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12 - 초대검서관

從心所欲 2020. 7. 2. 15:04

 

[<정조 규장각> , 탁희성 화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사진]

 

이덕무는 1741년생, 박제가는 1750년생, 유득공은 1748년생, 서이수는 1749년생으로, 이덕무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사람은 나이가 비슷비슷하였다. 이덕무는 40이 다 되어가는 39세에 검서관이 되었고 세 사람은 30전후였다.

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이들을 추천하였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검서관에 발탁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문재(文才)로 세간에서는 꽤 이름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이들 세 사람과 이서구를 포함한 4인이 함께「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이덕무의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였던 유련(柳璉)이 같은 해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 시집을 가져가 청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이것이 중국에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덕분에 네 사람은 중국에서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이라는 문명(文名)을 얻고 있던 터였다.

 

세 사람과 이서구가 일찍부터 연암(燕巖) 박지원과 함께 어울렸던 일화들은 너무 유명하다.

이덕무는 1766년에 대사동(大寺洞)으로 이사를 왔다. 유득공도 대사동에 살고 있었는데 1768년에는 박지원도 근처로 이사를 왔다. 대사동은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 일대로 탑골공원 자리에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박제가는 남산 밑 청교동(靑橋洞)에 살았는데 청교동은 지금의 을지로 4가, 5가 일대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나이가 9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근 30년간을 천애지기(天涯知己)로 지냈다. 이덕무는 24세 때인 1764년, 자신의 처남인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초어정(樵漁亭)’이라는 박제가의 글씨를 인상 깊게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덕무는 그 첫 만남을 “너무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의 나이를 넘어선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은 1778년에 사신 일행을 따라 같이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1789년에는 정조의 명에 따라 무인(武人) 출신의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백탑동인(白塔同人)’들의 시문집인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의 서문(序文)을 박제가가 썼는데, 박제가는 여기에 박지원의 집을 중심으로 근처에 사는 백탑동인들을 나열하였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柳琴)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글에서 이들이 어떻게 어울려 지내며 친해졌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이 글에는 서이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박지원의 무리에 서이수의 이름이 가끔 등장하기도 하지만 세 사람과 얽힌 일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어쩌면 서이수와 박지원, 서이수와 세 사람은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이수는 따로 전하는 문집도 없고 그 생애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어 세 사람에 비하여 인지도도 낮다. 위 글에 나오는 관재 서상수(徐常修, 1735 ~ 1793)는 박지원이 “김광수(金光洙)가 감상지학(鑑賞之學)의 개창자라면 서상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묘경(妙境)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극찬할 만큼 서화고동(書畫古董)에 대한 뛰어난 감식가였다. 그의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서이수(徐理修) 또한 본관이 달성인데다, 이름 끝의 ‘수(修)’자가 같아 형제이거나 친척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는다.

박제가의 글에 등장하는 유금은 유득공의 숙부인 유련(1741 ~ 1788)의 개명한 이름이다. 「건연집(巾衍集)」을 중국에 소개했던 당사자로 유득공의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처지의 유득공이 어쩌면 이때 유련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지금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을 당시에는 백탑(白塔)이라 불렀고, 근처에 모여 살던 홍대용, 박지원, 정철조,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등이 어울려 글을 짓고 놀다보니 자연스레 ‘백탑시파’라는 동인(同人)이 결성된 것이다. 나이로는 정철조와 홍대용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대여섯 살 아래인 서상수와 박지원, 그리고 이덕무는 박지원보다 네 살 아래였다. 박제가와 유득공은 이덕무와 또 열 살 가까운 차이가 있고 이서구는 두 사람보다 또 너 댓살이 어리다. 장유(長幼)를 따지던 조선시대에 이렇게 연령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지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처음 만나 같이 어울렸던 때만해도 이서구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라 바로 끼지는 못했을 듯싶다. 또한 이서구는 왕족 명문 사대부 집안의 적자(嫡子)로, 21세 때인 1774년 가을,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같이 했던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았을 것이다.

