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3 - 군사(君師)

從心所欲 2020. 6. 12. 08:43

정조는 공부하지 않는 신하들을 꾸짖었다.

“모래나 자갈땅이라도 가난한 백성들은 지어 먹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 농사짓는다. 하물며 좋은 밭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매번 그대들이 일없이 한가하게 노는 것을 보면 애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대들은 나이가 젊고 재주도 그리 노둔하지는 않으니, 조금만 노력을 기울인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농사꾼이 좋은 밭을 버려두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수확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되겠는가.”

정조는 경연에서 신하들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균관 유생들의 추시(秋試), 초계문신의 친시(親試), 그리고 문신들을 대상으로 한 제술(製述)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하였다.


“공령(功令)이나 응제(應製) 문자는 짓는 자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또한 글제가 좋은가 좋지 않은가 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 때문에 내가 절제(節製)나 반시(泮試)를 치를 때에 제목이 될 만한 글귀를 찾기 위해 하루 또는 이틀의 시간을 들이곤 하는데, 경들 중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사람들도 과연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추시(秋試) :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의 초시(初試), 식년시 바로 전년 가을에 초시를 시행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

▶친시(親試) :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보이는 시험

▶제술(製述) : 시문(詩文)이나 글을 지음

▶공령(功令) : 문과(文科) 과거시험에 사용되는 시(詩), 부(賦), 표(表), 책(策), 의(疑), 의(義) 등의 문체(文體)

▶응제(應製) : 임금의 특명에 의하여 임시로 치르는 과거의 한 종류

▶절제(節製) : 성균관과 지방 유생을 대상으로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 상사(上巳, 삼짇날. 음력 3월 3일), 칠석(七夕, 음력 7월 7일),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에 실시한 시험

▶반시(泮試) : 성균관의 기숙사에서 거처하며 공부하는 거재(居齋) 유생에게 보이는 시험

 

좋은 답안을 얻기 위해서는 문제도 좋아야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시험문제를 출제한 횟수가 1,347회나 되고, 특히 1789년 이후에는 매년 80 ~ 90편을 출제했다고 한다. 정조가 시문(試問)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기존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무에 밝은 유능한 관료를 뽑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책문을 작성할 때 옛 법식을 모방하는 근래의 방식을 모두 버리고 현재의 요긴한 급선무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모방하거나 꾸미어 짓지 못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의견에 따라 소씨(蘇氏)의 책략(策略) 같은 글을 지어내게 한다면 체재와 내용이 일정한 투식에 빠지지 않고 유용한 글이 될 것이며 잘하고 못한 것을 쉽게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시행하면 필시 신진배들이 세무(世務)에 유의하게 하는 데 일조가 될 것이다.”

▶책문(策問) : 문과(文科) 시문(試問)의 한 가지. 시무책(時務策).

▶소씨(蘇氏)의 책략(策略) : 소씨(蘇氏)는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면서 또한 문장도 뛰어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로 꼽혔던 소식(蘇軾), 즉 소동파를 가리킨다. 그의 책략문은 문제에 대한 핵심을 지적하고 이어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세무(世務) : 당면한 세상사

 

정조는 구체적 내용을 요구하는 시문(試問)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농업에 대한 시문들은 이랬다.

 

“전지의 개간을 두고 말한다면 구전(區田), 궤전(櫃田), 위전(圍田), 제전(梯田) 등의 이름이 있는데, 그 제도를 차례로 지적하여 말할 수 있겠느냐? 파종을 하는 데는 만종(漫種), 누종(樓種), 호종(瓠種), 구종(區種)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 방법을 상세히 논할 수 있겠느냐? 봄에 갈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 농사일의 상례인데 구월(甌越)의 남방에는 일 년에 세 차례 성숙하는 벼가 있고, 일 년에 두 번 잠자는 것이 누에고치의 상례이나 영가군(永嘉郡)에는 여덟 번을 나오는 진귀한 종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것이냐?”

 

“한나라 문제(文帝)는 몸소 밭갈이를 하여 농사를 가르쳤으나 당시에 놀고먹는 이가 많았으며, 장전의(張全義)는 백성에게 재배하는 방법을 권장하니 들녘에 빈 땅이 없었다. 그렇다면 군주의 인솔함이 도리어 지방관의 공로보다 못한 것인가?”

 

“고금에 농업을 설명한 책으로는 초나라의 『야로(野老)』, 한나라의 『제계(癸)』, 가사협의 『제민요술』, 서광계의 『농정전서(農丁全書)』등을 칭찬하는데 역시 예를 들어 가며 우열을 평론할 수 있겠는가?”

▶영가군(永嘉郡) : 중국 저장성(浙江省) 남부의 고을

▶장전의(張全義) : 중국 당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군벌(軍閥)

 

경서를 많이 보았다고 이런 문제에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농업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으면 답은커녕 질문 자체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조의 노고에 비하여 답으로 제출된 대책문은 그 수준이 미흡하여 정조의 한탄을 자아냈다.

“밤새도록 이 책문을 짓느라고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여러 신하들의 대책(對策)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나만 공연히 고생했을 뿐이다.”

 

특별히 선발한 초계문신의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초계문신을 권면하기 위해서 보이는 경서 시험이 이런 수준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은 모두 경학에 깊이 통달한 선비이다. 그러나 근래에 연소한 문신들이 공령(功令) 문자만 대충 익혀서 과거에 일단 합격하고 나면 그간 보던 경서는 묶어서 시렁에 올려놓고 읽지 않아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지경이기 때문에 면전의 알기 쉬운 글 뜻을 대충 익히게 하려는 뜻에서 경서 시험을 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지극히 쉬운 것까지 제대로 답하지 못하니, 생각하면 걱정스러울 뿐이다.”

