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5 - 선정의 현손

從心所欲 2020. 6. 19. 17:43

[엘리자베스 키스<해뜰 무렵의 동대문(East Gate, Seoul, Sunrise)>, 1920년, 채색목판화]

 

정조가 즉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몇 건의 상소가 연속으로 올라왔다. 모두 임오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는 정조를 격발하여,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지목된 노론 인사들을 치죄함으로써 노론을 공격하려는 소론의 공세였다.

그러나 정조는 상소를 올린 것과 관련된 인물들을 친국하면서,

【선대왕의 하교에서 이르시기를, ‘임오년에 관계된 일은 혹 의리에 있어 충분히 옳은 것 같다 하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또한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앞날에 이 일에 대해 간범(干犯)하는 자는 빈전(殯殿) 뜰에서라도 반드시 준엄하게 국문해야 하고, 비록 성복(成服) 이전이라 하더라도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오늘 친히 국문을 하는 것은 곧 선왕의 뜻을 따르고 선왕의 뜻을 밝히려는 것이다."(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4월 1일)】라고 한 뒤 상소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정조의 본 마음이 어떻든 간에 할아버지 영조가 죽은지 한 달도 안 되어 아직 그 관이 궁중에 있는 상황에서 영조의 처분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론에서 이미 사망한 소론 대신들인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의 관직을 추탈할 것과 생전에 송시열과 갈등을 빚었던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를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정조는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의 관직을 추탈하는 한편 징계 중에는 상소를 올릴 수 없음에도 상소를 올린, 전 순천부사 김약행(金若行)에게는 평생 벼슬에 쓰지 않는 금고(禁錮) 처분을 내렸다. 그로부터 보름 뒤에는 다시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비난하는 한 유생(儒生)의 상소가 올라와 노론이 발칵 뒤집혔는데 정조는 상소를 올린 유생(儒生)을 추자도로 귀양 보냈다. 하지만 노론에서는 또 이 유생의 사형과 윤선거와 윤증 두 부자의 삭탈관직을 요구하는 한편, 종묘에서 효종에게 제사지낼 때 송시열도 공로 있는 신하로 같이 제사지낼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이 상소에 "며칠 전에 승선(承宣)이 아뢴 말이 바로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와 맞기에 바야흐로 뜻을 결단하여 시행하고 싶었다마는, 윤선거 부자의 일은 이미 처분을 한 것이다."라고 답을 하였다. 여기서 정조가 말한 승선(承宣)은 홍국영이다. 이때 홍국영은 정조에게 그 해가 마침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린 지 60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내세워,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건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승선(承宣) : 원래 고려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한 관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조선에서는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와 같은 관직이다.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승정원이 승선원으로 개편되면서 승지도 승선으로 개칭되었다.

▶병신처분(丙申處分) : 1716년(숙종 42) 송시열과 윤증 간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에서 숙종이 윤증이 잘못한 것으로 판정한 정치적 처분. 송시열과 윤증간의 싸움을 두 사람이 살던 회덕(懷德)과 이산(尼山)의 앞 글자를 따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하는데, 분쟁이 두 사람의 제자들에게까지 번져, 결국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론과 노론이 한참 서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국영이 노론의 주장을 지지하는 의견을 정조에게 보고했고, 정조도 그 뜻에 동조하고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노론으로 끝났다. 추자도로 귀양 가던 유생은 중도에 사망하고, 윤선거와 윤증은 관직이 추탈되고 두 부자의 문집을 훼손시키고 그들을 제향 하던 사당의 현판을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당색이 없던 홍국영이 갑자기 노론을 지지하고 나서게 된 계기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데는 그 편이 유리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홍국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송시열의 현손(玄孫)인 송덕상(宋德相)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작업을 펼쳤다. 송덕상은 영조 때에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영조는 이후 세자시강원의 자의(諮議),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계속 급을 높여가며 관직을 제수했지만 송덕상은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괘씸하게 여겨 이후로는 모르는 인간 취급을 했다.

