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28 - 하풍죽로

從心所欲 2020. 5. 9. 13:47

박종채는 아버지가 평소 소실을 둔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에 노래하는 기생이나 가야금을 타는 기생이 늘 옆에서 벼루와 먹 시중을 들거나 차를 만들어 올리고 수건과 빗을 받들거나 산보할 때 수행하면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함께 지냈지만 한 번도 마음을 준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처남인 지계공은 “매양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등잔불이 가물가물하면 담소는 한창 무르익고 앞자리의 기생들은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었지. 이즈음 사람들은 바야흐로 신이 나고 흥이 고조되었는데, 공(公)은 때때로 근엄한 낯빛에 엄숙한 목소리로 기생들을 그만 물러가게 하곤 했어. 그러면 사람들은 흥이 싹 식고 말았지. 그러나 공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아마도 이는 공이 스스로를 힘써 반성하여 극기하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어. 비록 힘들여 억지로 절제하는 흔적이 있기는 하나, 질탕한 풍류와 근엄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겸한 셈이니 이러고서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지.”라고 했다.

 

또한 박지원은 평소에 아들 박종채에게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벗을 만나면 혹 노래하는 기생들을 여럿 나오게 하여 술잔을 들며 담소하기도 했다. 또 혹 산에 오르거나 물가에 이르러 어쩌다가 풍류를 아는 중을 만나면 선(禪)을 논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본래 좋아하는 일이 아니며, 남들을 따라 그저 해봤을 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마음에 드는 글을 새로 창작했을 때 한두 사람 뜻이 맞는 이들과 조금 술잔을 기울이다가 글을 잘 읽는 의젓한 젊은이로 하여금 음절을 바로 하여 한번 낭랑하게 읽게 하고서는 누워서 글에 대한 평이나 감상을 듣는 것이다.”

 

박지원의 집에는 생황, 거문고 등 여러 악기가 있었으나 담헌 홍대용이 죽고 나서는 음악을 듣지 않았고 홍대용이 죽은 5년 후 홍대용의 집을 다녀와서는 슬픈 마음에 아예 집에 있던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렇게 음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안의현감으로 부임해서야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데다 시절도 태평하니 음악을 울려야 마땅하다” 고 생각하다가, 마침 장악원(掌樂院)을 은퇴하고 영남 땅을 떠돌던 늙은 악공(樂工)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에게 보수를 주며 음악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몇 달 간 노래와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안의현의 음악이 경상도에서 으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장악원(掌樂院) :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

 

안의현은 산수가 빼어난 고을로 이름이 높았다. 예전에는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동천(洞天)이라고 불렀는데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란 의미도 있다. 안의현에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하여 화림동(花林洞), 원학동(猿鶴洞), 심진동(尋眞洞) 등 영남에서 손꼽히는 동천이 세 군데나 있었다. 박지원은 특히 대나무가 많은 안의 관아 주변의 산수도 좋아하였다. 그래서 당시 관아 한구석에 퇴락하여 방치된 2층 창고를 헐고 땅을 파 개울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고는 각 집마다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등의 이름을 붙였다. 『연암집』에는 이 이름들에 대한 연유를 밝힌 기문(記文)이 실려 있는데 그 중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이다.

 

[함양 심진동 용추폭포(龍湫瀑布), 문화재청지정 명승 제 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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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正堂)의 서쪽 곁채는 버려져 무너져가는 창고인데, 마구간, 목욕간과 서로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서 두어 걸음 밖에는 오물과 재를 버려 쌓인 쓰레기 더미가 처마보다 더 높이 솟아 있었다. 이 땅은 구석진 곳이어서 관아에서도 온갖 더러운 것을 갖다 버렸다. 바야흐로 봄이 되어 눈이 녹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아에 속한 머슴들에게 일과를 주어 삼태기와 바지게로 긁어 담아내도록 하자, 열흘 뒤에는 빈 터가 이루어졌다. 가로 길이가 스물다섯 발이고, 너비는 가로의 10분의 3가량 되었다. 떨기나무들을 베어 낸 뒤 잡초를 뽑고, 울퉁불퉁한 곳을 다듬고 움푹 팬 곳을 메우고 마구간을 다 옮기니 터가 더욱 넓고 시원해졌다. 그리고 좋은 나무를 골라 가지런히 심자 벌레와 쥐가 멀리 달아나 숨어 버렸다.

