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의 《정조실록》 기사를 읽다보면 여러 가지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임을 예상한 듯하고, 신하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말을 조심하고 있다. 사임을 발표하는 홍국영은 여전히 오만방자함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구차하게 상소를 올린 것은 조급합과 당황함으로 보인다.
사관은 위 기사의 사론에 【임금이 과단(果斷)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끝내 보전하려 하고 또 그 헤아리기 어려운 짓을 염려하여 밖에 선포하여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함께 말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풍자하여 떠나게 하였다.】고 적었다. 홍국영의 사임은 그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정조가 홍국영을 따로 만나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물러나기를 권유한 결과라는 것이다.
홍국영은 비서실장인 도승지다. 물러날 생각을 했으면 정조에게 조용히 사직 의사를 밝히고 물러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물러나는 뜻을 밝혔다. 믿는 구석이 있었고 이것이 홍국영의 승부수였다. 홍국영은 평소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조정의 수많은 관료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들 앞에서 사임을 발표하면 대신들이 나서서 자신을 변호하며 정조의 결심을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물러나와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당황한 홍국영은 조급함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어떻게든 자신의 처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마도 홍국영은 아침에 사임 선언을 하면서도 자신이 진짜로 물러나게 될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궁궐을 나오면서도 머지않아 정조가 자신을 다시 부를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홍국영은 그만두는 자신에게 정조가 내린 봉조하(奉朝賀)라는 직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은 듯하다. 봉조하는 조선시대 공신이나 동서반 당상관 등이 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날 때 주어지는 관직이다. 관직을 그만둔 뒤의 생계를 돕는 의미에서 단지 소정의 녹(祿)을 지급하기 위해 특별히 내리는 벼슬로 따로 직무도 없다. 말하자면 다시 벼슬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나이 많아 머리가 허연 사람들에게 주어지던 벼슬이 홍국영처럼 젊은 사람에게 주어진 유례가 없었다. 그래서 홍국영에게는 ‘흑두(黑頭) 봉조하’라는 별명이 붙었다. 홍국영은 자신이 공신이기 때문에 이 벼슬이 내려졌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조는 다시 벼슬할 생각 말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열흘 뒤인 10월 6일, 홍국영의 사직을 힘써 말리지 않은 옥당(玉堂)들의 파직을 요청하는 상소, 홍국영의 사직에 침묵을 지킨 대신들을 비난하는 상소, 그리고 홍국영의 파직이 부당하다는 송덕상의 상소까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모두 같은 날 홍국영의 사직과 관련된 세 건의 상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형세 변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다음 해인 정조 4년 1월, 정조는 홍국영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홍낙순(洪樂純)의 직을 삭탈(削奪)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홍국영이 다시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입을 다물고 있던 조신(朝臣)들이 일제히 홍국영의 치죄를 요구하고 나섰다. 2월 26일 홍국영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하교가 내려졌으나 귀양과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는 잇따랐다. 급기야는 송덕상마저도 “신이 간사한 정상을 일찍 간파하지 못하고 지각없이 망언한 죄가 여기에서 나타났습니다."라며 자신이 홍국영의 사직을 만류한 죄를 처벌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바뀐 후에도 홍국영 처벌에 대한 주장이 계속되면서 결국 홍국영은 고향에서 횡성현(橫城縣)으로 방축되었다가 다시 또 강릉부(江陵府)로 방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홍국영은 술로 소일하면서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81년 4월,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실록》정조 5년 4월 5일자에 실린 ‘홍국영의 졸기’에 의하면 정조는 홍국영의 죽음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일언이폐지(一言而蔽之)하고, 이는 곧 나의 과실이다."
정조는 홍국영에 관한 일을 모두 자신의 허물로 돌렸다. 반면, 궁중을 떠난 홍국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늘 자신을 돌아보며 수기(修己)에 힘썼던 임금을 가까이에 모시면서 조금이라도 배우고 느낀 것이 있었다면, 「대학」의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에도 신중하게 행동한다(故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을 떠올리며 더욱 자신을 경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제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자신을 반성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비운을 원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 비운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정조에 대한 원망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논어」<위령공> 편에 이런 공자 말씀이 있다. “군자는 일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홍국영이 사직한 날의 기사 말미에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홍국영은 본디 학문이 없고 행검(行檢)이 없으며 성질도 가볍고 사나워서 동배(同輩)에 끼지 못하였다. 을미년, 병신년 임금이 춘저(春邸)에서 외롭고 위태로울 때에 그가 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 등 역적들과 원한이 있기 때문에 주연(胄筵)에 데려다 두었는데, 언동이 약빠르고 또 능히 저들이 하는 짓을 죄다 고하고 꺼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특별히 총애하였다. 그래서 국변인(國邊人)으로 자처(自處)하고 역적을 친다고 핑계하여 제 뜻대로 다하였다.
임금이 등극하고서 한 해 안에 재상(宰相) 줄에 뛰어오르고 지신사(知申事)로서 숙위(宿衛大將)을 겸하여 중병(重兵)을 손에 쥐고 금중(禁中)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와 대각(臺閣)의 언론과 양전(兩銓)의 정주(政注)를 다 먼저 결정한 뒤에야 위에 올리니, 공경(公卿)·백집사(百執事)부터 악목(岳牧), 서관(庶官)까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뜻밖의 재앙이 당장 오므로, 온 세상이 두려워서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여염집에서 사사로이 말하는 자일지라도 다 지신사라 부르고 감히 그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못하였다..........(중략)...
홍국영이 제 죄악이 임금에게 깊이 밝혀진 것을 스스로 알아서 감히 항명(抗命)하지 못하고 드디어 부신(符信)을 바치고 나가서 강교(江郊)에 살았다. 드디어 삼자함(三字銜)을 주었는데 온 조정이 당황하고 놀라워하며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은 대개 임금의 큰 인애(仁愛)와 큰 도량 때문이다.
그가 숙위소(宿衛所)에 있을 때에 의녀(醫女), 침선비(針線婢)를 두고서 어지럽고 더러운 짓을 자행하였고, 거처하는 곳에 임금이 거처하는 곳과 담 하나가 막혔을 뿐인데 병위(兵衛)를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마치 사삿집과 같았고, 방 안에는 늘 다리가 높은 평상을 두고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았는데 경재(卿宰)가 다 평상 아래에 가서 절하였고, 평소에 말하는 것은 다 거리의 천한 사람이 하는 상스럽고 더러운 말투이고 장로(長老)를 꾸짖어 욕하고 공경(公卿)을 능멸하였으므로, 이때부터 3백 년 동안의 진신(搢紳)·사대부(士大夫)의 풍습이 하루아침에 땅을 쓴 듯이 없어졌다 한다. (《정조실록》, 정조 3년 9월 26일)】
▶행검(行檢) :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것. 신중히 행동함. ▶춘저(春邸) : 세자궁. ▶주연(胄筵)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국변인(國邊人) : 충신(忠臣) ▶양전(兩銓) : 이조와 병조 ▶정주(政注) : 인물을 심사하여 벼슬아치에 대한 임면과 출척을 결정하는 일 ▶공경(公卿)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공(三公)과 의정부의 좌·우찬성과 육조판서, 한성판윤의 구경(九卿)을 아울러 이르는 총칭 ▶백집사(百執事) :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 하급 관리 ▶악목(岳牧) : 지방관 ▶서관(庶官) : 백관(百官). 모든 관리. ▶경재(卿宰) : 동반(東班) 2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통칭하는 말. 재상(宰相). ▶진신(搢紳) : 벼슬아치의 총칭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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