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홍재전서(弘齋全書)』는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정조의 문집이다. ‘홍재(弘齋)’는 정조가 세손시절 자신의 거처에 붙였던 이름으로 「논어」태백(泰伯)편에 있는 “선비는 뜻이 크고 의지가 강인해야 하니,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는 공자의 말씀에서 ‘홍(弘)’자의 뜻을 얻어 가져온 것이라 한다. 정조는 ‘홍재’를 자신의 호로도 썼다. 『홍재전서』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었던 여러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와 편저 등을 모아 60권 60책으로 편집되었다가, 이후 몇 차례의 편찬을 거치면서 자료가 추가되어 활자본에서는 100책으로 늘어났다. 이 『홍재전서』중 권161∼178은 「일득록(日得錄)」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는 정조의 어록(語錄)을 수록한 것이다. 권161∼165는 문학편, 권166∼170은 정사편, 권171∼173은 인물편, 권174∼178은 훈어편(訓語篇)이다. 「일득록」은 학(學), 지행(知行), 성명(性命), 이기(理氣), 경사(經史) 등 21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기록 보관되었으나 홍재전서에는 4개 항목으로 통합 분류되었다.
정조 7년(1783년) 8월에 규장각 직제학 정지검(鄭志儉)과 서유방(徐有防)이 차자를 올려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말을 제자들이 각기 들은 바를 기록하여 놓은 덕에 후세 사람들이 성인들의 대전(大全)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임금의 말도 기록하여 임금은 말을 근신하게 하고, 임금의 한 말이 사방에 펼치어 후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대대로 천하의 법도가 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송사(宋史)』에 ‘강독관(講讀官)으로 하여금 각기 그날에 듣게 된 임금의 말을 수주관(修注官)에게 말해 주어 엄하게 기록하도록 해야 한다.’는 고례(古例)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시임(時任) 및 원임(原任) 각신(閣臣)이 매양 연석(筵席)에 나왔을 때에 있어서의 모든 전교(傳敎)와 비망(備忘) 등은 정사(正史)가 기록하게 되는 이외에, 의리(義理)·경사(經史)·치법(治法)·정모(政謨)에 관해 언급하시는 성상의 말씀에 있어서는, 모두들 각기 전심(專心)하여 똑똑히 들어 두었다가 물러나오면 근신스럽게 기록하기를, 어구(語句)의 다과(多寡)를 헤아릴 것 없이 오직 듣는 대로 기록하기에 주력하여, 연말이 되면 각자가 기록해 놓은 것을 꺼내어 서로가 같이 증정(證正)해서 번다하고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부문(部門)으로 구분하여 하나로 모아서 편집하기를 《정관정요(貞觀政要)》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차례대로 모방해서 하여 본각(本閣)에 간수하기를 해마다 상례로 한다면, 이미 관직을 침해하게 되는 혐의도 없게 되고 조금은 보유(補遺)를 하는 효과가 있게 되리라 여깁니다.”라고 했다.
이 건의를 정조가 받아들임으로써 「일득록」이 시작되었다.