▶정당(正堂) : 옛날 관가의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바지게 :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넓적하게 엮어 만든 발채를 얹은 지게

 

말끔히 다듬은 공터를 반으로 나누어 남쪽에는 연못을 만들고, 북쪽에는 헐어낸 창고의 재목을 이용하여 당(堂)을 지었다. 당(堂)은 동향(東向)으로 지어, 가로는 기둥이 넷, 세로는 기둥이 셋이다. 서까래 꼭대기를 모아 상투처럼 만들고, 호로(葫蘆)를 모자처럼 얹었다. 가운데는 쉴 수 있는 연실(燕室)로 만들고 연이어 방을 두었다. 그리고 앞쪽 왼편과 옆쪽 오른편에는 빈 곳은 트인 마루요, 높은 곳은 층루요, 두른 것은 복도이고, 트인 곳은 창문이며, 둥근 것은 통풍창이었다.

굽은 도랑을 끌어 비취빛 울타리를 지나게 하고, 이끼 낀 뜰에 구획을 나누어 흰 자갈을 깔아 놓았다. 그 위를 흐르는 물이 어리비쳐 졸졸졸 소리를 내면 그윽한 시내가 되고, 부딪히며 흐를 때는 거친 폭포가 되어 남쪽 연못으로 흘러든다. 벽돌을 쌓아 난간을 만들어 연못 언덕을 보호하고, 앞으로는 긴 담장을 만들어 바깥뜰과 경계를 지었다. 가운데는 일각문(一角門)을 만들어 정당(正堂)과 통하도록 하고, 남쪽으로 더 나아가 방향을 꺾어 연못의 한 모서리에 홍예문(虹霓門)을 가운데 내고 연상각(烟湘閣)이라는 작은 누각과 통하게 하였다.

▶일각문(一角門) :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홍예문(虹霓門) :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연상각(烟湘閣) : 연상(煙湘)은 박지원의 또 다른 호(號)이다.

 

대체로 이 당(堂)의 빼어난 풍경은 담장에 모여 있다. 어깨 높이 위로는 다시 두 기왓장을 모아 거꾸로 세우거나 옆으로 눕혀서 여섯 모로 능화(菱花) 모양을 내거나 쌍고리처럼 하여 사슬 모양을 만들기도 하였다. 틈이 벌어지게 하면 돈 꾸러미 모양 같고, 서로 잇대면 채색한 종이 무늬처럼 보여 그 모습이 영롱하고 그윽하였다. 담장 아래에는 붉은 복숭아나무, 연못가에는 두 그루의 늙은 살구나무, 누대(樓臺) 앞에는 꽃 핀 배나무 한 그루, 당(堂) 뒤에는 수만 줄기의 푸른 대나무, 연못 중앙에는 수천 줄기의 연꽃을, 뜰 가운데에는 열한 그루의 파초, 약초밭에는 아홉 뿌리의 인삼, 화분에는 한 그루 매화를 두니. 이 당(堂)을 나가지 않고도 사계절의 정물을 모두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능화(菱花) : 마름꽃(마름의 꽃).

