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24 - 안의현감

從心所欲 2020. 5. 2. 18:08

박지원이 안의현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정월이었다. 아들 박종채는 안의현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위치한 산골마을로 풍속이 교활하고 사납다고 했다. 박지원이 부임하자 백성들이 박지원을 시험하려고 이치에도 닿지 않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갖고 소송을 내는 바람에 그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박지원은 그 중 거짓말에 해당하는 송사 10여 건을 엄중히 가려내어 물리쳤는데, 그러자 백성들이 “원님이 총명하여 속일 수 없다”며 서로 경각심을 갖으면서 소송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대단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번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익명으로 투서하여 서로의 비리를 들추어내곤 하였다. 박지원은 어느 날 자리 밑에 웬 편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를 못 본 듯이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서 그 편지가 저절로 없어졌다. 그런 뒤 어느 날 박지원은 동헌에 나가 통인(通引) 하나를 내쫓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전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나중에야 그가 투서를 한 장본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또 누가 관아 뜰에다 투서를 한 일이 발생했다. 박지원은 그 편지를 아예 뜯어보지도 않고 물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박지원은 아무개 아전을 잡아들이라고 하여 매를 때린 뒤 내쫓아버렸다. 그가 관아 뜰에다 투서한 자였다. 이에 아전들이 깜짝 놀라 박지원을 두고 ‘귀신같다’고 하면서 그 후로는 이런 짓들이 근절되었다고 한다.

▶통인(通引) : 수령(守令)의 잔심부름을 하던 구실아치. 이속(吏屬)이나 관노비(官奴婢) 출신이었다.

 

[김윤보 『형정도첩』 中 <고피고원고재판(古被告原告裁判)>, 지본채색, 29.5 × 21㎝]

 

박지원은 겉치레를 꾸미는 일과 자잘한 예법들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래서 부임한 지 달포쯤 지나 이런 분부를 내렸다.

“나는 번거롭게 꾸미는 것을 싫어한다. 행차할 때 벽제(辟除)하는 일, 음식을 올리는 절차, 수령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소리 내어 알리는 일 등은 일체 없애도록 하며, 모든 일을 간략하고 정숙하게 하도록 노력하라. 새 법령을 시행하고자 할 때 그 일로 혹 자기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염려되면 필시 전례(前例)가 그렇지 않음을 들어 미적거리는데, 만일 사사건건 전례만을 들먹인다면 고을 원은 두어서 무엇 하겠느냐? 더구나 전례가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전례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라.”

또한 수령의 생활비를 기록하는 장부를 담당 아전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따로 책방(冊房)을 두어 장부를 관리하게 할 수도 있지마는 너희들과 액수를 갖고 따지고 싶지 않다.”

또 매일 중기(重紀)를 쓰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아의 일에 마땅찮은 게 있으면 나는 그 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이로부터 관아가 늘 조용하여 마치 산 속의 별장이나 들에 있는 정자와 같았고, 부임한 지 반년도 되기 전에 아전들은 고분고분해지고 백성들은 신실해서 온 고을에 일이 없었다고 한다.

▶벽제(辟除) :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위험을 막고 위엄을 세우기 위해 선두에서 인도하는 하인이 큰 소리로 앞길을 정리하는 것. 원래는 길을 열고 불결한 것들을 치우게 하던 일이었으나 점차 위엄을 과시하는 의례로 바뀌었다.

▶책방(冊房) : 고을 수령의 비서(秘書)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 관제(官制)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이 임용(任用)하였다.

▶중기(重紀) : 사무(事務)를 인계할 때에 전(傳)하는 문서(文書)

 

박종채는 아버지 박지원이 평소 이런 지론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백성들이 소소한 은혜만 알 뿐, 큰 은덕을 모른다고 해서 고을 원들은 매양 소소한 은혜만 베풀어 명예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를 알지 못한 탓이다. 고을 원은 오로지 큰 도리를 지켜서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음을 요채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실제 박지원의 원님 노릇은 어땠을까?

 

안의현은 비록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환곡(還穀)과 향곡(餉穀), 호조의 저치미(儲置米)가 총 9만여 휘에 달했다. 그러나 아전들이 부정과 농간을 부려 포흠(逋欠)이 날로 늘어났다. 박지원은 부임하자 가까이에 있는 창고를 점검하여 이런 사실을 알고는 아전들을 닦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감기 기운을 핑계 삼아 돌아오면서 “멀리 있는 창고는 천천히 조사하자”고 했다.

▶환곡(還穀) : 국가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에게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던 국가 비축 곡물

▶향곡(餉穀) : 군량(軍糧)에 쓰는 곡식

▶저치미(儲置米) : 비상시에 대비하여 나라에서 비축하던 쌀.

▶휘 : 곡식의 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스무 말들이와 열댓 말들이가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15말이 1석(섬)이었다.

▶포흠(逋欠) : 관청(官廳)의 물건(物件)을 사사로이 써버림

 

그리고는 며칠 뒤 뭇 아전들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다.

