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7 - 9월 26일

從心所欲 2020. 6. 23. 10:25

매월 여섯 차례 비변사(備邊司)의 도제조(都提調)와 모든 당상관, 삼사(三司)의 대표 관원이 입대(入對)하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차대(次對)가 정조 3년 9월 26일 열렸다. 원래 차대는 5, 10, 15, 20, 25, 30일에 열리도록 되어있는데 전날 무신(武臣)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사례(燕射禮)를 거행한 탓에 하루 늦춰진 것으로 보인다. 차대가 열리자마자 홍국영이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고 나섰다. 《정조실록》 정조 3년 9월 26일의 기사다.

▶연사례(燕射禮) : 군신 상호간에 예(禮)와 악(樂)을 배우는 의미를 담아 임금이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활 쏘는 예식.

 

【차대(次對)하였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구구하게 아뢸 것이 있습니다. 성심(聖心)도 오늘을 기억하시겠지요. 오늘은 신이 임진년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그날부터 전하의 신에 대한 두터운 은혜와 특별한 지우(知遇)는 아마 천고(千古)에 없는 계회(契會)일 것입니다. 그 덕을 갚으려 하여도 하늘처럼 그지없다는 것은 신의 정사(情私)로서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입니다. 이승에서는 참으로 천만분의 일도 갚을 길이 없으나 변함없는 진심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서 영구히 전하의 견마(犬馬)가 되어 조금이라도 정성을 다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의 구구한 초심(初心)은 다만 명의(名義)를 자임(自任)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척리(戚里)의 신하가 되려 하였겠습니까마는, 사세에 몰려서 마지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왕실(王室)의 인척이 되고 공사(公私)가 불행하여 올해 5월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로는 국사(國事)와 민심(民心)에 관계될 바가 없겠거니와 머무를 곳을 모르겠는데,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고 갖가지로 헤아려도 이것은 모두 신이 아직도 조정(朝廷)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차마 말씀하시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차마 청하지 못합니다마는, 신 한 사람 때문에 나라의 계책이 이 지경이 되게 하였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신이 성명(聖明)을 길이 헤어지는 날입니다. 이제 부신(符信)을 바치고 나갈 것인데 신이 한번 금문(禁門) 밖으로 나간 뒤에 다시 세상일에 뜻을 두어 조지(朝紙)를 구하여 보고 사람을 불러 만난다면 이것은 국가를 잊은 것이니, 천신(天神)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이 5년 동안 나라의 일을 맞아보아 조정의 명령은 신의 손에서 많이 나갔습니다마는, 신은 탐오(貪汚)하고 속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천리(天理)는 순환(循環)하니, 어찌 줄곧 이러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훈련대장의 명소(命召) 를 풀어 손수 향안(香案)에 바치고 나갔다.】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계회(契會) : 정이 굳게 얽힘.
▶척리(戚里) : 임금의 외척(外戚).
▶올해 5월의 일 : 원빈의 죽음
▶부신(符信) : 궁중 출입에 관련된 신표(信標)로 입직당상관(立直堂上官)이 가지는 신한부(信漢符), 임금의 명령을 받고 비밀히 대궐에 들어가는 명소밀부(命召密符), 각 궁전에 문안드릴 때 가지고 가는 문안패(問安牌) 등 필요와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가 발부되어 사용되었다.
▶금문(禁門) : 대궐 문, 궐문(闕門)
▶조지(朝紙) :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날마다 아침에 적어서 반포(頒布)하던 일. 또는 그것을 적은 종이. 조보(朝報).
▶탐오(貪汚) :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
▶명소(命召) : 국왕의 부름을 받은 중신들이 궁궐에 들어가기 위하여 휴대하던 일종의 궁궐 출입증. 명패(命牌)를 둘로 갈라서 한쪽 면에는 부르고자 하는 신하의 관직을 쓰고 옆에 연월일(年月日)을 쓴다. 다른 한 면에는 임금이 친히 서명하여 이것을 둘로 쪼개어 오른쪽 조각은 부르려는 신하에게 주고 왼쪽 것은 궁중에 두었다.
▶향안(香案) : 향료나 향로(香爐)를 올려놓은 받침상.

 

갑자기 홍국영이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직한다는 선언을 하고는 정조의 말도 듣지 않고 나가버린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신하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신들이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잠시 말하지 말라. 이것이 그 아름다움을 이룩하고 끝내 보전하는 방도이다. 내가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는가?"