 

이덕무는 아버지가 서자였고, 박제가는 어머니가 정처(正妻)가 아닌 세 번째 부인이었다.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다. 이덕무는 어릴 때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전통적인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박제가는 그의 나이 11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승정원 우부승지였던 부친이 살아있을 때는 비교적 유복하게 지냈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는 생계가 매우 곤란해져 어머니가 남의 집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유득공은 다섯 살 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때 부친의 나이가 불과 27세였다. 서자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친마저 여의었으므로 유득공은 신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경기도 남양 백곡으로 이주한 것도 생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친정이 무반 집안이라 글공부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유득공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공부를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와 역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이들의 가난은 이들이 장성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덕무는 자신의 「이목구심서」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겨울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 입김이 서려 성애가 되었고,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내가 게으른 성격이지만 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漢書)』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다. 이러지 않았다면 후산(後山)의 귀신이 될 뻔했다.”】

▶후산(後山) : 송나라 때의 진사도(陳師道)라는 사람의 호로, 관직에 있으면서도 깨끗한 성품 때문에 늘 가난했는데, 추운 겨울날 솜도 들어있지 않은 얇은 옷을 입고 국가의 제사에 참석했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죽은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추운 겨울날 집의 서북쪽 구석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등불이 흔들리자 「노론(魯論)」을 병풍처럼 둘러 바람막이로 쓰고 이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이덕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 서상수는 집에 있는 책을 팔고, 이응정이라는 친구는 나무를 모아다 1769년 5월에 이덕무를 위한 초가집을 지었다. 서재와 사랑방이 딸렸지만, 집의 기둥이 모두 여덟 개에 불과한 집으로, 청장서옥(靑莊書屋)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덕무의 호에 쓰인 ‘청장(靑莊)’은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리는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는 의미다.

▶노론(魯論) : 한(漢) 나라 때 전해 온 세 가지의「논어」중에서 노(魯)나라에 전해진 것을 노론(魯論)이라 한다. 제(齊) 나라에 전해진 것은 제론(齊論), 공자의 옛 집에서 나온 것을 고론(古論)이라 하나, 노론만 전해져 내려와 현재의 「논어」가 되었다.

 

하루는 이덕무가 자식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을 내다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자조를 섞어 그 일을 자랑했다. 가난하긴 유득공도 마찬가지였다. 유득공 역시 쓰러져가는 세 칸 남짓의 집에 살고 있었다. 집이 너무 좁아 붓, 머루, 칼 같은 물건들조차 방안에 가지런히 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집에서 유득공은 작은 남새밭 앞에 앉아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유득공은 이덕무의 말을 듣고는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춘추좌씨전(左氏傳)』으로 술을 사오게 하여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한다.

▶『춘추좌씨전(左氏傳)』 : 『춘추(春秋)』의 해석서(解釋書)로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 진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내용의 사실성(史實性)은 의구심을 받지만 고대 중국인의 생각, 생활양식 등을 전하는 사화(史話)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 문학 작품의 가치성으로 높이 인정을 받으면서, 후한말(後漢末)부터는 춘추 3전 중에서도 『춘추(春秋)』라고 하면 이 『춘추좌씨전(左氏傳)』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덕무는 이런 자신을 자조하여 '간서치(看書癡)' 즉 '책 읽는 바보'라 불렀다. 그의 유고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중 <영처문고(嬰處文稿)>에 실려 있는 ‘간서치전(看書痴傳)’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목멱산(木覓山)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동창, 남창, 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자미(子美)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하여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리고 깊이 생각하다가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주선(周旋)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짖는 듯하였다. 혹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看書痴)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 (看書痴傳)’을 만들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자미(子美) ; 두보(杜甫)의 자

▶주선(周旋) ; 주위를 돌다. 맴돌다.

 

박지원은 이덕무가 죽은 뒤 그의 행장(行狀) 곳곳에서 이덕무의 책에 대한 애착을 언급하였다.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또한 수백 권이 되는데 그 글씨가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라고 하였다.

▶속자(俗字) : 흘려 쓴 글자

 

[창덕궁 궐내각사 內 규장각, 생각꾸러미님 사진]

 

[창덕궁 궐내각사 內 내각, 생각꾸러미님 사진]

 

그러면 검서관이 되어 가난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덕무는 행복했을까? 검서관 생활 10여년이 지난 1792년 어느 날의 이덕무 일기이다.

 

【퇴청을 하고 청장서옥에 들어오니 책들을 뽑아드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여는 순간 내 얼굴빛과 표정으로 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한 책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다가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대궐에 들어간 뒤로는 이 방에서 책과 만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늘 아쉽기만 하다.