“너희들은 필시 포흠이 있을 게다. 포흠은 범죄다. 너희들이 그 일을 숨긴다 하더라도 잠시 감추는 데 불과하다. 조사를 받게 되면 절대 죄를 숨길 수 없다. 위로 감영(監營)의 점검만이 아니라 암행어사의 조사가 있을 테니 일찍 자수하는 것이 낫다. 자수할 경우에는 구제할 방도를 바련해 보겠다. 그렇지 않고 적발당해 그 죄상이 드러나게 될 경우에는 난들 어쩔 수가 없다.”

그러자 아전들이 “예이. 알겠사옵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서로 눈치만 보며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이렇게 의논이 되었다.

“우리가 이 일로 걱정을 하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두려워한 지 벌써 몇 년째인가? 사또께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훈계하심이 이와 같거늘, 자수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래서 드디어 아전들이 포흠을 실토하니, 그 양이 모두 6만 휘에 달했다. 박지원은 경상감사를 찾아가 이렇게 건의했다.

“아전들이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한 것은 법으로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낼 경우 잃어버린 곡식을 되찾을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스스로 실토했으니 그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할 만합니다. 만일 이 일의 처리를 저한테 맡겨주셔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내 감영에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박지원은 감영에서 돌아온 뒤 아전, 장교(將校), 관노(官奴), 좌수(座首), 이정(里正) 등은 물론이고 백성들 가운데 나이든 사람으로 마을에서 신망이 두터운 자들을 모두 불러 관아 뜰에 모이게 한 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장교(將校) : 군영(軍營)이나 지방 관아에 소속되어 군무(軍務)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의 총칭

▶좌수(座首) : 조선시대 지방의 자치 기구인 향소(鄕所)의 가장 높은 직책. 수령을 보좌하여 군기(軍器)의 정비, 정군(正軍)의 선발, 군포전(軍布錢)의 징수, 환곡(還穀) 등 주로 대민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정(里正) : 조선시대 말단행정구역인 리(里)의 행정업무 담당자. 요즘의 이장.

 

“형법에 나라의 재물과 곡식을 몇 냥, 몇 섬 이상 포탈한 죄인을 어떻게 처단하라고 했는지 잘 알렷다?”

“예이.”

“고을 원이 포흠을 눈감아주었을 때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잘 알렷다?”

“예이.”

“이제 6만 휘나 되는 막대한 포흠을 적발하였거늘 오늘 당장 감영에 보고하여 관찰사가 임금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형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 개의 목이 달아나고 몇 개의 무릎 뼈가 바스러져 눈앞에서 당장 결딴나고 말 것임을 잘 알렷다?”

“예이.”

“설사 목이 베일지라도 이 6만여 휘의 빚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필경 안위현에 책임을 물어 장부대로 해놓으라고 하리라는 걸 잘 알렷다?”

“예이.”

“위엄과 권세가 견줄 데 없는 쟁쟁한 고을 원이 새로 부임하여 죄를 진 아전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숙청한 다음 논밭과 재산을 몰수하고 일가 친척을 옥에 가둔다면 피가 낭자하고 고을이 황폐해지리라는 걸 잘 알렷다?”

“예이.”

“그도 아니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세월이 흘러가버려 곡식의 출납이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 헛 문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이자는 불고 마침내 장부는 혼란스럽게 되어 실제 사실을 밝힐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온갖 부정과 농간이 저지러져 마침내 그 포탈한 곡식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만할 텐데, 그 책임은 결국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전과 백성이 서로 원수가 되어 함께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렷다?”

“예이.”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너희들은 이제 알았다. 본관(本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을 수습하는 것이다. 일이란 크고 작고를 가릴 것 없이 3년이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본관은 여러 아전들에게 약속한다. 본관은 너희들의 논밭과 재산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이웃과 친척에게 연대책임을 지우지도 않겠다. 본관은 방금 온 고을 백성들에게 막대한 국고를 포탈한 죄가 아전에게 있지 백성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구차스럽게 법에 벗어난 조치를 취할 수는 없다. 다만 매월 초하룻날 장부를 비치할 때마다 3년 기한으로 한 달도 빠뜨리지 말고 창고에 곡식 2천 포대씩을 들여놓도록 해라. 서서히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면 너희들 중 밭이 없는 자는 밭을 갖게 될 것이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갖게 될 것이며, 아내가 없는 자는 아내를 얻게 될 것이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훗날 다른 수령이 부임해와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박지원은 말을 마친 후 가장 포흠이 많으면서도 갚을 여력이 제일 없고 달리 친척도 없는 자 서너 명을 가려내어 즉석에서 수입이 조금 넉넉한 직책을 맡겨 조금이라도 소득이 생기면 포흠을 갚게 하였다. 이에 여러 아전들이 몰려나와 서로 말하기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네. 우리가 처벌을 받지 않고 버젓이 집에 앉아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줄이야 정말 생각이나 했나.” 하였다.

또 백성들 가운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자들은 서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네. 포흠이 이렇게 많거늘, 이 사또가 아니었다면 필경 우리들이 피해를 입었을 게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꾸어주기도 하고 갚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여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은 모두 관의 창고에 들여놓았다. 이렇게 한 결과 2년 반 만에 창고가 다 찼다. 한 사람도 매질하거나 옥에 가두지 않고 일을 해결한 것이다.

포흠한 곡식을 다 갚고 장부를 완전히 정리하던 날 뭇 아전들은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살았다.”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 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