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2 - 졸(卒)

從心所欲 2020. 5. 15. 17:53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셨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셨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계실 때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으셨다. 안색은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김은 주름이 있으셨다.”

 

중년에 박지원을 그린 초상화가 집안에 두 점이 있었는데 박지원이 별로 닮지 않았다고 하여 없애버렸다. 그래서 아들 박종채는 다시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으나 박지원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결국 초상화조차 남기지 못한 것을 비통해 했다. 지금 전하는 박지원의 초상화는 박종채의 아들인 박주수가 그린 것이라 한다. 박주수는 1866년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고 횡포를 부렸을 때 화공(火攻)으로 셔먼호를 전소시킨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동생이다.

 

“아버지는 평소 잠이 적으셨다. 매양 자정을 지나 닭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하셨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일어나시면 반드시 창문이랑 방문을 활짝 여셨는데, 눈 내리는 날이나 얼음이 언 추운 아침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때로는 말없이 앉아 생각에 잠기시기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산보하시기도 하다가 동이 트면 세수를 하신 다음 갓을 쓰고 자리에 앉으셨다.”

 

“아버지께서 좌우를 돌아보며 지시할 적에는 당당하여 위엄이 있으셨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문득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셔서 보통 음성으로 말씀하시더라도 수십 보 떨어진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독서를 많이 하여 식견도 있고 의술에도 뛰어났다는 담옹(澹翁) 김기순이라는 이가 있어, 늘 박지원을 따라 다니며 노닐기를 좋아했는데 언젠가 박지원의 기품을 논하며 이런 말을 했다.

“공은 순양(純陽)의 기품을 타고나 음기(陰氣)가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높고 맑음이 지나쳐서 매양 부드러움으로 일을 이루는 힘이 부족하고, 강직함과 방정함이 지나쳐서 항상 원만한 뜻이 적습니다. 이는 옛사람이 말한바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태양증(太陽症)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의 선현들에 견준다면 공의 기품은 송강(松江) 정철이나 남명(南冥) 조식에 가깝습니다. 지금과 같은 말세를 살아감에 도처에서 모순을 느끼실 테니, 삭이지 못하고 억눌러둔 불평한 마음이 훗날 반드시 울화증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럴 경우 그 병은 약이나 침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1802년 겨울, 박지원은 조부 박필균의 묘를 경기도 포천에 이장했는데, 유한준(兪漢雋)의 집안에 의해 두 번이나 이 묘가 파헤쳐졌다. 그러자 박지원은 “이는 사람의 이치를 갖고 다툴 일이 아니로구나!” 하며 평소 “차라리 들판 한가운데다 무덤을 썼으면 썼지 어린아이 하나라도 ‘왜 이런 곳에 무덤을 쓰느냐?’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던 바를 따라 급히 양주 별비면으로 다시 박필균의 묘를 이장하였다. 유한준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벼슬에 올라 김포 군수, 삼척부사 등을 거쳐 형조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란 소리도 들었고 서화가로도 이름을 얻었었다. 그런 그가 소싯적에 고문(古文)을 본뜬 글을 지어 사람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고는, 자신이 쓴 글을 박지원에게 평해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글을 보고 편지로 이렇게 답을 했다.

“문장은 참 기이하군요.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어(借用語)가 많고 인용한 글들이 적실하지 못하니 이것이 옥에 티인가 합니다. 만일 모든 왕조의 도읍지를 장안(長安)이라 부르거나 역대의 삼공(三公)들을 죄다 승상(丞相)이라 일컫는다면 이름과 실상이 뒤죽박죽이 되어 도리어 비루하고 추하게 될 것이외다. 이는 마치 동명이인의 진공(陳公)이 좌중을 놀라게 하거나 못생긴 여인이 서시(西施) 흉내를 내어 얼굴을 찡그리는 격이외다.”

▶진공(陳公) : 『한서(漢書)』<유협전>에 한나라 때 제후 진준(陳逡)과 이름이 같은 협객이 있었는데 그가 어디를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이 제후로 오인하여 좌중이 놀랐다는 고사(故事)가 있다.

