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10 - 정유절목

從心所欲 2020. 6. 28. 07:48

[엘리자베스 키스 <원산>, 1919]

 

즉위한지 만 1년이 된 정조 1년 3월 21일, 정조는 이런 하교를 내린다.

 

【"옛날 우리 선조(宣祖)대왕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여 기우는 데 있어 방지(旁枝)를 따지지 않는 것인데 인신이 충성을 바침에 있어 어찌 반드시 정적(正嫡)에게만 해당하겠는가?’ 하였으니, 위대한 성인(聖人)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설립한 규모(規模)에 있어 명분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여 요직(要職)은 허통(許通)시켜도 청직(淸職)은 허통시키지 않는 것으로 이미 옛사람이 작정(酌定)하여 놓은 의논이 있다. 지난해 대각(臺閣)에 통청(通淸)하게 한 것은 실로 선대왕(先大王)께서 고심(苦心)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 그 일이 구애되는 데가 많아 도리어 유명무실한 데로 귀결되어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아! 필부(匹夫)가 원통함을 품어도 천화(天和)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더구나 허다한 서류(庶流)들의 숫자가 몇 억(億)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사이에 준재(俊才)를 지닌 선비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런데도 전조(銓曹)에서 이미 통청한 시종(侍從)으로 대하지 않았고 또 봉상시(奉常寺)나 교서관(校書館)에 두지 않았으므로 진퇴(進退)가 모두 곤란하고 침체를 소통시킬 길이 없으니, 바짝 마르고 누렇게 뜬 얼굴로 나란히 죽고 말 것이다.

아! 저 서류들도 나의 신자(臣子)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寡人)의 허물인 것이다. 양전(兩銓)의 신하들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소통시킬 수 있는 방법과 권장 발탁할 수 있는 방법을 특별히 강구하게 하라. 그리하여 문관(文官)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고 음관(蔭官)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으며 무관(武官)은 아무 관(官)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계제(階梯)를 작정(酌定)하여 등위(等威)를 보존할 수 있도록 그 절목(節目)을 상세히 마련하여 사로(仕路)를 넓히도록 하라."

(정조실록, 정조 1년 3월 21일)】

▶방지(旁枝) : 곁가지

▶정적(正嫡) : 본처에게서 낳은 적자(嫡子)

▶지벌(地閥) :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문벌(門閥). 벌열(閥閱).

▶청직(淸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으로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병조(兵曹),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의 벼슬로, 과거(科擧) 출신자만이 임용될 수 있었다.

▶대각(臺閣)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통청(通淸) : ‘청관(淸官)’이라 불리는 홍문관 관원이 되는 자격을 얻는 일

▶천화(天和) : 천지자연의 조화로운 기운

▶몇 억(億) : 몇 십만

▶전조(銓曹) : 문무관의 선발을 담당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양전(兩銓)이라고도 함.

▶침체 : 벼슬이나 지위가 오르지 못함

▶신자(臣子) : 신하(臣下). 자(子)는 접미사.

▶음관(蔭官) : 과거에 의하지 않고, 다만 부조(父祖)의 공으로 하는 벼슬인 음직(蔭職)의 관원

▶사로(仕路) : 벼슬길

▶절목(節目) : 규칙의 조목, 조항. 또는 항목.

 

정조가 서얼 등용을 위한 영을 내린 것이다. 이 기사에 사관은 이렇게 사론을 달았다.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法)이다. 처음 한 사람의 건의(建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국은 백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재주와 학문이 동류 가운데 뛰어난 선비라 할지라도 대부분 다 폐기시키고 기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인재를 낸 뜻에 맞는 일이겠으며 왕자(王者)가 어진 인재를 기용하는 도리이겠는가?】

 

왕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서얼을 등용하는 절목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실시되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분노하였다.

 

【조강(朝講)과 차대(次對)를 겸하여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서류(庶類)에 대한 절목(節目)에 관해 성명(成命)을 내린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동정(動靜)이 없다. 지금 듣건대 대신(大臣)들은 전장(銓長)과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대관(大官)은 백관을 전부 다스리기 때문에 옛날에는 구경(九卿) 이하를 초치하여 뜰에 세워놓고 책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여 매양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폐(堂陛)가 엄하지 않은 것도 또한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행공(行公)한 이조·병조 판서는 아울러 종중추고(從重推考)하고 달려가서 즉시 상확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년 5월 5일)】

▶전장(銓長) : 문무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던 이조와 병조의 판서(判書)

▶당폐(堂陛) : 임금과 신하. 원래의 뜻은 전당(殿堂)과 섬돌

▶행공(行公) : 공무(公務)를 집행(執行)함

▶종중추고(從重推考) : 두가지 이상의 죄 중에 무거운 죄를 좇아 캐어서 밝힘

 

그렇게 하여 작정된 서류소통절목(庶流疏通節目)이 1777년 정유년에 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정유절목(丁酉節目)이며, 그 내용은 이렇다.