 

정조는 1794년 성균관 유생을 위한 응제(應製) 때에 ‘해마다 60세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누나(年年宴杖鄕)’라는 구절로 부(賦)를 지으라는 과제를 냈다. 이는 당(唐) 현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생들이 이 시의 출처를 모른 채 답을 적어냈다.

‘내가 과거 시험에 깊이 감추어져 알기 어려운 것으로 시제(試題)를 낸 적이 없었다. 오늘의 시험은 바로 자궁(慈宮)의 회갑을 맞이하여 치르는 시험인데, 『예기(禮記)』에 ’육십이면 향리에서 지팡이를 집는다‘고 하였고, ’해마다 잔치를 열어준다‘는 말이 또 매우 좋기에 제목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여러 유생들이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하니 자못 탄식할 일이다.“

▶장향(杖鄕) : 예순 살을 이름. 중국 주나라 때에 노인이 60세 되던 해부터 고향에서 지팡이 짚는 것을 허락했던 데서 유래.

▶부(賦) : 『시경』에 실린 시들을 표현법에 의해 분류하는 방법의 하나로,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한문문체

▶자궁(慈宮) :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출생한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임금의 생모를 임금이나 신료들이 지칭하는 명칭. 여기서는 혜경궁 홍씨.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서당 선생님과 제자들>, 1921년, 34.6 x 24.1 cm, 다색 목판화]

 

정조가 시문에 까지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고 양성하고자 하는, 왕으로서는 당연히 가질만한 바람과 욕심에서였다. 특히 당하관 이하 문신 중에서 우수한 관리를 발탁하여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우수한 관료의 중요성을 그만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정조의 그런 노심초사가 모두에게 좋은 뜻으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이 초계문신 제도를 비판한 인물 중에는 정약용도 있었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이렇게 썼다.“내각에서 초계하는 것은 태평성대의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과거 보이는 법을 마련한 까닭은 어진 이를 택해서 뽑고, 그 능함을 알아서 등용하려 함이다. 이미 과거로 뽑아서 벌써 벼슬에 제수했고 이미 청화(淸華)의 지위에 좌정했는데, 이 사람을 다시 시험하고 다시 고과(考課)하니, 이것이 어찌 어질고 유능한 자를 대우하는 도리인가.”

▶청화(淸華) :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가리킴. 청직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으로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병조(兵曹),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의 벼슬을 말하며, 청직에는 과거(科擧) 출신자만이 임용될 수 있었다. 화직(華職)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관직이란 의미로, 옥당(玉堂), 이조와 병조의 낭관(郎官), 대간(臺諫), 사관(史官) 등을 가리킨다.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정약용이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서만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그 개혁원리를 저술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책에서 정약용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임용된 사람은 이미 그 인품과 능력이 검증된 것이니 재교육은 하되 교육의 성취도를 평가하거나 우열을 가리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에 대하여 정약용은 이렇게 적었다.

 

“한번이라도 이 선발을 거친 자는 의기가 움츠러들어서 감히 낯을 들어 말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하며, 문득 임금의 사인(私人)이 되어버리니, 이것은 좋은 법제가 아니다.”

 

정조 앞에서 강론하거나 시험 답안을 제출했다가 정조의 지적이나 질책을 받게 되면 그 수치심에 신하들이 기가 죽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왕의 비위나 맞추는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정약용도 초계문신 출신이니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사대부를 예로 대하고 사대부의 기개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사대부의 체면을 지켜주는 일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리들은 담당하는 업무도 없다. 학문에만 전념하게 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다. 나라에서 녹봉을 주어가며 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그 성과가 나라 운영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기대에서다. 그런데 그 성과를 평가하지 말라면 국가는 그 제도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가? 공무원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하여 몇 년씩 연수를 시켜주는 제도를 만들면서 그 연수기간에 무슨 공부를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좋은 제도인가?

 

정조가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는 이유는 단순한 평가의 목적뿐만 아니라 독려의 의미도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거기에 폐단이나 문제점이 있으면 개선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초계해서 과시(課試)하는 법은 지금부터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지었다.

 

정약용의 주장은 시대적 제약에 따른 인식의 한계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정조의 초계문신 제도 때문에 조선을 지켜온 국가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정조 치세 후기에 이르면 대신과 육조, 삼사의 관리의 태반을 초계문신 출신이 차지하게 되는데, 삼사의 간관직을 맡게 된 초계문신들이 정조의 눈치를 보느라 왕에 대한 간언이 실종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과 언관을 양대 축으로 해온 조선의 중앙관료 시스템 중 양축(兩軸)의 하나가 무력화됨으로써 조선을 지켜온 국가시스템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국가시스템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국가 운영의 환경이 변하더라도 국가는 늘 같은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지? 조선의 중앙관료 시스템이 변하지 말아야 하는 당위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시스템은 과거에 얼마나 효율적이었으며 또 이후에도 효율적일 것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조를 비난하는 주장에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담고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언관(言官)으로도 불리는 간관(諫官)의 자리는 모든 선비들이 선망하는 청요직(淸要職)이다. 직책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내놓고 간언함으로써 선비의 기개를 드높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미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때문이다.

 

객관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기사를 써야 할 기자가 사주의 눈치나 보는 기사나 쓰고 앉았으면서 그 탓을 사주에게 돌린다면 그것이 합당한 변명인가? 기자 의식 이전에 사람의 기본적 양심 때문으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마땅하다.

먹고 살려고 계속 그 짓을 하고 있으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서 구더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참고 및 인용 : 정조이산어록(손인순, 2008. 고전연구회 사암),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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