정조는 즉위년 6월에 송덕상에게 동부승지를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그리고 6일 뒤에는 다시 이조참의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그 며칠 뒤 뒤늦게 송덕상이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문이 도착하였다. 정조는 다시 20여일 뒤에 송덕상을 예조(禮曹)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예조참의에 제수하였다. 그래도 송덕상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종2품의 한성부 우윤(右尹)에 제수하였다. 그럼에도 송덕상은 1년 반이 지나도록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송덕상은 좨주[祭酒] 직은 별말 없이 수행하였다. ‘좨주’는 성균관(成均館)의 종3품 관직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으로 알려진 자리였다. 정조 2년 10월에 다시 한성부 좌윤(左尹)에 제수했지만 송덕상은 다시 또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교지(敎旨)를 내려 송덕상을 타이르고 독려하며 조정에 나오라고 했다. 그러자 송덕상은 임명장인 고신(告身)에 청나라 연호가 있는 것을 트집 잡았다. 송시열도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 고신의 연호를 명나라 것으로 바꿔주었던 사례를 따라 송덕상의 것도 명나라 연호로 고쳐주었다. 그제야 송덕상은 조정에 나아왔다. 송덕상이 정조를 처음 만난 것은 정조 2년 12월 12일로, 정조가 처음 부른지 무려 2년 반이 지난 후였다.

 

한껏 성가를 높인 후 조정에 나온 송덕상은 그 3일 뒤 「논어」를 강하는 주강(晝講) 자리에 경연관으로 참석했다. 경연 말미에 홍국영은 “이 전당(殿堂)은 곧 효묘조(孝廟朝) 때 선정(先正)을 접견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고 모유(謨猷)를 꾀하는 데 힘쓰던 장소입니다. 이제 또 성상께서 이 전당에 임어하셔서 선정의 후손을 불러들여 글에 임하여 뜻을 강론하면서 조용히 사대(賜對)하시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라며 송시열과 송덕상을 띄워줬다. 뿐만 아니라 "유현(儒賢)의 나이가 70세에 가까운데, 근력이 아직 강건하다 하나 객지에서 거처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극심하고, 또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아들 송환정(宋煥程)이 바야흐로 능관(陵官)을 맡고 있어 왕래하기가 곤란하니, 상당한 자리로 서로 바꾸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정조에게 건의하여 송덕상의 아들 혜릉 참봉(惠陵參奉) 송환정을 교관(敎官)과 서로 바꾸라는 명을 얻어내 주었다.

▶선정(先正) : 선대(先代)의 어진 신하. 여기서는 송시열을 지칭함.

▶모유(謨猷) :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우는 원대하고 담대한 계략. 여기서는 ‘북벌(北伐)’을 의미함.

▶사대(賜對) :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함

▶유현(儒賢) : 유학(儒學)에 정통하고 그 말과 행실이 유학의 진리에 부합(符合)한 사람. 여기서는 송덕상을 가리킴.

▶교관(敎官) : 조선시대 각급 교육기관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관원을 의미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한양의 4학(四學)에서 교육하는 정9품의 훈도(訓導)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일설에 의하면 송덕상이 조정에 나오면서 원하던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삼망(三望)이라 하여 관리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면 임금이 낙점(落點)하는 자가 임명되는 방식이었다. 홍국영은 이조(吏曹)를 움직여 송덕상을 대사헌의 삼망 명단에 올렸는데, 홍국영은 어렵게 조정으로 불러들인 송덕상인만큼 그의 이름을 보면 정조가 당연히 송덕상을 낙점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정조는 송덕상을 선택하지 않았다. 위의 경연이 있던 날인 정조 2년 12월 15일 정조는 오재순(吳載純)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하고 송덕상은 경연관에 임명했다.


홍국영은 영조 때에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아내는가 하면 노론 내에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비록 송시열 계라 할지라도 보복을 가하며 노론에서의 입지를 키워나가던 중이었다. 홍국영은 조정에 나온 송덕상을 자신의 측근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노론에서의 신망과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후에 실록의 사관이 홍국영이 송덕상을 ‘자신의 당여(黨與)로 삼고 있었다’는 평을 쓸 정도로 송덕상도 홍국영을 지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당여(黨與) : 한편이 되는 당류(黨類). 붕당(朋黨)

 

홍국영이 사임하기 보름전인 정조 3년 9월 11일 송덕상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송덕상은 자리를 사양하는 상소를 남긴 뒤 정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뒤늦게 홍국영이 사임했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소를 올렸다.

