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7년.
정조와 홍국영(洪國榮)이 함께 한 기간이었다. 정확히 영조 48년인 1772년 9월 26일에 만나 정조 3년인 1779년 9월 26일에 헤어졌다. 홍국영은 정조보다 나이가 4살 위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정조는 21세, 홍국영은 25세였다.
홍국영은 17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1772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정조를 만나게 된다. 홍국영은 과거에 급제하기는 했지만 그 성적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갑과 3인 을과 7인 뒤의 병과 23인 중 11위였으니 홍국영의 성적은 과거에 급제한 전체 33인 중 21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세손 신분이었던 정조의 측근 자리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을 감안한 영조의 배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부정자(副正字) :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관서인 숭문원(承文院)에서 간행물을 교정하고, 국가 제례의 축문을 필사하거나 검토하는 일을 맡았던 종9품 직제. ▶설서(說書) : 조선 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정8품의 관직 |
풍산 홍씨인 홍국영의 집안은 명문거족이었다. 선조가 아끼던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홍주원(洪柱元)의 후손으로, 혜경궁 홍씨 역시 같은 일가이며 홍봉한, 홍인한은 모두 홍국영의 10촌 할아버지가 된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경주 김씨 가문으로 정순왕후의 인척이기도 했다. 촌수를 따지면 정조와도 12촌 형제가 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영조가 홍국영을 접견하고 “내 손자로다” 하며 반겼다고 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정조가 홍국영을 신뢰하게 된 계기를 전하는 야사가 있다.
어느 날 세손 정조가 영조에게 문안을 갔는데 영조가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를 물었다. 정조는 별 생각 없이 사실대로 『통감강목』넷째 권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강목 넷째 권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 있는데도 읽었단 말이냐?”라고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넷째 권에는 한(漢) 문제(文帝)가 “짐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 소생[側室之子]이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 말에 세손은 엉겁결에 “그 대목은 가려놓고 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영조는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에 가서 세손이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내관이 동궁에 가서 책을 찾자 홍국영이 책을 찾는 이유를 물었다. 내관의 말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한 홍국영은 자신이 책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뒤 ‘側室之子’ 부분을 종이로 붙여 가린 뒤 책을 내주었다. 이를 본 영조는 흡족히 여겼고 세손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나중에 홍국영의 임기응변을 알게 된 세손은 홍국영의 손을 잡고 “내 그대의 재생지은(再生之恩)을 꼭 갚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야사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을 가리켜 ‘얼굴도 예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고 한 일이 있듯이, 홍국영이 평소 영민하고 상황파악에 뛰어난 기질을 보였기에 이런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다.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두었던 영조가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민감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조 치세 후반에 정조의 큰 신임을 얻으며 영의정까지 지냈던 채제공(蔡濟恭)의 「번암집(樊巖集)」에 이와 유사한 일화가 실려 있다.
【영조대왕께서 80여 세쯤 되시자 소일거리가 없어 홍문관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서 옛 책을 소리 내 읽게 했다. 어느 날, 승지에 이어 겸춘추(兼春秋)가 읽기 시작했는데 다음 부분이 바로 <노중련전(魯仲連傳)>이었다. 왕은 침상에 누워 손을 이마에 얹으셨는데, 코 고는 소리가 달아 보였다. 그런데 겸춘추가 문제의 네 글자를 읽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화내며 말씀하셨다. “어떻게 내 앞에서 그것을 읽는단 말인가. 읽은 놈이 누구냐.”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겸춘추(兼春秋) : 사관직(史官職)의 하나로, 정무를 기록하던 관청인 춘추관(春秋館)에 소속된 벼슬 |
여기서 문제가 된 네 글자는 '이모비야(爾母婢也)‘였다. ’네 어미는 종년이다.‘라는 뜻으로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중련전>에,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이 이름뿐인 천자를 질타하며 했다는 말이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조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지금의 임금(정조)께서 세손으로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얼른 대답했다. “신이 내내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그 네 자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정녕코 내가 들었는데, 신료들이 듣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신하들은 세손의 대답을 따라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상의 안색이 조금 풀려서 다시 침상에 누우셨으며, 신하들도 물러 나왔다. 효심이 지극했던 왕으로서 30년을 하루같이 가슴에 맺혔으니 아무리 꿈속이란들 그 네 자를 듣자마자 곧바로 일어나게 된 것이며, 불같은 역정으로 저 미물을 박살내 버리려고 했다. 만약 세손의 기지에 찬 임기응변이 없었더라면 재앙이 어디에까지 이를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후세 사람들에게 성조(聖祖)의 효심과 신손(神孫)의 인애가 그 이치는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를 기록한다.】
세손 시절 정조가 홍국영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정조가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있다는 반증도 된다. 비록 차기 왕으로 내정된 신분이지만 정조의 위치는 늘 불안했다. 홍인한, 정후겸 등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집요하게 세손을 공격했다. ‘세손이 야망을 품고 <자치통감>에서 ‘제왕학’을 특히 공부하더라‘, ‘가끔 시정에 나가 잡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더라’ 같은 유언비를 지어내 세손을 비방하는 것도 모자라, 연로한 영조가 세손에게 청정(聽政)하는 문제를 꺼내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홍인한은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세손의 지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홍인한은 면전에서 대놓고 세손을 무시하는 언행도 자행했다. 이런 세력뿐 아니라 변화무쌍한 영조의 심기 역시 세손에게는 걱정거리였다. 불같은 성격의 영조가 언제 어느 쪽으로 폭발하여 그 불똥이 어떻게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세손은 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국영은 정조에게 민심의 동향이나 조정의 소식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으며, 당시만 해도 홍국영은 특정 당파에 속하지 않았었기에 비교적 안심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였다. 게다가 홍국영은 눈치가 빠르고, 정세 판단 능력도 뛰어난데다 수완도 좋아 점점 더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을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에 “홍국영은 국가가 고립되어 위태했을 때를 당하여, 척리(戚里)와 근습(近習)들이 모두 딴마음을 먹는 사람들이었는데도 국가를 보호한 것은 유독 홍국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한 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어 공(功)이 사직(社稷)에 남게 된 사람”이라고까지 극찬했다.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그리고 넉 달 후에는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9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시켰다. 또한 11월에는 5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로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하는 수어청(守禦廳)의 수장인 종2품 수어사(守禦使)로 임명했다. 홍국영이 이를 사양하며 받지 않자 【내가 지신사(知申事) 의 품질(品秩)을 올려 장임(將任)을 맡기려 한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지체하고 있었던 것은 지신사의 마음속의 정성을 체량(體諒)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근래에 비로소 생각하건대 체량하는 것은 작은 일이니, 지금의 국세는 맡길 수 있는 심복(心服)의 신하에게 위호(衛護)하는 직임을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의(危疑)스러움을 진정시키고 왕실을 돕게 할 수 있겠는가? 지신사가 나의 뜻을 안다면 결코 감히 새로 발탁되었다는 것으로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위패(違牌)는 지신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아니다."(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11월 19일)】라고 하면서 병부(兵符)를 주라고 명하였다.
