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박지원을 위하는 마음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연세가 예순에 가까워서야 겨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일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정자를 세우고 못을 파서 친구와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으며, 남에게 편지를 쓸 때면 늘 안의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크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이는 모두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의 기상을 드러내는 것이나, 이래서야 어떻게 뒷날의 계책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궁상을 떨고 신병(身病)이 있다고 말해야만 남이 혹 동정하여 승진하도록 추천해줄 것입니다.”
그러자 박지원은 허허 웃으며 대답하였다.
“내가 연암골에서 가난하게 살 때에도 남한테 가난의 ‘가’자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소. 지금 나는 물과 대나무가 아름다운 고장에 부임하여 5천여호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있소이다. 고을에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는가 하면 관아에 달린 창고도 있소이다. 오늘날의 고을 원은 옛날의 제후에 해당한다오. 명색이 제후이고 보면 비록 제(齊)나 초(楚)와 같은 큰 나라 사이에 끼인 등(滕)이나 설(薛)과 같이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넉넉한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내정(內政)을 잘하여 외침을 막을 수 있소이다. 그러니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의 기상이 안 드러날 수 있겠소? 무엇 때문에 가난과 신병을 말하여 억지로 불쌍하고 슬픈 시늉을 짓는단 말이오?”
▶사직단(社稷壇) : 토지신인 국사신(國社神)과 곡물신인 국직신(國稷神)에게 제사지내던 곳. ▶제(齊), 초(楚), 등(滕), 설(薛)은 모두 중국 전국시대의 제후국 |
박지원은 고을 원으로 있으면서 어려운 친구들에는 자주 이것저것을 보내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선물을 후하게 보내는 법이 없었다. 가장 가까웠던 유언호(兪彦鎬)에게는 대로 만든 발 두 장과 죽부인 한 개를 보낸 적이 있었다. 유언호는 그것을 받자마자 즉시 앞창에다 발을 건 후 한참 동안 매만지다가 이런 답장을 보냈다.
“발 가득히 맑은 바람이 부니, 그대 마음을 보는 듯하이!”
집안 친척 동생인 박준원에게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 안에 풍경(風磬) 두 개를 동봉하여 보내기도 했다. 박준원은 이를 받고 몹시 기뻐하며 이렇게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형님께서 아우의 심사(心事)를 아시니, 보내주신 물건에 맑고 깨끗한 뜻을 부칠만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시를 짓기도 하였다.
하늘이 고요하듯 이 마음 담박하니
안의현감의 청렴함을 기뻐하노라.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편지 속에 이처럼 조촐하고 맑은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유언호(兪彦鎬) : 1730 ~ 1796. 박지원을 벼슬에 나갈 수 있도록 정조에게 추천한 장본인. 영조 37년인 1761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두 번이나 유배를 갔다. 정조 즉위 후에 이조참의, 개성유수, 규장각직제학, 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신임의리에 대한 간쟁으로 3년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1795년 잠시 좌의정을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
안의현의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2년반 만에 본래대로 채워놓자 창고의 곡식은 총 10여만 위나 되었다. 1794년 가을에 박지원이 차원(差員)으로 상경했을 때였다. 그해 농사는 대흉작이었다. 박지원은 한양에 온 김에 옛 친구인 호조판서 심이지를 찾았다. 심이지는 다음 해에 있을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앞두고 경비가 고갈되어 근심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박지원은 “지금 안의 고을에 호조에서 관할하는 저치곡 수만 휘가 있소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심이지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담당 관리로 하여금 귀읍에 공문을 보내어 기일을 정해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오도록 해야겠소. 더구나 금년에 곡가가 앙등하여 상정가(詳定價)와 비교해도 이득이 갑절을 될 거외다. 형은 늘그막에 가난 때문에 외읍(外邑)에 나가 수령노릇을 하고 있거늘 임기가 다하여 돌아올 적에 주머니가 두둑하면 친구인 내 마음이 좀 기쁘겠소?”
“그렇겠구려. 허나 안의에 돌아가면 다시 서신을 올리겠으니 공문을 발송하는 일은 잠시 늦추시지요.”