 

나름 박지원에게 칭찬을 기대했을 유한준은 이 일로 박지원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박지원의 집안에서는 박지원이 중년 이래 비방을 받게 된 것은 모두 유한준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때문으로 여겼다. 유한준 친척이 박필균의 묘에 산변(山變)을 일으킨 것 또한 나중에 그 집안사람들에게 확인해보니, 박지원이 유한준의 젊었을 때 문장을 인정해주지 않은 원한에 있음을 알아냈다고 한다.

▶산변(山變) : 조상의 산소가 남에 의해 파헤쳐지거나 훼손당하는 일.

 

박지원은 중년 이래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해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병이 있었는데, 이 산변 이후 더욱 상심하여 마음이 휑하니 빈 듯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804년 여름 이후 병세가 극도로 심해졌는데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박지원은 병이 점점 더 위독해지는 가운데서도 아들 박종채로 하여금 주자와 육선공의 상소문을 읽게 하고는 누워 그것을 듣거나, 처남 이재성과 백탑시절 이래 문하제자였던 이희경(李喜經)을 자주 불러 조촐한 술상을 차려 서로 담소하게 한 다음 그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1805년 10월 20일 오전 8시경, 박지원은 예순아홉의 나이에 재동의 계산초당(桂山草堂) 사랑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해 12월 5일 경기도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의 선산에 부인 이씨와 합장되었다.

이에 처남 이재성은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박지원을 애도하였다.

 

[박지원 <국죽도(菊竹圖)>, 단국대도서관]

 

유세차(維歲次) 모년 모일, 처남 이재성은 삼가 제문을 받들어 연암 박공의 영령에 곡하며 영결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사람들은 말들을 합니다.

문장에는 정해진 품평이 있고

인물에는 정해진 평판이 있다고.

그러나 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마음과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이름하기 어려운 것과 같지요.

용을 아로새긴 보물솥은

밥하는 솥으로 쓸 수 없고

옥으로 만든 술잔은

호리병이나 질그릇엔 어울리지 않지요.

보검이나 큰 구슬은

시장에서 살 수 없는 법이고

하늘이 내린 글이나 신비한 비결은

보통의 책상자 속에 있을 턱이 없지요.

신령한 거울은 요괴를 비추고

신령한 구슬은 잊은 것을 생각나게 하지요.

끊어진 줄을 잇는 아교가 있는가 하면

혼을 부르는 향(香)도 있답니다.

그러나 처음 듣고 처음 보면

이상하고 기괴할 밖에요.

그래서 한번 써보지도 않고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요.

아아, 우리 공은

명성은 어찌 그리 성대하며

비방은 어찌 그리 많이 받으셨나요?

공의 명성을 떠받들던 자라 해서

공의 속을 안 것은 아니며

공을 비방하던 자들이

공의 겉을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요.

아아, 우리 공은

학문은 억지로 기이함을 추구하지 않았고

문장은 억지로 새로움을 좆지 아니했지요.

사실에 충실하니 절로 기이하게 되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니 절로 새롭게 된 것일 뿐,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도

공에게 가면 훌륭한 문장이 되고

웃고 화내고 꾸짖는 속에

진실됨이 담겨 있지요.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

안개 속에 물결이 넘실거리듯,

첩첩이 솟은 바위 사이에

노을과 구름이 일어나듯,

문장의 천태만변(千態萬變)은 절로 이루어진 것이지

억지로 남을 놀래려는 게 아니었지요.

무실(務實)을 중시한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을

학자들은 입에 올리기 부끄러워하고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의 문장을

문인들은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공은 자신의 소임을

이 분들에 견주었지요.

▶관중(管仲) :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과 수공업을 육성하여 부국강병에 힘썼던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상앙(商鞅) : 법치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펴서 개혁을 단행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한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

▶가의(賈誼) : 20세 전후에 박사와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으나 참소와 중상으로 곤경에 처하였다가 33세에 요절한 전한(前漢) 시대 최고의 천재 학자

▶육지(陸贄) : 흔히 육선공(陸宣公)으로 알려진 당(唐)나라의 정치가. 재주가 남다르고, 민정(民情)을 몸소 살피어 황제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재주 그토록 높으면서

뜻은 어찌 그리 낮추셨는지,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古文)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이는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지요.

