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0 - 면천군수

從心所欲 2020. 5. 12. 16:38

[<면천군 지도> 1872년에 제작된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의 옛 모습을 담은 지도. 채색 필사본, 79.5 x 63.3㎝, 지도책이나 지도첩에 포함되지 않은 단독 지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올라온 박지원은 한가로워지자 전원으로 돌아가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처남 이재성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늙어 백발이 성성하니 다시 세상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장차 한적한 터를 하나 잡아 자네와 함께 소요(逍遙)한다면 여생이 지극한 즐거움이 될 것 같네.”

그리하여 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는 과수원 하나를 사서 터를 닦고 흙벽돌로 조그만 집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박지원은 제용감(濟用監)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로 자리를 옮기고 이어 의릉령(懿陵令) 직을 맡았다.

▶제용감(濟用監) 주부 : 모시,·마포, 가죽,·인삼(人蔘) 등을 왕실에 올리는 일과, 왕이 하사하는 의복, 천, 비단 등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 주부(主簿)는 종6품 직.

▶의릉령 : 의릉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 영(令)은 능을 지키는 종5품 벼슬.

 

박지원은 1797년 7월, 충청남도 면천군수에 임명되어 다시 고을 원으로 발령이 났다. 부임하기 전에 먼저 대궐에 들러 임금님을 알현한 뒤 다른 궁에 사은(謝恩)하라는 특명을 받아 정조를 먼저 만났는데 이때 정조가 제주 사람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글을 짓도록 하여 나온 글이 『연암집』에 실려 있는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이다.

박지원은 임지로 부임하기 전에 여러 관아를 돌며 인사를 하면서 당시 비변사(備邊司) 제조로 있던 남공철도 만났다. 그 때에 남공철은 박지원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비변사(備邊司) :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으로 비국(備局) 또는 묘당(廟堂)이라 하였다. 제조(提調)는 삼정승이 맡고 있는 도제조 밑의 정2품직

 

“이번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신 것은 임금님의 뜻입니다. 부임하시면 책임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박지원은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남공철은 한참 생각하더니 “가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만 했다.

박지원이 부임해보니 고을의 병폐나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다지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없어 보였으나 다만 천주교가 성행하여 물들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뒤, 계속 그의 종적을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는 쓸데없는 정쟁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정조가 대신으로 가장 가까이 쓰던 채제공(蔡濟恭)은 남인이었는데 남인 중에 천주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천주교를 문제 삼으면 반대파에서 이를 빌미로 채제공을 공격하면서 정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문풍(文風)을 흐리게 하는 중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풍조의 하나로 간주하여 내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충청도에서 비교적 광범위한 천주교인에 대한 단속이 시행되었는데, 천주교에서는 이를 정사박해(丁巳迫害)라 칭하며 이때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남공철이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충청도에 퍼지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염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적발되면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는 즉시 체포하여 죄를 다스렸는데,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신자들이 많았다.

 

박지원도 처음 부임해서는 천주교인을 적발하면 중죄인을 다스리는 곤장으로 매를 내리쳤다. 그럼에도 곤장을 맞는 천주교인들은 목석처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작은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모든 천주교인들이 같은 모습을 보이자, 박지원은 형벌로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타일러 깨우치는 방법을 쓰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인을 적발하면 일단 관아의 종으로 삼아 붙들어두고 매일 밤 근무를 마친 후에 천주교인 한두 명을 대청 아래에 불러 앉혀놓고 그들을 깨우쳤다. 부모의 천륜(天倫)과 은혜가 중하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천주교가 천륜을 거역하고 윤리를 거스르는 까닭을 10여 조목에 걸쳐 설명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처음에는 “예예”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귀담아듣지 않다가 박지원이 반복하여 타이르고 설명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꿈을 꾸다 깨어나는 것처럼 뉘우치고 줄줄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지원은 그들이 뉘우쳐 후회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면 관아에서 풀어주었다. 그 결과, 간직하고 있던 천주교 관련 책자나 예수 초상을 스스로 갖고 와서 바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박지원은 이들을 풀어 여기저기 다니며 다른 천주교인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바친 책자와 초상은 장날 백성들이 모였을 때 박지원이 직접 성의 남쪽 문루(門樓)에 올라가 백성들에게 유시(諭示)한 후에 불태웠다.

 

[복원된 면천 읍성의 남문과 옹성, 사이다맛나님 사진]

 

[면천읍성 남문 성벽, 뉴시스사진]

 

박지원은 이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천주교에 대해 잘 모르는 관리들이 전주교인을 심문하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관찰사에게 편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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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예로부터 이단(異端)이 그 시초에는 어찌 자처하여 사학(邪學)이 된 적이 있었겠습니까? 백성은 천부적인 양심이 있어 선행을 즐기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누구나 다 있는데, 오직 가리기를 정확히 못 하고 분변하기를 일찍 못 한 까닭으로, 인의(仁義)가 살짝 어긋나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무리가 되었으며, 그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재앙은 이미 불교에서 증험이 되었습니다.

▶양주(楊朱). 묵적(墨翟) : 양주(楊朱)는 쾌락적 인생관과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주장하였고, 묵적(墨翟)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다. 「맹자」등문공하(藤文公下)에 “양주는 위아(爲我)를 주장하니 이는 임금을 무시한 것이요, 묵적은 겸애(兼愛)을 내세웠으니 제 아비를 무시한 것이다. 아비와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금수가 하는 짓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는 구절이 있다.