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고쳐 복상(卜相)한 한 일이 어찌 지신(知申) 이 물러가고 안 물러가는 데에 관계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와 지신은 임금과 신하 사이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니고 오늘은 임진년에 서로 만난 일인데, 그때부터 이제까지 지신(知申)이 자신을 그르치게 된 것이 대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절(晩節)을 착하게 한다면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지신(知申)이 늘 ‘이 처지로서 혹 망설이고 물러가지 않으면 마침내 탈가(稅駕)할 곳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에 참으로 또한 이치가 있다." 하였다.】 

▶복상(卜相) : 의정급 관원을 가려 뽑기 위한 선발방식. 주로 시임(時任) 의정이 작성한 복상단자에 국왕이 낙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신(知申) : 도승지
▶만절(晩節) : 늙은 시절(時節), 오래도록 지키는 절개 등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말년(末年), 끝맺음’의 의미로 해석됨
▶탈가(稅駕) : 수레를 풀고 편안하게 휴식하고자 함. 진(秦)의 이사(李斯)가 재상(宰相)이 되어 부귀가 극도에 이르자 "내가 탈가(稅駕)할 곳을 알지 못하겠노라."고 한 데서 나온 말. 장래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 쓰임.

 

정조의 말과 태도를 보면 정조는 이미 이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날의 기사는 길게 이어진다.

 

【정민시(鄭民始)가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막대(莫大)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어찌 생각하신 것이 없이 그러셨겠으며, 지신(知申)도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습니까? 지신(知申)은 남보다 한 등급 높다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고서야 끝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뒤로는 뜻대로 강호(江湖)의 산수(山水)에서 노닐 것인데, 조보와 사람을 보지 않겠다는 말에서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간다고 핑계하고 오히려 다시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는다면, 이것이 어찌 오늘의 뜻이겠는가? 지난 일은 그르쳤더라도 이 뒤의 일이 착하고 착하지 못한 것은 오직 집에서 어찌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정민시가 말하기를,

"뜻밖에 나온 일이므로 신들이 워낙 놀라고 의혹하였습니다마는, 다시 생각하여 보면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습니까? 신과 지신은 형제 같은 정이 8년 동안 한결같았으므로 오늘의 일은 참으로 매우 슬픕니다마는, 이제부터 앞으로 신도 한가로이 노닐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부터 병통이 우연히 글을 읽는 데에 있었는데,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 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조수(操守)하는 공부라고 생각하였다. 오늘의 일도 사람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인데 이것도 참아 내는 것이니, 내가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대저 예전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은혜와 의리가 처음과 같이 끝내 보전하는 것이 첫째가는 방책이다. 지신이 이 뒤로는 세속을 벗어난 선비가 되어 노래하는 계집, 춤추는 계집과 어울려 그 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니, 경들도 틈을 타서 가서 만나면 또한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주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출입이 잦은 것도 긴치 않으니, 혹 두어 달에 한번 서로 소식을 알릴 생각이다." 하였다.】 

▶조수(操守) : 지조(志操)를 굳건히 지킴

 

그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갔어야 할 홍국영은 퇴궐하지 않고 다시 정조에게 구구절절한 글을 올린다.

 

【홍국영이 또 상소하기를,

 

"신의 이 날은 출신(出身)하여 전하를 만난 날이며 고신(告身)을 전하께 하직한 날입니다. 거취에 따라 슬프고 기쁠 즈음에 저도 모르게 막히고 머뭇거려 지척인 연석(筵席)에서 다하지 못한 말이 많이 있고 이제 또 부신을 탑전(榻前)에 바치고 강외(江外)로 돌아가므로 만 번 죽을 죄를 무릅쓰고 다시 아뢰니, 전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신이 전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예전에도 다시 동류(同類)가 있겠습니까? 하늘처럼 그지없고 하해(河海)처럼 헤아릴 수 없다는 것도 오히려 으레 쓴 말입니다. 신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신이 은혜를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갖은 한마음은 오직 조금이라도 갚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궐에 있으면서 임금의 위광(威光)을 힘입은 것도 이미 긴 세월이었으나, 결국 궁녀나 내시의 충성과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는 의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 종묘(宗廟)에 대한 일념은 신이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되어 잊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는데, 지난해에 자전(慈殿)께서 특별히 대유(大諭)를 내리시고 조정에서 현문(賢門)을 가릴 것을 청하여 마침내 선택된 것이 신의 집이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은 남자의 몸이니 전하를 위하여 뒷날의 도모를 할 수 없으나 신의 누이가 이미 입궁(入宮)하였으니 다행히 자손이 번창하면 우리 삼전(三殿)의 기쁨을 돕고 우리 성명(聖明)의 근심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신의 복이 적어서 신의 누이가 또한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신이 그 뒤로 심신이 불안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심해진 것은 대개 전하의 춘추는 한창이신데 전하의 저사(儲嗣)가 없고 전하의 국사(國事)는 어려운데 전하의 곤치(壼治)가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릇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에게는 두 가지 도리가 있는데, 하나는 중곤(中壼)께서 원량(元良)을 양육하시기를 바라는 것이고 하나는 상념(上念)이 널리 저사에 미치시는 것입니다. 대저 어찌 대여섯 달 안에 위에서 결정이 없으시고 아래에서 논란이 없겠습니까마는, 신의 처지가 절로 다르고 은총이 매우 두텁기 때문에 전하의 성명으로도 혹 안면에 얽매이시거나 뭇 신하가 크게 바라더라도 세력에 몰려서 이제까지 세월을 보낸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연석(筵席) : 경연하는 자리
▶고신(告身) : 직첩(職牒)
▶탑전(榻前) : 임금의 자리 앞. 어전(御前).
▶대유(大諭) : 큰 깨우침
▶삼전(三殿) : 왕대비전(王大妃殿),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저사(儲嗣) : 왕세자.
▶곤치(壼治) : 대궐안 곧 내전(內殿)을 다스리는 일