박지원은 본래 작은 고을인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곡식을 줄이는 일과 나라의 경비를 보태는 두 가지 일에 모두 도움이 될까 싶어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주머니가 두둑’ 운운하는 말을 듣고는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였다. 심이지의 말대로 하면 남는 돈이 줄잡아 3, 4만 냥은 되는 일이었다.
박지원은 안의로 돌아온 뒤 심이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저의 평소 성격이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지라 장부의 출납이나 곡식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 등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몸이 이곳을 떠난 뒤에 다시 추진하셔도 늦지 않을 성 싶습니다.”
심이지가 답장을 보내어 다시 강권하였지만 박지원은 끝내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경상감사에게 요청하여 그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버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박지원에게 물었다.
“그 돈은 자기 것으로 해도 의롭지 않은 돈이 아니건만 왜 굳이 마다하셨소?”
박지원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연암골의 가난한 선비에 불과하오. 하루아침에 만금을 횡재해서 부자가 되는 일이 나의 본분에 맞는 일이겠소?”
▶차원(差員) : 중요한 임무를 맡겨 임시로 파견하는 관원. 안의현감인 박지원이 경상감사에게 임무를 받아 한양 출장을 갔다. ▶심이지(沈頤之, 1735 ~ 1796), 도승지, 대사헌, 평안도 감찰사, 형조판서, 호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를 지냄 ▶저치곡(儲置穀) : 고을에서 징수한 대동미 중 중앙에 올려 보내는 것 외에 일부를 여러 가지 용도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을에 비축하여 둔 곡식. ▶상정가(詳定價) : 지방이나 중앙 관아(官衙)에서 정한 세액이나 공물의 가격 |
박지원이 고을 원에 부임할 때와 그만두고 돌아올 때 지녔던 물건은 책 5, 6백 권과 붓, 벼루, 향로, 다기(茶器) 등이 전부였다. 그래서 짐이라고는 고작 4, 5바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박지원은 임지에 도착하면 꼭 목공부터 먼저 불러 서가와 책상 따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지고 온 책과 벼루 등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그것을 완상(玩賞)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고을 원으로 있는 사람은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정사(政事)를 펼 수 있다. 매양 고을살이 하는 사람들은 고을살이를 마치 여관에서 하룻밤 자는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우리 원님은 얼마 안 있어 떠나실 걸?’ 하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윗사람은 억지로 전례를 답습해 정사를 할 뿐이고, 아랫사람은 임시방편으로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 이래갖고서야 어찌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을 원 자리를 연연해서도 안 되니,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주역』의 예괘(豫卦)에 ‘절개가 돌과 같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예(豫)’란 즐거움이다. 사람이 즐거운 상태에 있으면 그에 연연하고 탐닉하여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이 괘를 풀이하기를,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곧고 또 길하다’라고 한 것이다.”
안의로 박지원을 방문했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사람이 있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박지원이 고을 원으로서 어떻게 정사(政事)를 펴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연암이 고을 원으로 근무하는 방식은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후임자에게 넘겨줄 문서를 정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무와 과실을 심고 있으니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사람들이 웃었다고 한다.
▶바리 : 소나 말의 등에 잔뜩 실은 짐을 세는 단위 ▶『주역』의 예괘(豫卦) : ‘절개가 돌과 같아서 하루를 넘기지 않으므로, 곧고 또 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 吉] |
박지원은 1796년 봄에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경직(京職)으로 옮겼다. 당시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된 영남 사람이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자, 정조는 경상도내에 수령의 임기가 얼마 남자 않은 고을에 자리를 만들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마침 박지원의 남은 임기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올라온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수령의 임기는 1,800일이었다. 경직(京職)으로 옮기기는 했지만 실직(實職)을 받은 것은 아니고 명목상의 군직(軍職)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임기 동안의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경직(京職) : 조선시대 중앙에 있는 각 관서의 관직. 경관직(京官職) |
박지원이 안의를 떠나게 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 10여 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 할 것이옵니다.” 박지원이 안의현을 다스리는 동안 백성들이 수령의 존재를 잊을 만큼 백성들이 편안하게 고을을 다스린 것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아전 하나가 편지를 보내 고을 백성들이 지금 구리를 녹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려 한다고 알려왔다. 이에 박지원은 답장을 보내 이렇게 타일렀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나의 본뜻을 몰라서다. 더군다나 그것은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숴서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마침내 송덕비 세우는 일이 중단되었다.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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