 

오늘날 소위 사교(邪敎)를 금단하는 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을 잡아 묶어다가 관청 뜰 아래 꿇리고 곤장 차꼬를 채우고 내려다보면서, “네가 왜 사학(邪學)을 했느냐?” 하면, 그 자는 한마디로 가로막아 말하기를, “소인은 사학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명색이 관장(管掌)이 된 자가 이미 그 학(學)이 어째서 사(邪)가 되는지도 무르니, 추궁하는 것이 조리가 없어서 먼저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말하게 되며, 그들이 대답하는 바에 따라 우선 복종한 줄로 인정하고 억지로 다짐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교활한 놈은 성실치 못하다고 도리어 비웃고, 어리석은 놈은 더욱 의혹이 불어나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떤 까닭으로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하는가?” 하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근원을 타파하지 못하고서 말류(末流)를 맑게 하고자 하며, 소굴만 찾을 뿐이지 스스로 길을 잃은 격입니다.

그래서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笞刑)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높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耶蘇)를 저주하고 천주(天主)를 배척하게 하여 그 배반을 시험하고 그 진위를 관찰합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하여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유교를 끌어다) 입막음과 방패막이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었으나, 마침내 어떤 우매한 백성들은 마치 그를 위한 절개를 지키는 것이 의(義)를 위해 죽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속아서 현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제압하는 요령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점을 경시하고 형벌로 굴복시키려 들뿐 아니라 또 언어까지 실수하고 맙니다. 이 어찌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과 부합된다고 하겠습니까?“

▶야소(耶蘇) : 예수(Jesus)의 음역

[『연암집』<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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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교화 덕분에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면천군에서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박지원이 부임할 당시의 충청감사는 한용화(韓用和, 1732 ~ 1799)로 박지원과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진사시에만 입격하고 음서(蔭敍)로 벼슬하여 청주목사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니 꽤나 관운(官運)이 있었던 인물이다. 한용화는 효성이 지극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모를 모실 때 저녁에 시중을 들고 나서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코고는 소리를 들은 뒤에 물러나왔고, 나이 60에 상(喪)을 당하여서는 한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어느 날 제물(祭物)이 늦어져 집안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땔 나무가 없어 그랬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뒤로 일체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불을 때지 않았고, 5년 동안 부모상을 치루면서 안방에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용화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부임하기 한 달 전에 충청감사로 부임했는데, 그를 보좌하는 판관(判官) 김기응(金箕應)은 박지원의 친구였다. 한용화는 그 해 연분(年分)을 낮추어 받기 위하여 임금에게 몇 차례 장계(狀啓)를 올렸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일을 판관 김기응과 상의하였는데 김기응이 박지원과 상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감사가 물었다.

“면천군수가 이런 글을 잘 짓나요?”

“이 친구가 조정에 올린 글에는 육선공(陸宣公)의 유법(遺法)이 있습니다. 그는 안의에 있을 때 도내의 옥사를 판결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옥사의 정황을 분명하게 논술하여 조정에 올릴 때마다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사또께서 급히 편지를 넣어 장계를 대신 지어달라고 청하면 조정의 윤허를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연분(年分) : 그 해 농사의 작황에 따라 작정(酌定)하는 전세(田稅)의 율(率). 조선시대 농작의 풍흉(豊凶)을 9등급으로 구분하여 적용하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을 세종 26년인 1444년부터 조세 부과의 기준으로 정했다

▶육선공(陸宣公) : 중국 당(唐) 나라 중기의 정치가인 육지(陸贄, 754~805). 그는 상소문을 통하여 임금에게 자신의 경세책(經世策)을 자주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들을 후대에 책으로 묶어놨는데, 이 책이 조선의 영조, 정조 때에는 매우 중시되어 경연(經筵)에서 강론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감사 한용화는 사람을 보내어 박지원에게 글을 청하였고 박지원은 이 일이 민생에 관련된 일이라 여겨 글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하여 조정에 창계를 올렸더니 과연 윤허가 내렸다. 감사는 몹시 기뻐하였고 얼마 후에는 박지원을 도내 옥사를 심리하는 관원으로 차출하여 감영으로 불러 머물게 하였다. 감사는 매일 밤 술자리를 마련하고 박지원을 불러 호감을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사가 느닷없이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가부(可否)를 함께 의논해보자고 하였다. 한용화가 꺼낸 것은 도내 수령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한 글귀를 적은 것이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이것은 제가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하고 마다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뒤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면천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한용화는 “내가 속마음을 통하고자 하였거늘, 어찌 이토록 나를 무시한단 말인가!” 하고 화를 냈다. 또한 박지원이 옥사에 대한 심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버렸다는 이유로 박지원을 모시고 온 아전을 문초하여 벌을 주었다. 소식을 들은 박지원은 여러 번 사직서를 냈지만 감사는 받아들이지 않더니 그 해 겨울 근무성적 평가에 ‘중(中)’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6월과 12월, 2회에 걸쳐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治績)을 심사하여 조정에 보고하는데, 이때 가장 좋은 성적은 ‘최(最)’, 가장 나쁜 성적은 ‘전(殿)’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고을 수령의 평가에서 ‘중(中)’이 1번이라도 나오면 승진이 안 되고, 2번 나오면 파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용화는 박지원에게 이렇게 좋지 않은 평가를 준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다스림은 구차하지 않으나 가끔 꾀병을 부린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