 

아! 신은 선조(先朝)에서 지우(知遇)하고부터 전하를 섬긴 몇 해 동안에 천하의 대계(大計)가 신 때문에 산만해지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천신(天神)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이 밤낮으로 등대(登對)할 때에 이것을 아뢰느라 혀가 거의 헐고 말이 이미 다하였습니다. 무릇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용납되기를 바라고 아첨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말이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니, 신의 말은 천리(天理)의 공정한 것인데도 전하께서 신의 말을 물리치시는 것은 또한 신이 조정에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신은 전하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감수하겠으나 감히 선왕께 죄를 얻는 귀신이 될 수 없으니, 신이 어찌 오늘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는 또한 사정(私情)을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의 나이는 이제 서른둘입니다. 진사(進士) 급제(及第)가 되어도 오히려 늦지 않은데, 자신이 국정(國政)에 참여하고 손에 병권(兵權)을 잡았으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집안이 매우 창성한 한 거족(巨族)으로서 청조(淸朝)에서 사람을 등용한 것이 이러하고 사문(私門)에서 복을 받은 것이 이러하니, 집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으며 나라가 어찌 그 근심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전하께서 병신년 3월 10일 등극하시기 전 어느 밤에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광무제(光武帝)는 능히 자릉(子陵)의 고절(高節)을 이룩하였습니다. 신은 워낙 자릉에게 미치지 못하나 저하(邸下)께서는 어찌 광무제만 못하시겠습니까? 신이 강호의 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면 바라는 것이 만족하겠습니다.’ 하니, 전하께서 신의 손을 잡고 또한 눈물을 흘리시며 ‘이때에 그대가 떠날 수 있는가? 두어 해를 지내고 나라의 일에 두서가 있거든 그때에 그대가 떠나도 될 것이다.’ 하시므로, 신이 절하고 엎드려 명을 받고 드디어 무리를 쫓아 따라갔는데, 이제 또 서너 해를 지냈습니다. 아! 전하께서 이 말을 기억하실 것이고 좌승지 정민시(鄭民始)도 이 말을 들었을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광무제(光武帝) ... 자릉(子陵)의 고절(高節) :자릉(子陵)은 후한(前漢) 때의 은둔지사인 엄광(嚴光)의 자이다.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절친한 친구로 광무제가 군사를 일으킬 때 그를 도왔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였다.

 

아! 예전부터 나라의 일을 맡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나라의 일을 맡은 것은 또한 특이합니다. 무릇 크고 작은 공사(公事)의 절박한 근심과 즐거움은 신이 모르는 것이 없었고, 무릇 안팎의 크고 작은 소리와 맛의 맵고 짠 것은 신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신하로서 이렇게 중대한 일을 부담하고도 끝내 무사하여 자리에서 죽은 자가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섬긴 이래로 오직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不欺心]’는 석 자를 지켜서 다행히 무사히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탐련(貪戀)하여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낭패하게 되더라도 신은 본디 아까울 것은 못됩니다마는, 뒷날 논하는 자가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광무제와 자릉의 일을 당초에 전하께 아뢴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이 지킬 만한 의리가 없는데 까닭 없이 떠나려 한다면 그것도 성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하여 본다면 신에게 참으로 지킬 만한 의리가 없겠습니까? 신이 가정에서 꾀하지 않고 경사(卿士)에게 말하지 않고서 이 황급한 일을 처리한 것도 어찌 신이 좋아서 한 것이겠습니까? 또 신이 수일(數日) 이래로 들어가면 자리에 엎드려 울고 나가면 지붕을 쳐다보며 한탄하여 마치 장차 죽을 사람이 그 남은 날을 아까워하는 것과 같은 꼴인 것을 성명께서는 혹 아셨을 것입니다.

