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6 - 무리수 승부수

從心所欲 2020. 6. 21. 14:04

홍국영은 당쟁의 세력관계를 교묘히 활용해서 정권에 방해되는 세력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우선은 노론의 의리를 중히 여겼던 김종수, 정이환(鄭履煥) 등과 합세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동조했던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죄를 물어 쳐냈고, 이후 정순왕후의 친동생인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아넣었다. 물론 이는 홍국영의 단독 행보가 아니라 척신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정조의 뜻’은 거의 홍국영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정조 주변의 척신 세력들을 정리하고 난 홍국영은 정조의 후계에 주목했다. 정조는 그때 아들이 없었다. 정조의 비(妃)는 효의왕비(孝懿王妃) 김씨다. 정조보다 한 살이 어린 김씨는 영조 38년인 1762년 10세 때에 세손인 정조와 혼인하여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었다. 효의왕비는 현종의 장인이었던 김우명(金佑明)의 후손으로, 김우명은 대동법 시행에 목숨을 걸었던 김육(金堉)의 아들이기도 하다. 효의왕후는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한데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섬기고, 시누이가 되는 사도세자의 딸들인 청연(淸衍), 청선(淸璿) 두 군주(郡主)와도 우애가 돈독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고 조야(朝野)에서 칭송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군주(郡主) : 왕세자(王世子)의 정실에게서 난 딸에게 주어지는 봉작(封爵). 내명부 정2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조실록》정조 2년 6월 21일자 기사에는 【호조 참의 홍낙춘(洪樂春)의 딸로 빈을 정하였고, 빈청(賓廳)에서 작호(爵號)를 원빈(元嬪)이라 하고 궁호(宮號)를 숙창(淑昌)이라 하기로 의정(議定)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홍낙춘은 바로 홍국영의 아버지다. 홍낙춘의 직위는 부사과(副司果)였는데 딸이 빈(嬪)으로 간택(揀擇)되자 오위(五衛)의 종6품 무관직(武官職)인 부사과에서 바로 전날에 정3품 당상관인 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정조와 원빈은 6월 27일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빈(嬪)은 후궁에게 주어지는 가장 높은 품계다. 왕의 후궁들에게 주어지는 내명부 품계는 종4품인 숙원(淑媛)에서부터 종1품의 귀인(貴人), 정1품의 빈(嬪)까지 8개가 있다. 빈(嬪)의 품계는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나,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승은(承恩)을 입어 후궁이 되어 왕자를 낳고 왕의 총애를 얻었을 때 주어진다. 따라서 홍국영의 누이에게 처음부터 정1품 빈의 품계가 주어진 것도 정상적이지는 않은 일이다. 거기다 그 앞에 붙은 ‘원(元)’자는 논란의 소지가 다분했다. 빈 앞에 붙이는 글자는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통상 熙, 禧, 淑, 肅, 宜, 孝, 信 등과 같이 아름다운 뜻을 나타내는 글자를 골라 붙여준다. 경종의 생모인 희빈(禧嬪) 장씨는 복 희(禧)자를 붙였었다. 그런데 홍국영의 누이에게는 이제껏 쓴 적이 없는 으뜸 원(元)자를 붙인 것이다.

임금의 맏아들로서,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를 원자(元子)라고 하는데, 굳이 이 원(元)자를 끌어다 원빈(元嬪)이라는 작호를 내린 것은 많은 억측을 만들어낼 소지가 충분했다. 혜경궁 홍씨는 훗날 「한중록」에 이렇게 적었다.

【호를 원빈이라 하고 궁호를 숙창이라 하니, 원(元)자 뜻부터 흉하더라. 곤전이 계신데 어디서 비빈을 원(元)자로 일컫는 도리가 있으랴.】

▶곤전(坤殿) : 왕비의 처소(處所). 또는 왕비.