 

동산을 거닐 때 수만 줄기의 대나무에 구슬이 엉긴 것은 맑은 이슬 내린 새벽이요, 난간에 기댈 때 수천 줄기의 연꽃이 향기를 날려 보내는 것은 비 갠 뒤 햇빛이 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아침이요,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산란하여 탕건이 절로 숙여지고 눈꺼풀이 무겁다가도 파초의 잎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갑자기 개운해지는 것은 시원한 소낙비 내리는 낮이요, 반가운 손님과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아름다운 나무들이 조촐함을 다투는 것은 갠 날의 달이 뜬 저녁이요, 주인이 휘장을 내리고 매화와 더불어 여위어 가는 것은 싸락눈 내리는 밤이다. 이것은 또 철에 따라 각 사물에다 흥을 붙이고 하루 동안에 각각의 절경을 발휘하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저 백성들이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태수가 이 당(堂)을 지은 본뜻이겠는가!

▶매화와 더불어 여위어 가는 것 : 청빈하여 몸이 여윈 신선에 비유하여 매화를 구선(癯仙)이라고도 부른다

 

아아! 나중에 이 당에 거처하는 이가 아침에 연꽃[荷]이 벌어져 향내가 멀리 퍼지는 것을 보면 따사로운 바람[風]같이 은혜를 베풀고, 새벽에 대나무[竹]가 물기를 머금어 고르게 젖은 것을 보면 촉촉한 이슬[露]같이 두루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할지니, 이것이 바로 내가 이 당을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이라 이름 지은 까닭이자 뒤에 오는 이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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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화림동 거연정(居然亭) 일원, 문화재청지정 명승 제 86호, 거연정은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이곳에 은거해 지내면서 1640년경에 억새로 정자를 만들었던 것을 그의 7대손 등이 1872년 재건하였다.]

 

그 후에 박지원은 처남인 이재성과 큰 사위, 작은 사위 등을 초대하여 물가에서 술 마시며 글을 짓는 자리를 가졌다. 또한 계축년인 1793년 봄에는 왕희지의 난정고사(蘭亭故事)를 본뜬 술자리를 마련하여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기도 했다. 처남 이재성은 세 번이나 안의현을 찾았었는데 하풍죽로당에서 보낸 즐거움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화림(花林)에 도착해 40일 동안 하풍죽로당에 거처했다오. 당시 풍년이 든데다가 관아에 일이 없어 한가했으므로 사또께서는 일찍 업무를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객이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오. 그 곳에는 예스러운 거문고와 운치 있는 술동이, 잘 정돈된 책들과 아담한 칼이 비치되어 있었다오. 그리고 곁에는 종종 시에 능한 승려와 이름난 기생이 있었소이다.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으니, 당시의 즐거움은 1백 년의 인생과 맞바꿀만했다오. 내가 훗날 화림과 같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고을살이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연암과 같은 객을 얻을 수야 있겠소?”

또한 박지원의 문하에 있던 선비들과 연암골에 있을 때의 문하생들도 찾아왔는데, 그러면 박지원은 때때로 별관에다 기악(妓樂)을 베풀어주고는 자신은 먼저 돌아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놀게 해주었다.

▶난정고사(蘭亭故事) :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으로 꼽히는 진(晉)나라 때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한 41명이 계축년인 353년 3월 3일에 산음(山陰) 난정(蘭亭)에 모여 냇물에 잔을 띄워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놀았던 일. 그때 지은 시들을 모은 시집의 서(序)를 왕희지가 행서로 썼는데 그 뛰어남으로 인하여 이후 모든 서예가들의 흠모를 받게 되면서 이 모임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화림(花林) : 여기서는 꼭 안의3동 중 하나인 화림동(花林洞)을 가리키기 보다는 안의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기악(妓樂) : 기생이 포함된 음악 풍류

 

이런 박지원의 모습을 두고 정조는 규장각 관원 중 하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또 들으니 고을 원으로서의 치적(治績) 또한 퍽 훌륭하다더구나!”

그리고 그 며칠 후 박제가에게 이런 분부를 내렸다.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公務)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을 것이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박제가는 마침내 안의를 방문할 수 있었고 정조의 은혜로운 말도 전할 수 있었다.

 

 

[심진동 용추폭포 가을풍경]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