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년 9월에 규장각(奎章閣) 건물 공사가 끝났다. 정조가 3월에 즉위하자마자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고 건물을 지으라는 명을 내린 결과였다. 이 당시의 규장각 건물은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 형태였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유교(遺敎) 등 어제(御製)를 보존, 관리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조선의 관직 설치는 송나라 제도를 따른 것으로, 홍문관은 송나라의 집현원(集賢院)을,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왕들의 어제를 보관하는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과 같은 제도가 조선에는 없었다. 세조 때에 일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고, 숙종 때에 다시 실행하려 하였으나 왕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한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규장각은 처음에는 어제각(御製閣)으로 불렸다. 그러나 뒤에 숙종이 친필로 쓴 규장각 편액(扁額)이 발견되면서 이를 건물에 걸고 이름도 바꿨다. 규장각 건물이 완성된 날 정조는 대신과 이조 당상, 홍문관 관원을 소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일은 모두 송제(宋制)를 모방하였는데 열성조의 어제는 아직 봉안할 곳이 없었다. 이에 후원(後苑)에 규장각을 세우고 이미 어제를 봉안하였으니 관장하는 관원이 없을 수 없다. 당(唐)나라 이상은 학사(學士)의 명칭이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승여(乘輿)가 있는 곳에 다만 문사(文詞)나 경학(經學)의 선비로써 별원(別院)에 숙직하게 하고 가끔 불러서 제서(制書)를 초안하게 하였으니, 대개 관제(官制)를 세우고 직무를 분담하여 점차로 형세를 갖추어지는 것은 형세가 그런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편차(編次)하는 사람을 설시하여 오로지 어제를 관장하였는데, 그 일만 있고 관직은 없었으니 또한 이를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열성조 어제의 존봉(尊奉)을 위하여 송나라의 구제(舊制)를 모방하여 한 전각을 창건(創健)하였으니, 관원을 명하여 전수(典守)하게 하되 편차한 사람의 이름으로 그 직위를 채우는 것은 진실로 점차 갖추어 가는 의의에도 합치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제학은 곧 송나라의 학사(學士)이고 직제학은 곧 송나라의 직학사(直學士)이다. 또 당하(堂下)에 직각(直閣), 대교(待敎)를 둔 것은 송나라의 직각과 대제(待制)를 모방한 것이니 실시한 것에 근거가 있고 변통에 모두 편의를 얻었는데, 경(敬) 등은 그 편부(便否)를 진달하라."】
▶열성조(列聖朝) : 여러 대(代)의 임금의 시대 ▶승여(乘輿) : 임금이 타는 수레. 대가(大駕). ▶편차(編次) : 순서(順序)를 따라 편집(編輯)하는 일 |
그리하여 규장각의 직제가 신설되고 제학(提學) 2인, 직제학(直提學)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등의 관원을 두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것은 단순히 어제를 보관하고 관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신이 계획했던 정치를 실천해 나가려고 하였다. 후에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내가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세웠다.”고 직접 밝히기도 하였다. 이런 의도 하에 정조는 처음부터 규장각 관리들을 각신(閣臣)이라 칭하고 특별 대우하였다. 승지 이상으로 대우하여 당직을 하는 경우에는 조석으로 왕에게 문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왕이 사용할 목적으로 기르는 내구마(內廐馬)를 타도록 허락하였다. 경연은 물론, 임금의 부름에 따라 정사에 관한 의견을 상주하는 소대(召對),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서 경연(經筵)하는 야대(夜對)에도 참석하였다. 삼사(三司)처럼 백관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하지만 각신들은 사헌부의 탄핵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따라서 각신들은 삼사이상의 특권을 누리면서 삼사를 능가하는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각신재직대관좌의(閣臣在直戴冠坐椅: 각신은 근무 중에는 반드시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범각신재직 비공사무득하청(凡閣臣在直 非公事毋得下廳: 각신은 근무 중에 공무가 아니면 청을 내려가지 말라)’, ‘수대관문형 비선생무득승당(雖大官文衡 非先生毋得升堂):비록 고관 대신일지라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올라오지 못한다)’,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와 같은 친필 현판을 내려 규장각의 근무 분위기를 엄하게 하는 한편 일체의 외부간섭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구성되었다. 내각은 활자를 새로이 만들어 관리하는 일과 책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일을 담당하였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교서관(舊校書館)을 병합하여 외각으로 삼았다.
내규장각에는 부설 장서각으로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西庫),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를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 보관하게 하였다. 이때의 장서가 약 8만여 권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 도서의 원류이다. 주합루(宙合樓)에는 당조(當朝), 즉 정조의 어필, 인장 등을 보관하고, 열조의 어제는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였다.