 

-. 문관(文官)의 분관(分館)과 무관(武官)의 시천(始薦)은 전대로 교서관(校書館)이나 수부천(守部薦)에 의하여 시행한다.

 

-. 요직(要職)을 허통시키는 것은 곧 문관의 참상(參上)인 것으로 호조·형조·공조를 말한다. 음관(蔭官)·무관(武官)은

   응당 논할 것이 없으며 해사(該司)의 판관(判官) 이하의 자리는 음관·무관이라도 응당 구애되는 것이 없게 하되

   능(陵)·전(殿)·묘(廟)·사(社)·종부시(宗簿寺) 이 다섯 상사(上司)의 낭관(郞官)·감찰(監察)·금도(禁都) 등의 자리도

   논할 것이 없다.

 

-. 문관·무관의 당하관(堂下官)은 부사(府使)를 상한선으로 한정하고 당상관(堂上官)은 목사(牧使)로 한정한다. 음관의

   생원(生員)·진사(進士) 출신은 군수(郡守)를 허락하며 그 가운데 치적(治績)이 있는 자는 부사(府使)를 허락한다.

   생원·진사와 인의(引儀)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縣令)으로 한정하며 그 가운데 치적이 있는 자는 군수를 허락한다.

 

-. 문신(文臣)의 분관(分館)은 운각(芸閣)으로 한정하는데 직강(直講) 이하의 자리는 아울러 구애받지 않는다.

   무신(武臣)으로서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訓鍊院) 부정(副正)은 거론하는 것이 부당하지만

   중추부(中樞府)는 구애받지 않는다.

 

-. 오위(五衛) 장(將)은 문관·무관·음관의 당상은 아울러 구애 받지 않으며, 무신으로서 우후(虞候)를 지낸 사람은 같은

   예(例)로 대우한다.

 

-. 지금 여기에 조열(條列)한 것은 상례(常例)와 항규(恒規)에 의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가운데 문식(文識)과

   행의(行誼)가 뛰어난 자와 재기(才器)와 정적(政績)이 드러난 자는 의당 상례에서 벗어나 기용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반드시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허여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묘당(廟堂)과 전관(銓官)의 품지(稟旨)를

   거쳐 시행한다.

 

-. 우리나라는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 문벌을 숭상하고 있으므로 똑같은 서류(庶類)이니 분별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본종(本宗)의 가세(家世)에 따라 차등을 두는 방안을 마련한다.

 

-. 서얼이 점차 사로(仕路)로 나온 뒤에 혹 적파(嫡派)가 잔약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명분(名分)을 괴란(壞亂)시키는

   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서얼이 적자(嫡子)를 능멸한 율(律)로 다스린다.

 

-. 외방(外方)의 향임(鄕任)인 경우 수임(首任) 이외 여러 직임은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참용(參用)시킬 것을

   허락한다. 만일 무지하여 분수를 범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발생할 경우에는

   해도(該道)에서 드러나는 대로 엄중한 법으로 용서 없이 다스린다.

▶분관(分館) :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의 삼관(三館)에 배속시켜, 실무(實務)를 익히게 하는 일.

▶시천(始薦) : 첫 번째 천거

▶교서관(校書館) : 경적(經籍)의 인쇄와 교정, 향축(香祝)과 인전(印篆)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수부천(守部薦) : 무과에 합격한 자를 수문장(守門將)과 부장(部將)에 천거하던 제도.

▶상사(上司) : 윗 등급(等級)의 관청(官廳)

▶종부시(宗簿寺) :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던 관서.

▶목사(牧使) 정3품, 부사(府使) 종3품, 군수(郡守) 종4품, 현령(縣令) 종5품.

▶인의(引儀) : 조회(朝會)와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는 통례원(通禮院)의 정6품직

▶운각(芸閣) : 교서관(校書館)의 별칭

▶직강(直講) : 성균관의 종5품 관직

▶부정(副正) : 종친부(宗親府), 돈녕부(敦寧府), 훈련원 등에 소속된 종3품 관직.