 

그렇다. 엄연히 정비인 효의왕비가 있는데 ‘으뜸 원’자를 쓴다는 것은 예의도 아닐뿐더러 효의왕비를 도발하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일이다. 일부러라도 피하여야 할 일이었다. 이런 비상식적 글자를 정조가 골랐을 리는 없기에 홍국영의 입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누이동생이 원자를 낳기 간절히 바라는 심정에서 그런 작호를 고집했을 듯싶다. 이때만 해도 홍국영은 누이동생이 머지않아 원자를 낳는 날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국영의 바람은 허망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가례를 올린 지 만 1년도 안 된 정조 3년 5월에 원빈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3년 5월 7일자에는 원빈의 졸기(卒記)가 실렸는데 간단한 장례 기록 끝에 사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홍씨(洪氏)의 빈장(殯葬)에 관한 절차를 예관(禮官)이 모두 참람한 예(例)를 원용(援用)하였고 송덕상은 마땅히 공제(公除)가 있어야 한다고까지 하였으나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예관(禮官)이 참람한 예(例)를 원용(援用)‘한 대표적 사례는 정조가 직접 원빈의 관이 있는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거애(擧哀)하게 한 것이다. ’거애‘는 초상 때 곡읍(哭泣)하는 예로, 머리를 풀고 울면서 초상이 난 것을 알리는 행위다. 왕비도 아닌 일개 빈의 장례에 왕이 이런 거애를 한 예는 없었다. 공제(公除)는 국상(國喪)때 조의(弔意)를 표하는 뜻으로 일정 기간 동안 공무(公務)를 보지 않고, 26일간의 상사(喪事)의 기일이 지난 후에 상복을 벗는 일이다. 조선 예학의 태두(泰斗)로 일컬어지는 송시열의 현손이 임금이나 왕비의 장례 때나 적용할 예를 일개 후궁의 장례에 들고 나온 것이다. 명망 높은 유현 송덕상이 세도가의 식객 같은 처신을 마다하지 않게 된 형국이었다.

원빈의 죽음으로 홍국영의 원대한 꿈은 무산되었다. 충격이 워낙 컸던지 그 영민했던 홍국영이 점점 더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한중록」에 기록된 구절이다.

【제 누이 홀연히 죽으매 국영이 독살스러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누이가 죽은 것을 감히 곤전에게 의심해 선왕(先王)을 충동하고 대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 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

▶곤전 : 여기서는 정조의 비 효의왕비
▶선왕 : 여기서는 정조

 

[엘리자베스 키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Returning from the Funeral)>, 1922]

 

홍국영은 자신의 동생이 독살당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효의왕비는 성품이 곧고 깨끗하여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았으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자신이 거하는 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궐내의 재물은 공물(公物)이라 하여 사사로이 친정집에 재물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극진한 효성, 검소한 생활태도뿐 아니라 정조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늘 자숙하며 일체 정사에 개입한 일이 없었던 효의왕비에게 난데없이 누이동생의 죽음에 대한 혐의를 둔 것은 홍국영의 대단한 무리수였다. 정조가 언제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효의왕비를 잘 알았을 정조는 이런 홍국영의 행태에 경악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조는 이때부터 홍국영을 경계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조시대 신하의 권력은 모두 왕이 준 권력이다. 아무리 권세가 크더라도 왕비, 그것도 왕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왕비를 신하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위다. 그동안 누린 권세에 취해 안하무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홍국영은 자신의 지나침을 몰랐다. 그리고 한발자국을 더 나갔다.

 

원빈 장례 때의 제관(祭官)은 모두 홍국영이 선정했는데, 홍국영은 은원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 대전관은 제전(祭奠)에서 임금을 대신하여 신위(神位)에 제주(祭酒)를 드리는 제관(祭官)이다.

정조에게는 이복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肅嬪林氏) 사이에 낳은 아들이 은원군(恩彦君)이다. 정조보다는 두 살 아래로 뒷날의 철종이 바로 그의 손자다. 이담은 바로 은원군의 맏아들이었다. 홍국영은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는 상계군(常溪君)이었던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군(完豊君)으로 바꾼다. ‘완’은 완산으로도 불리는 전주 이씨에서, ‘풍’은 풍산 홍씨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홍국영은 자신의 야심을 적나라하게 군호에 담는 치기를 드러냈다. 원빈의 양자가 된 완풍군을 정조의 후계로 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간 것이다.