1781년 정조는 규장각 장소가 이용에 불편하다는 규장각 각신의 청을 받아들여 규장각을 모든 관청 중 가장 넓다는 창덕궁 북서쪽 궐내각사(闕內各司) 안의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오위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이전하였다. 규장각의 기능도 점차 확대되어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의 근시(近侍)기능을 흡수하는 한편,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주관하는 등 명실상부한 정조시대의 핵심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조 3년인 1779년, 정조는 책자 간행의 어려움을 도승지 홍국영에게 털어놓았다.
“근래 『명사(明史)』를 보니 상세하게 구비된 책자가 없어서 새로 찬집(纂集)하고자 하나 매우 어렵다.”
그러자 홍국영이 답했다.
“찬집 등에 관한 일은 서류(庶類) 중에서 잘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이들을 운각(芸閣)에 소속시켜서 교정을 보도록 한다면 일이 잘될 것입니다.”
“경의 말이 좋다. 그러나 정원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려울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교서관의 정원을 뽑아서 교정관(校正官)이라고 이름 붙이면...서류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명사(明史) : 중국 명(明)에 관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찬집(纂集) : 여러 가지 글을 모아 책을 엮음. ▶운각(芸閣) : 교서관(校書館)의 별칭 |
이 대화에 따르면 규장각에 서얼이 등용된 것은 홍국영의 아이디어다. 사례에서 보듯 홍국영은 정조의 고민을 영민하게 해결해 주었다. 홍국영이 정조의 최측근으로 7년을 지낼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홍국영은 다음 날로 서류 등용안을 만들어 올렸다. 교정관이라는 이름 대신 검서관(檢書官)이란 이름을 붙였고, 소속도 외각인 교서관 대신에 내각으로 바꾼 안이었다. 그리하여 『정조실록』정조 3년 27일에는 “처음으로, 내각(內閣)에 검서관을 두었는데 서류(庶類)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4원(員)을 두었다.”라는 기사가 실리게 되었다.
이때의 초대검서관이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 네 사람이다. 검서관은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인데다, 문신을 뜻하는 동반이 아닌 서반 체아직이었다. 체아직은 요새 말로 하면 비정규직이다. 일할 때에만 녹봉을 받는다. 품계는 9품에서 5품까지였다. 주요 직무는 규장각의 각신들을 보좌하여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문신들이 매월 강(講)을 할 때 왕과 신하들 사이의 논의를 기록하여 보관하는 임무도 있었다.
비록 요직(要職)도 아니고 품계도 높지 않은 서반 체아직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모든 선비와 관리들이 선망하는 규장각에 서얼 출신들이 진출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임기는 30개월이었으며, 임기가 만료되면 그 중 2인을 홍문관에서 임의로 선발해 정원 외의 겸검서관(兼檢書官)에 임명하도록 되어있었다.
정조 5년인 1781년, 정조가 차후 검서관 충원 절차를 더 엄중히 할 것을 하교하자 규장각에서는 "검서관에 결원(缺員)이 생기면 여러 검서관들이 적합한 사람으로서 먼저 문지(門地)를 취하고 그 다음으로 재예(才藝)를 보아서 각기 2인을 천거하면, 제학 이하의 관원이 본원(本院)에 모두 모여서 먼저 글[文]을 시험보이고 다음으로 글씨[筆]를 시험보입니다. 이렇게 매우 정밀하게 골라 뽑아 천거하여, 단망(單望)으로 계하(啓下)된 뒤에는 이를 이조(吏曹)로 이송하여 정사(政事)가 있기를 기다려 단부(單付)하게 해야 합니다. 청컨대, 이를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는 의견을 올려 허락을 받았다. 잡직에 불과한데도 선발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웠던 것은 정조가 이 직책을 그처럼 중하게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문지(門地) : 가문(家門)이나 문벌(門閥) ▶단망(單望) : 관원을 선정하여 재가 받을 때 한 사람만 추천하는 것. ▶계하(啓下) : 임금에게 올린 계문(啓聞)에 대하여 임금이 답이나 의견을 내리는 것. ‘계(啓)’자 도장을 찍어 임금의 친히 보고 결재하였음을 나타낸다. ▶정사(政事) : 벼슬아치의 임면(任免)이나 출척(黜陟)에 관한 일 ▶단부(單付) : 단망(單望)으로 관원을 임명하는 것. |
초대 검서관들은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열심을 다한 결과 이덕무는 14년, 박제가는 13년, 유득공은 15년, 서이수도 10년 이상을 검서관으로 근무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궁궐 전각 이야기(신병주, 한국문화재재단),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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