공을 좋아한다는 자들조차

공의 진수를 안 것은 아닙니다.

하찮은 글 주어다가

보물인 양 생각하고

우언(寓言)이나 우스갯소리를

야단스레 전파했으니,

이 때문에 헐뜯는 자들

더욱 기승을 부렸지요.

우언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 것이고

우스갯소리는 실상이 아니요

거만하게 세상을 조롱한 것이었지요.

좋아한다는 자나 헐뜯는 자나

참모습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떠들어대는 저 자들이

공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공의 장점과 단점을

제가 한번 말해보리다.

공은 기세가 드높아서 1만 사람을 압도했지만

명리(名利)에 대해서는 가까이하길 두려워했지요.

세 가지 까다로운 문제를 옳게 밝히셨으나

세상 유행에는 어두웠지요.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공을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요.

▶세 가지 까다로운 문제 : 천주교 교리의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것

▶위선적인 무리 : 원문은 향원(鄕愿). 수령을 속이고 양민을 괴롭히던 촌락의 토호.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환곡이나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따위의 일을 하였다.

 

중년에는 연암골에 들어가셔서

세상에 자취를 감추셨지요.

세상을 경륜할 큰 뜻 못 펴자

명상에 잠기며 쓸쓸히 지냈지요.

우연히 중국을 여행하게 되어

천하의 형세를 살피셨지요.

그리하여 천하의 안위(安危)를 논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분명히 구별했지요.

만년에 벼슬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으니

서글프게 짐을 챙겨 임지로 향했지요.

벼슬 그만두려고 생각하신 것은

책을 저술하려는 마음 간절해서였지요.

편안히 지내시던 중 그만 병이 나

말과 거동이 불편하셨지요.

묘하도다! 저 성명(性命)을

촛불에 비유한 말씀,

형질(形質)이 초라면

마음은 심지와 같아

형질이 순수하고 마음이 올곧아야

촛불처럼 빛난다고 하셨지요.

이처럼 식견 높고 이치가 정밀하니

덧붙일 말이 있겠습니까.

▶성명(性命) : 천성(天性)과 천명(天命)을 합해 설명하는 유학 이론.

 

절필하여 불완전한 원고밖에 전하지 않으니

누가 다시 그 심오한 이치 깨달을는지!

아아! 우리 공은

남과 화합 못하여서

이웃이 드물었지요.

제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을 따라 배우려 했었지요.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한 공을 위해

그 누가 탄식하겠습니까?

나의 서투른 글 솜씨를

때로 칭찬해주셨으며

상자에 지으신 글 100편 넣어두시고는

제가 비평해주는 것을 좋아하셨더랬지요.

아아! 우리 공은

그 사귐이 연배(年輩)를 뛰어넘어

선배에까지 미쳤었지요.

우리 아버지께 감복한 것은

그 고결함과 지조 때문이었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언행과 덕행을

제문에다 낱낱이 쓰셨지요.

어이해 붓 들어

비문을 짓지 못하셨나요?

▶비문을 짓지 못하셨나요? : 박지원이 만년에 장인 이보천의 묘지명을 짓고자 하였으나 병으로 짓지 못한 것을 가리킴

 

저는 형제가 없어

공을 형님처럼 여겼지요.

머리가 허옇도록 늘 그랬으니

새삼 무얼 말하겠습니까?

숲이 우거진 저 무덤은

옛날 사시던 연암골에 가까운데

현숙했던 부인께서

먼저 잠들어 계시지요.

추운 새벽 발인하니

눈과 얼음, 길에 가득

병으로 멀리 전송하지 못하옵고

홀로 서서 길이 통곡하옵니다.

 

[황해북도 개성시 은덕동의 황토고개 남쪽 기슭에 있는 박지원의 묘. 일제강점기에 유실되었다가 1959년 묘지명이 발견되며 다시 알려졌고, 2000년에 북에서 다시 조성하였다. 북한정보넷사진.]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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