 

【이조 판서 송덕상(宋德相)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옛 군자(君子)는 전(殿)에 오르면 구차하게 같이하지 않고 전에서 내려가면 실색(失色)하지 않았다 하는데, 지금의 군자는 전에 오르면 나타나게 배척하는 것이 없고 전에서 내려가면 남몰래 서로 비방하여 반드시 쫓아내고서야 말려 하니, 그것이 세도(世道)·국사(國事)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지난달의 뇌변(雷變)은 한 번도 이미 놀라웠는데 다시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정에 납시면 공경하고 장엄하시나 은미한 곳에서는 혹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까?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나, 취하고 버리는 사이에는 혹 도리를 다하지 못하십니까?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대할 때에 인욕(人慾)이 혹 낍니까? 정령(政令)이 일용(日用)되는 사이에 허위가 혹 섞입니까? 자신을 책망하고 직언(直言)을 구하며 찬선(饌膳)을 줄이고 음악을 철폐하나 실심(實心)이 천의(天意)에 성실하지 못합니까? 검약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며 백성을 염려하여 폐단을 없애나 실혜(實惠)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습니까? 공경(公卿)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집을 근심하는 뜻에 미치지 못하고 번읍(藩邑)의 봉공(奉公)을 급하게 여기는 것이 영사(營私)를 급하게 여기는 것만 못합니까?

듣건대,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겠다는 청을 특별히 윤허하셨다 합니다. 홍국영의 한 몸은 성궁(聖躬)의 안위(安危)에 관계되고 국가의 휴척(休戚)이 걸려 있는데, 성명(成命)이 내려졌을 때에 후설(喉舌)의 신하가 복역(覆逆)하지 않고 삼사(三司)의 관원도 쟁집(爭執)하지 않았으며 대신(大臣)이 말이 없고 재상이 방관하였으니, 어찌 속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다행히 여겨서 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를 곧 인용하여 시행하고 홍국영의 사원(私願)만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정조실록, 정조 3년 10월 6일)】

▶뇌변(雷變) : 낙뢰(落雷)의 변(變). 특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같은 데 벼락이 떨어지는 변(變)

▶인욕(人慾) : 사람의 욕심(慾心)

▶휴척(休戚) : 편안함과 근심 걱정
찬선(饌膳) : 음식물(飮食物), 왕의 상에 오르는 반찬.
실혜(實惠) : 실질적 혜택

▶후설(喉舌) : 왕명의 출납(出納)과 정부의 중대한 언론을 맡았다는 뜻으로 승정원의 승지(承旨)를 이르는 말

▶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승정원에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다시 아뢰는 것.

 

상소를 시작하는 부분에 송덕상이 정조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형식만 질문이지 말은 정조가 그런 인물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종묘 사직에 자꾸 벼락이 치는 이유는 왕이 잘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 뒤로 이어진 말들도 감히 신하가 왕에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송덕상이 아니었다면 왕을 능멸한 죄로 잡아들여 국문해야 된다는 간관들의 탄핵이 잇따랐을 것이고, 만일 영조였다면 즉시 친국을 하고 물고를 낸 뒤 목을 베었을 것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유현(儒賢) 송덕상이 이성을 송두리째 잃을 만큼 홍국영의 사임과 그를 허락한 정조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홍국영이 원한다고 해서 홍국영의 사직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를 잡아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만큼 송덕상은 홍국영의 사람이었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선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 7 - 9월 26일  (0) 2020.06.23
정조 6 - 무리수 승부수  (0) 2020.06.21
정조 4 - 일인지하  (0) 2020.06.17
정조 3 - 군사(君師)  (0) 2020.06.12
정조 2 - 피곤한 왕  (0) 202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