대궐에서도 나는 언제나 책에 파묻혀 지낸다. 책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자료를 모아 책을 만들어내는 검서(檢書)는 몹시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책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편안하게 젖어 있기보다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글자라도 틀릴세라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궐에서 나는 책의 안과 밖을 지키기만 했을 뿐 책과 마주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는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서자의 신분으로 꿈도 꿀 수 없는 벼슬길에 오르게 된 나나 벗들로서는 몸가짐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궐에 들어가려 관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감격스럽기는 했으나 허리에 매는 묵직한 띠가 가슴 아래를 무겁게 누르기도 했다. 대궐에서 나라 안팎의 희귀한 책들을 대할 때면 반가운 마음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빌린 책을 놓고 한 글자라도 빠질세라 희미한 등불아래 꼼꼼하게 옮겨 적던 지난날이 그리울 때도 있다. 그 시절에 종이가 귀해서 나는 늘 글씨를 깨알같이 쓰곤 했다. 벗들이 승두문자(蠅頭文字)라 놀리는 나의 글씨는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승두문자(蠅頭文字) : 파리머리문자

 

사람에 따라서는 이덕무를 조선 최고의 박학다식한 지식인으로 꼽을 만큼 이덕무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달통했고 문자학(文字學), 명물학(名物學),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밝았다. 그의 유고집 『청장관전서』는 애초 71권 33책에 이르렀는데, 그 내용은 요새말로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였다.

▶명물학(名物學) : 금석·물·불·별·달·해·초목 등의 객관적 사물을 탐구하는 학문

▶전장(典章) : 국가의 제도와 문물. 법식(法式)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왔음에도 박지원과 그 주위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청나라에 대한 호의적 시각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박제가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박제가는 네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다. 박제가는 중국어와 만주어를 다 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박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학의(北學議)」는 1778년의 첫 번째 중국여행 후에 완성한 글이다. 북학(北學)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수레를 널리 이용하여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견고한 선박을 만들어 해외 여러 나라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적인 쇄국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상품유통의 발전, 그리고 통상무역은 박제가가 가진 경제관의 주요 골자였다.

 

유득공도 북경은 두 번, 심양을 한 번 방문하여 중국에는 세 차례 다녀왔다. 그의 첫 번째 중국 여행이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었던 만주의 심양이었던 탓인지 유득공은 우리의 옛 역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고(渤海攷)」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다. 근래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 유득공의 「발해고(渤海攷)」였다는 주장이 우리 학계에서 발표되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그 외에도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나 경도잡지, 사군지(四郡志)와 같은 저술을 통하여 자신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같이 중국을 다녀와도 이렇듯 세 사람의 관심과 생각은 달랐다. 검서관으로서의 근무는 이덕무의 글에서 보듯 몸이 더 없이 고됐고, 특히 시력 때문에 고생들을 많이 한 듯하다. 정조 16년에 박제가는 검서관을 사직할 결심을 하고 서유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5년 전부터 계속해서 밤을 지새웠더니 불행히 왼쪽 눈이 어두워져 보이지 않게 되었은데, 안경도 효과가 없었소.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한쪽 눈뿐이오. 수개월 전부터는 어둠의 꽃이 또 피기 시작했소. 내각의 일은 글을 베껴 쓰고 교정하는 일이 많은데, 두 가지 다 전적으로 눈에 의지하는 일이오. ... 검서관의 용도는 눈에 있는데 눈이 어두우면 물러나는 것이 본래 합당할 것이오.

 

정조는 이런 검서관들의 고충을 알고 이들을 그만두게 하는 대신 검서관직을 겸임하면서 지방의 현감이나 군수로 보내어 생계를 이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대우해주었다. 초대 검서관을 비롯하여 정조 대에는 약 40명의 서얼들이 검서관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뒤에 유득공의 두 아들과 손자가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고, 이덕무의 손자도 검서관직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규장각은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됨으로써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펼치려 했던 뜻도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 1866년 10월 16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무력시위를 하며 외규장각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 당시 참전 병사가 그려 프랑스 주간지에 실렸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면서 강화유수부 관아 건물과 외규장각 건물 등을 파괴하거나 방화하였다. 당시 외규장각 서고에는 6천여 책을 보관 중이었는데 프랑스군이 200종 340책을 약탈해가고 나머지는 불타버렸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자들의 야만행위가 이랬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인물한국사(정성희, 장선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이덕일, 2008, 고즈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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