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종 다음으로 호감도가 높은 조선 왕은 정조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왕이라면 정조는 그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왕이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하여 정치적 소용돌이를 뚫고 왕위에 올랐던 마치 영화 주인공 같은 캐릭터가 자주 소개되어서일지도 모른다.
또한 역대 조선 왕 가운데서도 정조만큼 비난거리가 없는 왕도 없다. 정조 사후 붕당정치가 끝나고 노론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실록에 정조에 대한 시빗거리가 실리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실제로 정조는 자신을 철저히 관리한 왕이었다.
『일성록(日省錄)』은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까지 주로 왕의 주요업무와 국정을 담은 기록물이다. 『일성록(日省錄)』은 원래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시작되었다. 정조가 9살 때인 1760년 1월부터 개인적으로 쓰기 시작한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즉위 후에도 일기 쓰기를 계속하면서, 1781년 규장각 신하들에게 일기를 쓰는 자신의 습관을 밝히고, 그 일기를 『승정원일기』와 구별되는 공적인 기록으로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 이름을 ‘일성록’으로 지었고 이후 정조 7년인 1783년부터 『일성록』은 왕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국무(國務)가 늘어남에 따라 왕이 직접 기록하기에는 기록의 양이 너무 많아져 규장각 관원들로 하여금 편찬을 담당하게 하였다. 임금의 입장에서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일성록』은 이후 규장각 관원들이 내용을 작성한 후에 왕의 재가를 받는 형식으로 대한제국 말까지 계속되었다. 201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일성록』은 정조의 것만 1760년부터 1800년까지 무려 676책이다.
정조는 『일성록(日省錄)』에 대하여 그 뜻을 이렇게 밝혔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는 교훈은 학자의 실천하는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교훈을 가슴에 담아 왔다. 오늘날 『일성록』을 편찬한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이다. 밤에는 하루의 일을 점검하고, 한 달이 끝날 때면 한 달 동안 한 일을 점검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실천하니 정령(政令)과 일 처리 과정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 편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깨닫게 된다. 이 역시 날마다 반성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증자의 반성 : 공자의 제자 증자가 매일 세 가지로 반성했다는 일일삼성(一日三省)은 “남을 위해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것은 없었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는데 부족함은 없었는가? 배운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은 없는가?(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로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령(政令) : 정치상의 법도와 규칙. |
정조는 유학의 진리 구현 방식인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충실했던 왕이다. 정조는 도덕적 완성을 위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와 수기를 통하여 갖추어진 인격에 의한 감화력으로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치인(治人)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수기(修己)를 위하여 정조가 힘쓴 것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었다.
“나는 별다른 장점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품성이 그리 매우 나태하지 않아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대한 공부에 유의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하지만 참으로 아는 것이 없이 한갓 외우는 습관으로 귀착되었다. 또 힘써 행하지 않고 단지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학문에 의뢰하였을 뿐이다. 이는 진실로 스스로 반성하여 깊이 부끄러워할 일이다. 내가 나의 거처를 성정당(誠正堂)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내가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배우기를 기약하는 뜻이고 아침저녁으로 늘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기를 바란 것이다.”
성의, 정심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개념이다. 흔히 쓰는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말 역시 「대학(大學)」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학(大學)」원문은 ‘예전에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반듯하게 하였고(欲治其國者, 先齊其家),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欲齊其家者, 先修其身)’이다. 성의, 정심은 바로 이 대목 뒤에 나온다. ‘자신의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欲修其身者, 先正其心),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한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대학(大學)」에 따르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과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말대로 이런 구절을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겸손한 자세로 자기반성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의 수기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유(先儒)는 극기(克己)를 ‘극복하기 어려운 치우친 성품을 극복해 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말을 깊이 음미하고 언제나 생각이 처음 싹틀 때 혹시 한 생각이라도 편벽한 생각이 있으면 맹렬히 성찰하여 검속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검소했고, 부지런했으며 또 누구 못지않게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정조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도 했다.