정조는 이 기록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였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하려 한다면 그저 덕을 칭송하는 하나의 글이 될 뿐이니 어찌 내가 이 책을 편집하게 한 본 뜻을 어긴 정도일 뿐이겠으며, 뒷날 이 책을 보는 이들이 지금 시대를 어떻다 할 것이며, 규장각 신료들은 또 어떻다 하겠는가? 이러한 의미를 규장각 신하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사관의 기록과는 별도로 규장각 신하들이 평소 보고 들었던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일득록」은 그만큼 정제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수기(修己)에서부터 학문, 철학은 물론 인간적인 면모까지 다양한 정조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극기(克己)는 극복하기 어려운 편벽된 성품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나의 문제는 편벽하고 조급한 데 있다.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이 『논어(論語)』의 "제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남을 책망하는 데는 야박하다."는 대목을 읽고 마침내 변화하는 공부를 해냈다고 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그것을 좋게 여기면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춘방관(春坊官)이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 할 때에 항상 임시변통으로 꿰맞추려는 생각을 갖기가 쉬운데, 일찍이 그런 경험을 하셨거나 아니면 그러한 근심이 혹시 있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하고 묻자, "어찌 혹시 있을 뿐이겠는가. 항상 그런 때가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답하였다.】
▶춘방관(春坊官) : 세자시강원에 속한 벼슬아치 |
【서연(書筵)에서 「맹자(孟子)」의 "자로(子路)는 남이 잘못을 말해주면 기뻐했다."는 장(章)을 진강(進講)하면서 춘방관(春坊官)이 "대단한 잘못을 저질러 남이 알지 않았으면 하는 일에 대해서 만일 박절한 말로 면전에서 바른 대로 지적한다면 성내지 않고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답하기를, "어찌 성까지 내겠는가." 하고 이내 또 "순간적으로는 약간 수용하기 어려운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로 인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은 없다."라고 하였다.】
▶서연(書筵) : 세자를 모시고 경사(經史)를 강독(講讀)하는 일 |
【"문학(問學)의 공부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학자들 중에는 지식은 충분하면서도 행실이 부족한 이가 있는가 하면, 행실은 잘하면서도 지식이 부족한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서경(書經)』에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실천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였다. 정조는 "그렇다. 선(善)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악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느냐마는 마땅히 실천하지 못하는 데 근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군신 간에 서로 권장해야 할 말이다. 만일 학문의 순서를 논한다면 행실이 돈독하지 못한 것은 아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기는 맛있고 오훼(烏喙)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듯이, 진정으로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것이니 어찌 행실이 돈독하지 못한 이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학(問學) : 들어서 배움 ▶오훼(烏喙) : 초오두(草烏頭)라는 독성이 매우 독초(毒草). |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사사로운 생각을 갖는 것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학문이 높고 유명한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의심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왜곡하여 올바른 것으로 이해하고, 명성이나 덕이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취할 만한 점이 있어도 싸잡아서 나쁘게 평가해버리는데, 이런 것이 바로 사사로운 생각이다.】
【"언제나 남을 해치고자 함이 없는 마음을 넓혀 보충한다.(常充無欲害人心.)"는 이 일곱 글자를 항상 잊지 않는다.】
▶상충무욕해인심(常充無欲害人心.) : 「맹자」에 ‘사람이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인(仁)은 베풀고도 남아 다 쓰지 못한다(人能充無欲害人之心 而仁 不可勝用也)’는 구절이 있다. |
【분명히 해야 할 일은 용기 있게 곧바로 하고, 분명히 해서는 안 될 일은 용기 있게 결단하여 곧바로 물리쳐야 한다. 할 만하기도 하고 안 할 만하기도 한 일은 반드시 충분히 헤아리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해야 할 한계와 해서는 안 되는 한계를 분명히 보게 되면 역시 용기 있게 결단하고 가슴속에 담아두지 말아야 한다.】
【『예기(禮記)』에 "인정(人情)은 성왕(聖王)의 근본 터전이다."라고 하고, 예(禮)를 닦아서 그 터전을 갈고 의(義)를 베풀어 씨를 뿌리고 인(仁)에 근본하여 김맨다는 가르침을 실어놓았다. 그러나 예와 인과 의는 서로 연관성을 갖고 동시에 연마해나가야 되는 것이다. 만약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데 때가 있는 것과 같이 한다면, 오늘은 예를 닦고 내일은 의를 생각하고 모레는 인을 행해야 할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대개 사물의 절실한 곳에서 비유를 취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곧이곧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귀신의 도(道)에 대해 논하자면 천지 사이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을 뿐이다. 사람과 귀신에게 애당초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사람을 섬길 줄 알면 귀신 섬기는 도를 알 수 있다. 