하나, 그 정상을 헤라여 보면 그다지 괴이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직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진실로 옥사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늑살(勒殺) : 목을 졸라 억지로 죽임
▶통부(通訃) : 사람의 죽음을 알림
▶사중구생(死中求生) : 죽을 상황에서 살 길을 찾음

 

 

<함양 장수원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答巡使咸陽張水元疑獄書>

함양 사람 장수원이 한조롱(韓鳥籠)이란 계집을 치사한 사건에 대해 초검과 복검이 모두 스스로 물에 빠진 것으로 실인을 삼았으나, 조사를 반복하여 살펴보고 그 정실을 짐작해 보면, 조룡이 수원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는 처지라 비록 몹시 부끄럽고 분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형편이 너무나 궁하여 어디 갈 곳조차 없는지라 저 맑고 깨끗한 못만이 그녀의 몸을 깨끗이 보존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비록 수원이 드잡이하여 밀어 넣은 것은 아리라 하더라도, 순결을 지키는 처녀로 하여금 이렇게 못에 빠져 죽는 원한을 품게 만든 것이 그놈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그 정상을 추궁해 가면 그놈이 어떻게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 진술에서 그 말이 여러 번 변했으니 이는 교활하고 완악한 습성이 그 강포한 자취를 은폐하려는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겠으며, 제 놈이 끌고가지 않았으면 조룡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뽑힌 머리카락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습니까. 이 한 줌의 머리카락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를 잡다가 유혹하고, 길쌈을 하다 말고 유혹했다‘거나 ’호미를 전해 주러왔다가 싸우고, 버선을 잃어버려 싸웠다‘고 한 진술들은 이 옥사에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원이 강포한 짓을 한 증거들은 오직 이 머리털이요, 조롱이 죽도록 항거한 자취도 오직 이 머리털이니, 몸은 비록 골백번 으깨지더라도, 이 머리털이 남아있는 이상 보잘것없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도 옥사의 전체를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하는 자리에서 형식만을 가지고 따져, 죽게 된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상대에게는 그저 위협과 핍박을 한 죄율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로써 판결을 끝낸다면 어찌 죽은 자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을 참작하고 헤아려 보면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마침내 너무도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듯합니다.

 

[조선 말기의 태형장면, 일제가 조선풍속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엽서 속의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밀양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答巡使密陽疑獄書>

밀양부(密陽府) 통인(通引) 윤양준이 중{僧] 돈수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실인을 삼았는데, 이 옥사는 시친(屍親)의 고발이 없는 이상, 법리로 따져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한 것은 벌써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유리(由吏)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하였는데, 거기에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人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라고 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시친(屍親) :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
▶유리(由吏) : 고을의 이방 아전
▶통인청(通人廳) : 수령의 잔심부름을 맡아 하는 통인의 근무 건물
▶절곤(折困) : 뼈가 부러지는 곤욕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절곤(折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속(官屬)에게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이어, 혐의 받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笞刑)으로 위엄을 보인데 지나지 않았은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관속(官屬) : 조선시대 지방 관청(官廳)의 아전과 하인
▶태형(笞刑) : 태(笞)로 볼기를 치는 형벌.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五刑)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이다. 태의 크기는 굵은 쪽이 약 0.84cm , 가는 쪽 0.53cm의 굵기에 1m 길이의 잘 다음은 가시나무로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법정소송>, 지본채색, 그림 중 나졸이 들고 내려치려는 것이 곤장이다.]

 

[조선의 형구와 크기에 대한 규정을 나타낸 그림, 맨 오른쪽이 태, 그 다음이 장, 왼족에서 세번째가 무거울 중(重)자가 들어간 중곤으로 가장 큰 곤. 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실제 관아에서는 치도곤이라 하여 규정된 중곤보다 더 큰 곤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