▶우후(虞候)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밑에 두었던 무관 외관직으로, 병마우후(兵馬虞候)는 종삼품(從三品), 수군우후(水軍虞候)는 정사품(正四品).

▶적파(嫡派) : 집안의 계통(系統) 가운데 정실 아들의 계통.

▶잔약(孱弱) : 가냘프고 약함

▶외방(外方) : 한성(漢城) 밖의 모든 지방

▶향임(鄕任) : 지방 수령의 자문·보좌를 위해 향반들이 조직한 향청의 직임

▶수임(首任) : 우두머리 직임

 

차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서얼이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제도의 보완으로 300년 가까이 서얼을 눌러온 법적 제재에 숨통이 트이기는 하였으나 서얼을 차별하는 사회적 관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성균관에서의 자리 문제였다.

 

조선의 개국 초만 해도 성균관 태학생들과 지방 향학의 유생들은 나이 순서대로 앉았었다. 하지만 문벌이 성해지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신분별로 앉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얼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린 양반 아랫자리에 앉아야 했던 것이다. 영조는 1742년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계기로 나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하는 서치(序齒)를 실행할 것을 명했다.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지 말고 나이 순서대로 앉으라고 명한 것은 영조 자신이 서얼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지만 그보다는 세자에게도 장유유서의 본을 보이라는 의미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양반 출신 태학생들이 이에 반대하여 다음 해에 동맹휴학인 권당(捲堂)을 감행했다. 가정은 물론 사회 어느 곳에서나 양반 아래에 자리하는 서얼들이 학교에서만 자신들의 앞자리에 앉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 3년에 송덕상이 주강(晝講)에서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 "모든 사물에서 나이에 따라 좌차(坐次)를 정하는 일에 대해 신의 어리석은 의견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선조(先朝)에서 처분(處分)을 내린 뒤로부터 방자하게 못된 마음을 품고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어서 혹은 주사(主嗣)를 빼앗아 바꾼 경우도 있고 혹은 적종(嫡宗)을 핍박하여 다투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실로 윤상(倫常)의 변괴입니다. 이제 만일 나이에 따라 좌차를 정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또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이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3년 4월 24일)】

▶좌차(坐次) : 앉는 자리의 차례

▶주사(主嗣) : 대를 이을 자손

▶적종(嫡宗) : 동족(同族)의 총본가(總本家). 종가(宗家)

 

이때는 송덕상이 조정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정조는 송덕상의 주장에 "경(卿)의 말도 또한 옳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정조의 이 형식적인 답변에 성균관에서는 서얼들을 다시 아랫자리로 내쫓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후로 10년간을 그렇게 지냈다.

정조 15년인 1791년, 정조는 성균관의 대학총장인 대사성 유당(柳戇)에게 이렇게 전교하였다.

 

【"나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일은 선조(先朝)에서 신칙하신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그런데 근래 들으니 서얼을 남쪽 줄에 따로 앉게 했다고 한다.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준수한 자가 모두 태학에 들어가면 왕공 귀인(王公貴人)도 그들과 더불어 나이에 따라 차례로 앉게 하는 것이니, 서얼들의 지체는 비록 낮으나 똑같은 반족(班族)이다. 또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 단지 그 사람의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 하는 것만 볼 뿐 그 문벌의 귀천은 따지지 않았는데, 당당한 성균관으로서 어찌 유독 서얼만 따로 남쪽 줄에 앉게 하고 같은 줄에 있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또 이미 태학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은 의리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이대로 앉게 하는 것이 조정의 관작이나 개인집의 명분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남쪽 줄에 따로 앉게 하거나 혹은 끝줄에 내려앉게 하니, 이는 천만부당한 일이다. 경의 직책이 대사성이니 그것을 바로잡고 고치는 것이 경의 책임이 아닌가."(정조실록 정조 15년 4월 16일)】

▶선조(先朝) : 영조

 

성균관 태학생들은 이번에도 반발하여 권당에 들어갔다. 정조는 다시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삼대(三代)의 제도에 평민의 준수한 자들도 천자의 원자(元子)와 함께 나이순으로 앉았는데 이들의 신분이 어찌 우리나라 사대부만 못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삼대(三代) : 중국에서 왕도 정치가 행하여졌다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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