▶선유(先儒) : 선대(先代)의 유학자 |
“제신(諸臣)은 혹 휴가라도 내지만 나는 일찍이 잠시도 쉬어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할 정도로 정조는 치세 내내 국사에 매달렸다. “승지들이 새벽에 출근하여 신시(申時)에 퇴근하는 것도 힘든 노고지만 나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정조는 책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무릇 사람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하루에 해야 할 일을 그날 끝마쳐야 한다(凡人無論上下. 一日須了一日事)”는 것이 정조의 소신이었기에 낮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한가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정조가 책을 읽는 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뒤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정조는 밤을 새우는 일도 종종 있어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은 정조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걱정에 “예로부터 궁중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일들이 꽤 있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관이나 궁녀들은 부리기나 하면 되지 그들과 수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때로 신하들을 불러다가 글 뜻을 토론하기도 하고 고금의 일을 헤아려보기도 하는데 이는 심신에 유익할 뿐만이 아니라 매우 즐거운 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앉아 책을 보는데 그 맛이 매우 깊다. 때로 마음에 꼭 맞아서 흔연히 얻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 해가 저물었는지 밤이 깊었는지 모르기도 한다. 옛사람이 이른바 ‘내가 좋아하면 피곤하지 않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라고 답했다.
▶신시(申時) : 오후 3시부터 5시. |
검소함에 대한 정조의 일화는 많다.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 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통상 왕의 옷은 빨아 입지 않고 매번 새로 지어 입었다고 하는데 정조는 이 일을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경연 신하 가운데 내가 여러 번 빤 옷을 입는다고 찬미한 사람이 있는데 나는 우습게 여겨진다. 당(唐) 문종(文宗)이 옷을 세 번이나 빨아 입었는데 유공권이 ‘임금은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물러나게 하며 간쟁을 받아들이고 상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는 것은 작은 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유공권(柳公權, 778 ~ 865) : 당(唐)나라 때의 관리이자 서예가. |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조는 자신이 본을 보여 백성들을 감화시키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 억지로 애써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몸소 행한 효과가 있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지금 도리어 온 세상이 사치스럽고 화려할 뿐 변화됐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의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습속이 갑자기 변화하기 어려워 그런 것인가.”
정조의 수라상을 보고 규장각 각신들이 크게 놀란 일이 있다. 반찬이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다 그릇은 모두 흠이 있거나 일그러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법을 제정한다고 저절로 시행될 수는 없고,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허물이 없게 한 뒤에야 남을 비난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관물헌(觀物軒)은 창덕궁에서 가장 협소한 전각이다. 동궁전(東宮殿)에 속한 건물이었지만 정조는 즉위 후에도 이곳을 계속 사용했다. 날이 매우 더웠던 어느 날 정조가 관물헌에 머물 때였는데 연신(筵臣)들이 정조에게 건의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옥체가 손상될까 염려되옵니다. 부디 별전(別殿)으로 옮겨 더위를 피하소서.”
정조는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안정되면 기운이 정해지고 기운이 정해지면 몸이 편안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요한 곳에 안정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서 이처럼 작은 방에서도 더운 줄을 몰랐다.”
다시 연신들이 아뢰었다.
“이 방은 협소하여 한여름이면 더욱 불편합니다. 별도로 짓자는 유사(有司)의 청은 비록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나 서늘한 곳을 가려서 여름을 보낸다면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필시 다시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만족할 때가 있겠는가. 능히 이를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 이로써 미루어 나간다면 ‘지족(知足)’이라는 두 글자가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학문 공부와 평치(平治)의 도(道)만은 조그만 완성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면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도 언제나 부족함을 탄식하는 생각을 가져야 될 것이다.”
▶연신(筵臣) : 경연(經筵)에 관계하던 관리. ▶유사(有司) : 담당 관리 |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와중에도 학문과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절대 작은 성취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던 정조다.
참고 및 인용 :정조이산어록(손인순, 2008. 고전연구회 사암),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선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 3 - 군사(君師) (0) | 2020.06.12 |
---|---|
정조 2 - 피곤한 왕 (0) | 2020.06.09 |
연암 박지원 32 - 졸(卒) (0) | 2020.05.15 |
연암 박지원 31 - 양양부사 (0) | 2020.05.13 |
연암 박지원 30 - 면천군수 (0) | 202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