귀신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늘을 섬기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살아 계실 때는 정성을 다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예를 다하는 것은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이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자세로 상제(上帝)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는 자는 하늘 섬기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반드시 그대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기꺼이 들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남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며, 기꺼이 듣고 마음에 노여움을 품지 않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금강경(金剛經)』 주(註)에, "제자가 질문을 할 때는 먼저 다섯 가지 행동을 취한다. 첫째는 좌석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것이고, 셋째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는 것이고, 넷째는 합장(合掌)하고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시선을 잠시도 거두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한결같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질문하고자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하였으니, 사제(師弟) 사이에 예법(禮法)의 엄정(嚴整)함이 법으로 삼을 만하다.】
【임금과 백성을 배와 물에 비유할 때가 있다.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에 "은거하여 도를 지키면서 때를 기다린다.(潛居抱道 以待其時.)"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장상영(張商英)은 "도(道)는 배(舟)와 같고 때(時)는 물(水)과 같다. 배와 노를 지니고 있더라도 건너야 할 강(江)이 없다면 또한 순조로운 항해를 볼 수가 없다."라고 주(註)를 내었으니, 이 말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 이를 미루어본다면 어느 것인들 배가 아니며 어느 것인들 물이 아니겠는가. 장자(莊子)가 말한 "지금 있는 말(馬)이 아닌 것을 가지고 진짜 말(馬)이 아님을 설명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낮에 한 일을 밤이 되어 점검해보아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으니, 어떻게 한평생에 한 일이 그 마음을 다 만족시켜주기를 바라겠는가.】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要諦)라면 무엇보다 '욕심을 적게 가짐(寡慾)'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에게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욕심을 적게 내는 것이 중요하다. 적게 낸다고 말하는 것은 치우친 점을 극복해서 적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주자가 이른바, "인심(人心)이 도심(道心)과 하나가 되면 없는 것과 흡사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무릇 사람은 밤으로 접어들면 잠을 자고 산뜻한 아침이 되면 기상을 하는데, 그런 다음에야 정신이 응결되고 모이며 깨끗하고 맑아져서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함을 느끼게 된다. 만약 잠자기를 탐내어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면 근골(筋骨)이 곧 부드러워지고 연약해지며 지기(志氣)가 그만 어두워지고 막혀버린다.】
【근력(筋力)은 힘쓰면 더욱 단단해지고, 총명(聰明)은 기르면 더욱 새로워진다.】
【예로부터 성현의 커다란 사업은 한마디로 말하면 '수신(修身)'일 뿐이니, 수신을 하지 않고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수신제가(修身齊家)에는 『가례(家禮)』보다 더 요긴한 것이 없고, 학문에 나아가는 데는 『심경(心經)』보다 더 요긴한 것이 없다.】
▶『가례(家禮)』 :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가정에서 일용하는 예절을 모아 엮은 책. 『가례』는 조선에서도 국가와 사대부가의 생활의 근간이 되어 왔지만 풍속과 관념이 중국과 달라서 시행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예를 지키고 의식을 잘 이행하는 것이 사대부의 명예를 유지하고 체면을 지킨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가례』에 따르지 않는 처신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심경(心經)』 :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 퇴계 이황(李滉)은 젊어서 이 책을 구해 깊이 연구한 뒤에, “나는 『심경(心經)』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믿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알았고, 이 책을 공경하기를 엄한 아버지같이 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
【하루는 날씨가 매우 더웠다. 왕이 침실 남쪽 건물에 머물렀는데, 처마가 매우 짧아 한낮이 되자 해가 뜨겁게 내리쬐었다. 신하가 "이 방은 협소하여 한여름이면 더욱 불편합니다. 건물을 별도로 짓자는 청은 비록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나 서늘한 곳으로 옮겨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이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다른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만족할 때가 있겠는가. 만약 이곳을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 이것을 미루어본다면 '만족할 줄 안다(知足)'는 말이 적용되지 않을 곳이 없다. 그러나 학문의 공부와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것의 도리만은 조그만 완성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면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도 언제나 부족함을 탄식하는 생각을 가져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정조이산어록(2008, 손인순, 고전연구회 사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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