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1 - 양양부사

從心所欲 2020. 5. 13. 21:50

박지원이 면천군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은 안의현에 있을 때와 같았다. 부임한지 몇 달 만에 행차 때 벽제 소리 등 번거로운 의례를 없애버리거나 간소하게 한 뒤 관아가 조용해졌다. 관내에 일이 없어 수령의 도장이 상자 속에서 며칠씩 잠자고는 했다. 그리고 몇 달씩 감옥이 텅 빌 때도 있었다. 그때 살인 용의자 한 명이 오랫동안 혼자서 빈 옥에 갇혀있었는데 박지원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다시 심리할 예정이었다. 박지원은 그가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목에 씌운 칼과 발에 채운 차꼬를 풀어주고 간수 방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죄수는 감동하여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천군 남쪽에 양제(楊堤)라는 제방이 있었는데, 고을로 흘러드는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곳으로 그 물을 사용하는 농토가 꽤 넓었다. 그래서 군민들을 동원하여 매년 둑을 손보았지만 장마를 겪으면 이내 허물어져 피해가 계속되었다. 박지원은 부임 초기에 그곳에 가서 지형을 꼼꼼이 살펴본 후에 원래의 수로를 막고 따로 제방 왼쪽의 바위가 많은 곳을 뚫어 새로운 수문으로 삼게 하였다. 그 이후로는 다시 제방이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성(城)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백보쯤 되는 크기인데 오랫동안 황폐한 상태로 방치되어 연못에 물을 가둘 수도 없었다. 박지원은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아 연못을 손질하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고 그곳에 6각의 초정(草亭)을 세우고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자 이름은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홍대용이 자신이 살던 집을 ‘건곤일초정’이라 명명한 일도 있어 박지원에게는 여러 의미가 담긴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곤일초정,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골정지(骨井池) 안의 정자, 충청남도사진]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1800년 6월에 정조가 승하하였다. 박지원은 몹시 슬퍼하며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궐패(闕牌)가 모셔진 객사에 나아가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쓰러지기도 하였다. 이때 박지원은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잘것없는 기예라 할 문예로 인해 임금님의 은혜로우신 분부를 여러 번 받들었다.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임금님의 융성한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했으니 이것이 나의 지극한 한(恨)이다.”

당시의 충청감사 김이양이 박지원을 정조의 진향문(進香文)을 짓는 제술관으로 임명하였고 이에 박지원은 충청감사를 대신하여 <정종대왕 진향문>을 지어 올렸다.

▶지우(知遇) : 다른 사람이 지신의 인격(人格)이나 학식(學識)을 알아주고 잘 대우(待遇)함.

▶진향문(進香文) : 국상(國喪) 의례에서 신위(神位)나 영전에 향을 올리는 진향(進香) 때 올리는 글

▶정종대왕(正宗大王) : 정조의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고종 때인 1899년에 영조와 함께 정조로 묘호가 추존 개정(改定)되었다.

 

천년지나 성인(聖人) 한 분

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기자(箕子) 홍범(洪範)으로 다시 질서 세우고

문운(文運) 거듭 창성했네.

공자(孔子) 생각 주공(周公) 마음

계승하고 본받아서

크고 넓은 정책 펴니

한(漢)과 당(唐)조차 옹색하다 여기셨네.

재위하신 스물네 해 동안

한결같이 건강(乾剛)의 덕을 지켜

궁원(宮園) 호칭 바로잡고

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하략)

▶기자(箕子) 홍범(洪範) :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에게 선정(善政)의 방법을 물었을 때 기자가 하(夏) 나라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로부터 받은 낙서(洛書)를 보고 만들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로 교시하였다고 전함

▶주공(周公) :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유교에서는 성인으로 받드는 인물.

▶건강(乾剛) : 주역(周易)의 ‘건괘는 강함을 상징하고...’를 인용한 것으로 건강지덕(乾剛之德)은 왕의 권위를 상징.

▶궁원 호칭 바로잡고 :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여 그 묘를 현륭원으로 정한 일.

 

[정종대왕(正宗大王) 태실(胎室) 및 태실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소재, 정조의 태를 봉안한 태실과 태실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이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鷄足山)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에 조성되었고, 1800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구실로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고 정조대왕태실에서도 태항아리를 꺼내갔다. 6.25전쟁 이후 파괴·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수습하여 영월읍내 KBS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놓았다.]

 

[정종대왕 태실비]

 

이 글을 지어 올린 뒤 박지원은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천고(千古)의 옳음과 그름, 정의와 사악함, 음과 양, 흑과 백은 구별하기 어렵지 않으며, 또한 많은 말이 필요 없다. 그것은 단지 의리(義理)와 이해(利害)에 의해 나뉠 따름이다. 의리란 공변된 천도(天道)이다. 이는 인간이 지닌 도덕적 본성상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세속의 사사로운 이해에 빠져서 우리들이 알지 못할 뿐이다. 이해란 곧 화복(禍福)이다.