 

원빈이 죽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 송덕상이 화완옹주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金龜柱)의 토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앞에다 이런 내용을 슬쩍 넣었다.

 

【아! 오늘날의 국사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만하다는 것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는 국본(國本)이 외롭고 단약하며 밖으로는 흉얼(凶孼)들이 잠복해 있어서 4백 년의 종사(宗社)가 어느 곳에서 편안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지난 여름 간측(懇惻)한 자지(慈旨)를 내려 현문(賢門)에 간택(揀擇)할 것을 명하여 이에 숙녀(淑女)를 얻었으므로 신민(臣民)이 크게 축하하면서 오직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기만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천리(天理)는 믿기가 어렵고 방운(邦運)이 불행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유유(悠悠)한 종국(宗國)의 대계(大計)를 생각하니 그저 아득하기만 합니다. 대저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성학(聖學)을 힘쓰고 치도(治道)를 강마하는 것을 대본(大本)과 급무(急務)로 삼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신의 우견(愚見)도 이 또한 임금에게 고하는 의례적인 말에 속하는 것입니다만, 생각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춘추(春秋)가 이미 한창이신데 사속(嗣續)이 점점 더디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늘이 방가(邦家)를 돕는다면 즉백(則百)의 기쁨은 절로 그 시기가 있겠습니다만 널리 구하는 방도가 날이 갈수록 더욱 급한 것입니다. 모양(某樣)의 도리(道理)에 이르러서는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 가리켜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는 방도에 있어 또한 아랫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반드시 성념(聖念)에 상량(商量)하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정조실록》 정조 3년 6월 18일)】

▶국본(國本) :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를 이을 세자 또는 태자를 달리 이르는 말
▶흉얼(凶孼) : 흉측한 재앙
▶숙녀(淑女)를 얻었으므로 : 홍국영의 누이동생을 간택하여 원빈으로 앉힌 것을 의미
▶방운(邦運) : 국운(國運)
▶사속(嗣續) : 대를 잇는 아들. 후계자.
▶즉백(則百) : 왕자(王子)를 많이 얻는 것. 주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과 비(妃)인 태사(太姒)가 모두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으므로 후손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찬미한 데서 온 말.
▶모양(某樣)의 도리(道理) : 방법과 취해야 할 방식

 

원빈을 얻어 온 나라가 그로부터 왕자를 얻기만을 기대했는데 국운이 안 따라서 무위로 끝났으니 빨리 왕자를 얻을 다른 방도를 마련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자신은 말할 수 없지만 왕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알아서 시행하라는 것이다. 모호한 말로 채웠지만 후대의 사관은 이를 은원군의 아들 이담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라는 뜻으로 보았다.

 

이때 정조의 나이는 28세였다. 혈기 방장한 나이다. 즉위한 지 4년차에 건강에 특별한 이상도 없었다. 왕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대놓고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송덕상이 난데없이 국본이 없는 것을 걱정하고 나선 것이다. 혹 그런 걱정이 타당하다면 새로운 후궁을 들이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그것도 시기가 있는 것이다. 원빈이 죽었을 때 26일간 공무를 중지하는 공제를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송덕상이 설마 원빈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새로 후궁을 얻으라는 뜻으로 이런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정조도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정조는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역적 토죄 건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비답을 내렸다. 이 상소가 송덕상의 돌출행동인지 홍국영과의 합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정조도 아마 그런 의문에 대해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원빈 사망 이후 홍국영이 벌인 행태는 궁궐 내 거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미워하며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그 세력에는 홍국영에 의하여 일가가 피해를 입은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국영도 주위의 정보를 통하여 형국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고, 특히나 정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홍국영은 승부수를 던졌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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