▶지신사(知申事) : 도승지 ▶장임(將任) : 대장(大將)의 직임(職任) ▶체량(體諒) : 썩 깊이 헤아림 ▶위호(衛護) : 호위. ▶위의(危疑) : 의심이 나서 마음이 불안함 ▶위패(違牌) : 임금이 명패(命牌)를 내어 부르는 명령을 어기고 오지 않음 |
이듬해인 1777년에는 홍국영을 경기일대의 수비를 맡는 군영인 총융청(摠戎廳)의 수장인 총융사로 삼았다가 다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담당하는 금위영(禁衛營)의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원래 금위대장은 종친이나 외척들이 맡아오던 자리였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일어난 자객의 궁궐 침입사건의 여파로 11월에 왕을 호위하는 숙위소(宿衛所)를 새로 설치하면서 숙위대장도 홍국영에게 맡겼다. 명색은 호위소이지만 병조에서 순검(巡檢)에 관한 모든 일을 숙위소를 통하여 거행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문서가 숙위대장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그 나이에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게 된 것이다.
홍국영은 궁 안에 머물면서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며 왕의 호위를 책임지고 그에 더해 군권까지 가졌다. 국정의 주요 사안은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정조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까지 했다. 덕분에 홍국영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위치에 올라섰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홍국영의 처신은 어떠했을까?
훗날 사간원의 정언(正言) 심낙수(沈樂洙)가 올린 상소문에 있는 내용이다.
【천고(千古)에 권간(權奸)은 매우 많았으나 홍국영처럼 교묘하고 참혹한 자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의리를 지켜서 그 공로가 없지 않았으나 경천 욕일(擎天浴日) 의 공훈을 자처하여 일세(一世)를 호령하였습니다. 궁액(宮掖)에 인척을 맺어 더욱 위세를 부리게 되어서는 안으로는 폐부(肺腑)의 친척임을 핑계 삼고 밖으로는 주석(柱石)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마다 그 지휘를 따르고 일마다 그 기식(氣息)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세력이 이루어지고 위력이 설 때에는 혹 공론이 아래에 있을 것을 염려해서 드디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수습할 생각을 하여 일세의 조금 지조를 지킬 줄 알아서 달려가 붙으려 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일투(一套)에 감화시켜 점차 성기(聲氣)를 통하려 하였으며, 위화(威禍)로 두렵게 하고 이록(利祿)으로 꾀어 일세의 사대부(士大夫)가 언뜻 보기에 묶여 있는 것 같아서 한 마디도 공박하는 말을 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정조실록, 정조 4년 3월 19일 기사)】
▶권간(權奸) : 권세가 있는 간신(奸臣) ▶정언(正言) : 사간원의 정6품 관직 ▶경천 욕일(擎天浴日) : 보천 욕일(補天浴日)이라고도 함. 경천 즉 보천은 중국 전설상의 여와씨(女媧氏)가 하늘의 이지러진 데를 기웠다는 고사. 욕일(浴日)은 희화(羲和)가 해를 목욕시킨 고사로, 국가에 큰 공이 있음을 비유한 것. ▶주석(柱石) : 기둥과 주춧돌. 국가의 중임을 맡은 사람. ▶성기(聲氣) : 음성(音聲)과 안색(顔色) |
홍국영이 물러난 뒤의 상소이기 때문에 부풀려진 부분도 있기는 하겠지만 홍국영의 전횡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실제로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홍국영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음으로써, 영조의 총애를 믿고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했던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아들 정후겸(鄭厚謙)에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국가의 일반 관리들은 물론 대신과 원로(元老)들까지도 대궐에 들어가면 먼저 홍국영의 숙위소(宿衛所)에 들어가서 정치를 논의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홍국영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보복을 가했다. 당시 사람들은 홍국영이 제 털끝만 건드려도 보복하는 성미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홍국영은 자신이 누리는 권세에 만족만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찍부터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 안에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바탕으로 두 가지 일을 도모한다. 하나는 노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뜻대로 정조의 후계(後繼)를 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인물한국사(표정훈, 장선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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