돌아가신 임금님의 지극한 덕과 큰 업적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예법을 엄히 하고 대의(大義)를 밝히신 일은 가히 천지의 도와 어긋나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물어도 틀림이 없다 할 것이며 100세(世) 후의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옳다 하리니 100왕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또한 학문이 올바르고 의리가 정밀하셨으니 누가 감히 현혹하거나 어지럽힐 수 있었겠느냐? 지금 내가 하찮은 글을 지어 30년 동안 가슴속에 간직해온 생각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이 글은 본래 ‘의리’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 해 8월 박지원은 강원도 양양(襄陽)도호부 부사(府使)로 발령이 났다. 종4품의 군수에서 종3품의 부사로 승진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바로 임지로 가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박지원은 굳이 한양으로 올라가 사은숙배를 신청하였다. 승지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두고 나무라며 추후 죄를 묻겠다고 하자, 박지원은 “시골 고을에서 수령의 직무에 얽매어 있다 보니 임금님께서 승하하셨는데도 대궐에 나아가 곡을 하지 못했소이다. 이제 또 멀리 영동 지방으로 가게 되었거늘 혼전(魂殿)에 하직조차 못하다니요! 만일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소이다.”라고 하여 승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혼전(魂殿) : 임금이나 왕비의 국상(國喪) 중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신위를 모시기 전까지 대궐 내에서 신위를 모시는 곳.

 

양양은 바닷가 고을이라 곡식 장부가 많지 않음에도 아전들이 곡식을 빼돌려 장부는 전부 허위였고 창고는 텅 비어있었다. 아전들은 새로 부임한 부사가 그 책임을 추궁하면 도망가 버리겠다는 소리까지 떠벌렸다. 이에 박지원은 아전들을 모아놓고 고을 창고가 텅 비었는데 고을 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도망가려면 하나도 남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방에 거처하면서 공무를 일체 보지 않았다. 또한 공무도 수행 안 하면서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신의 녹봉을 떼어내 아전들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시작으로 훔쳐간 곡식을 도로 채워놓기에 힘쓰라고 타일렀다. 이에 아전들도 감복하여 백성들과 함께 힘쓴 결과 몇 달이 안 되어 창고가 모두 다시 채워졌다.

하지만 박지원의 양양부사 벼슬은 짧게 끝났다.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의 중들이 한양의 궁속(宮屬), 왕실 가족들과의 친분을 내세우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백성을 괴롭히며 관권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박지원이 분개하여 이들을 단속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하지만 감사가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 박지원은 부임 다음 해인 1801년 봄에 한양으로 올라와 병을 핑계대고 사임하였다.

 

이후 이서구가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내며 자리가 생길 때마다 박지원에게 그 자리에 대한 의사를 물어왔지만, 박지원은 “나는 이제는 늙었소이다. 게다가 나라에서 고을 원의 임기를 둔 것은 청렴함을 기르라는 뜻이외다. 나는 임기가 끝나기 전에 고을 수령을 그만두었거늘, 그리 큰 허물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하실 것은 없소이다.” 라며 거절하였다.

▶궁속(宮屬) : 궁궐에 소속된 서리(胥吏)나 노복(奴僕)

 

박지원은 작은 일을 갖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 남에게 자신의 치적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의현에 있을 때 도내를 순시하던 관찰사를 해인사에서 맞이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자리에는 10여 명의 고을 수령들이 함께 했는데 저마다 자신들이 다스리는 고을의 폐단을 얘기하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자 감사가 박지원에게 물었다.

“유독 안의현감은 아무 말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

박지원은 웃으며 말했다.

“폐단이 하나 있기는 하오나 바로잡는 방책이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군사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임진년 때처럼 왜구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온다면 이른바 속오군(束伍軍)은 지금 좌수(座首)가 이끌고서 소속 진관(鎭管)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으니 현감 휘하에는 단 한 명의 군졸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혹 ‘아전과 노비로 군대를 만들어 성을 지키면 되지 않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안의의 아전과 노비는 그 수가 채 2백 명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평소 훈련도 시키지 못했으며 칼과 창도 없으니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이때에 비록 제갈량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묘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형세상 어쩔 수 없이 관아 뒤에 있는 대나무 숲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 필시 『강목(綱目)』의 서술방식에 따라 ‘안의현감 박아무개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대서특필할 터이니 이 어찌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안의는 고을이 생긴 이래 돌 한 조각 쌓은 일이 없거늘, 처음부터 버리고 달아날 성(城)이라는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저의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개중에는 박지원의 말을 자못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다. 박지원은 우스갯소리를 하였지만 사실은 조선의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그 속에 감추어 감사에게 피력한 것이었다.

▶속오군(束伍軍) : 임진왜란 중에 양인과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조직된 혼성군. 이후 진관(鎭管) 중심으로 각 이촌(里村)의 사정에 따라 편성되어 지방의 핵심적인 군대조직이 되었다.

▶진관(鎭管) : 외침에 대비한 조선의 지역 군사 기지.

▶좌수(座首) :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 둔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강목(綱目)』: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양양부사를 그만둔 뒤에 이웃에 사는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을 때 서로 자신이 부임했던 고을의 봉록의 많고 적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박지원이 잠자코 듣고만 있자 박지원에게 양양은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지원은 농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1만 2천 냥 받았소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렇고말고요.”

금액이 너무 많은 것에 놀라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자세히 말해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에 박지원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1만 냥 가치는 되고 녹봉이 2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1만 2천봉과 겨룰만하지 않겠소?!“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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