 

오늘 신의 이런 행동을 본 자는 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라 말하기를, ‘저 사람이 갑자기 이런 일을 하니 반드시 국가에 죄를 지어 그럴 것이다.’ 하겠으나, 저 잗단 자들이 어찌 신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양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신에게 삼자함(三字銜)을 주어 끝내 한결같은 은택을 다하셨거니와, 도문(都門)을 한번 나가 종남(終南)이 문득 가로막으면 신의 불안함이 아들이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며 목이 메어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우(知遇) : 남이 자기의 재능을 잘 알아 대접함.
▶청조(淸朝) : 청(淸)나라의 조정(朝廷)
▶병신년 : : 영조 52년인 1776년.
▶광무제(光武帝)는 ~ 이룩하였습니다 : 자릉(子陵)은 후한(後漢) 사람 엄광(嚴光)의 자(字). 엄광이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였음. 곧 임금이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하는 것을 들어준 것을 말함.
▶탐련(貪戀) : 연연해하다
▶경사(卿士) : 삼정승 이외의 모든 벼슬아치. 경사대부(卿士大夫).
▶삼자함(三字銜) : 봉조하(奉朝賀).
▶종남(終南) : 남산(南山).

 

[릴리안 메이 밀러 <석양의 조선 배(Korean Junks at Sunset)>]

 

정조와의 지난 일들을 들먹이고 자신의 충심을 내비쳐 이제라도 정조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는 물러나겠다는 홍국영의 청을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려 홍국영의 실낱같은 희망을 잘라버렸다.

 

 

【"오랜 예전부터 영구한 후세까지 어찌 우리와 같은 임금과 신하의 만남이 있겠는가?

나에게 이미 순(舜)임금·우(禹)임금 같은 명철함이 없거니와 경도 (순임금을 섬긴) 직(稷)·설(契)의 현량(賢良)에 미치지 못하나, 그 만남을 돌아보면 천년에 한번 만날 만한 때에 보필을 부탁하였으니, 옛사람에 견주더라도 그 신의(信義)는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매우 믿고 오로지 위임한 것이 이제 4년이 되었다.

 

아! 을미년 동짓달에 강석(講席)에서 한 말과 병신년 3월에 여차(廬次)에서 아뢴 것과 지난해 6월 가례(嘉禮) 때에 한 말은 경의 마음속의 간절한 것인 줄 본디 알면서 나는 만류하였거니와, 경이 오늘 청한 것에 대해서만 내가 윤허하였다마는, 어찌 전에 말한 것들에 대하여 인색하고 뒤에 청한 것에 대하여 따른 것이겠는가? 내 마음을 경만은 알 것이니, 내가 어찌 차마 많이 말하여 말세의 거짓된 풍습을 본뜰 수 있겠는가?

 

아! 경의 말은 곧 내 말이니, 내가 경의 청을 애써 따른 뜻을 알려면 반드시 경의 글을 읽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일전의 매복(枚卜)이 경의 집에 미친 것이 또한 어찌 범연한 뜻이었겠는가? 세도(世道)의 책무를 맡는 데에 어찌 마땅한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말에 나타내지 않은 숨은 뜻을 경은 말없는 가운데에서 알 것이다.

또한 생각하면, 우리 군신(君臣) 사이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오늘의 일을 보고 오늘의 일을 들으면 반드시 그렇게 말할 것인데, 이 뜻은 경의 상소에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일반의 뜻이라 하겠으나, 우리 군신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하여 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동요하겠는가?

선마(宣麻)하는 날에 약간의 말을 갖출 것이다. 경의 상소 가운데에 있는 청을 윤허하니, 경은 헤아려 알라."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3년 9월 26일)】

▶직(稷)·설(契) : 직(稷) 순(舜) 임금의 신하로 농사를 맡은 사람으로 중국 주(周) 나라의 시조. 설(契)은 중국 상(商) 나라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
▶을미년 : 영조 51년인 1775년.
▶여차(廬次) : 상중(喪中)에 상주가 거쳐 하기 위해 만든 초가집
▶매복(枚卜) : 정승 또는 정승의 지위. 매복은 원래 점을 쳐서 그 가운데서 가장 길한 것을 선택한다는 뜻으로, 정승(政丞)의 자리는 국가의 중임(重任)이므로 옛날에는 길흉을 점쳐서 뽑았던 데서 유래.
▶선마(宣麻) : 임금이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에 함께 써서 주는 글.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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