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22 - 허생전 후지

從心所欲 2019. 12. 11. 19:57



[릴리언 메이 밀러의 판화 <달빛 속의 한국 농가(Korean Farmhouse by Moonlight)]


<허생전>이라는 소설 자체는 앞의 글로 끝났지만, 박지원은 여기에 추가로 글을 달았다. 이런 글을 요즘에는

보통 후기(後記)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이를 후지(後識)라고 했던 모양이다. ‘識’자는 ‘알 식’자 이기도 하지만

‘적을 지’자 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허생이 어영대장 이완에게 한 말 중에 ‘명나라 장사의 후손들이 많이 조선에 들어와 유랑하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故事)1에서 보듯

중국 사대부들 중에는 오랑캐인 청이 점령한 중국 땅을 벗어나 조선으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박지원은 그런 사실을 토대로 ‘허생전 후지(後識)’를 적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허생은 명나라 유민이라고도 한다. 숭정(崇禎)2 갑신년 뒤로3 명나라 사람들이 많이들

나와 살았다. 허생도 혹시 그렇다면 그 성은 허씨가 아닌 것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는

판서 조계원(趙啓遠)4이 경상감사가 되어 순행차로 청송에 왔을 때 길 옆에 웬 중 두 명이 서로 마주 베고

누웠다. 앞선 자가 쫓아가서 고함을 쳤으나 그들은 피하지 않고 채찍으로 쳐도 얼어나지 않아 여럿이들

붙들어 끌어도 움쩍하지 않았다. 조공((趙公)이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 어디 사는 중이냐고 물었다. 두 중은

일어나 앉아 한결 더 뻣뻣한 태도로 눈을 흘기고 한참 동안 있다가, “너는 허장성세를 하고 권력에 아부한

덕에 고을 자리를 얻은 자가 아니냐!” 하였다.

조공이 중들을 보니 한 명은 얼굴이 붉으며 둥글고 한 명은 얼굴이 검고 길었다고 한다. 말하는 데가 자못

범상치 않아 가마에서 내려 그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중은 말하기를,

“따르는 자들을 물리치고 나를 따라오라!” 하였다. 조공이 몇 리를 따라 가노라니 숨은 가빠지고 땀은 자꾸만

흘러 좀 쉬어서 가기를 청했더니, 중이 화를 내면서,

“네가 평소에 여러 사람들과 있으면서는 언제나 흰소리를 하면서 몸에는 갑옷을 입고 선봉을 맡아서 명나라를

위하여 복수 설치를 한다고 떠들더니, 지금 보아 몇 리 걸음도 못 걸어 한 자국에 열 번 헐떡이고 다섯 자국에

세 번을 쉬려고 하니, 이러고야 어찌 요동과 계주 벌판을 말을 타고 달릴 것인가?” 하였다.

어떤 바윗돌 아래에까지 닿으니 거기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들고 땔나무를 쌓고는 그 위에 거처하는 것이었다.

조공이 목이 말라 물을 청하니, 중은, “응! 귀인이라 또 배도 고프겠지!” 하고는 누런 좁쌀떡을 내놓고 소나무

잎으로 가루를 내어 개천 물에 타서 주었다. 조공은 이마를 찡그리고 마시지 못하고 있으니, 중은 또다시 꾸짖되,

“요동벌은 물이 귀하거든! 목이 마르면 응당 말 오줌이라도 마셔야지!” 하고는, 두 중이 마주 부둥켜한고

엉엉 울면서, “손 대감! 손 대감!”이라고 외치고는 조공에게 묻되, “오삼계(吳三桂)5가 운남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강소, 절강 지방이 소란한 것을 네가 아느냐?” 하였다. 조공은 들은 적이 없다고 하니, 두 중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네가 방백의 몸으로 천하에 이런 큰 일이 있건마는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벼슬자리만 얻었을 뿐이구나!”

조공이 중들에게 대관절 누구냐고 물었더니,

“물을 필요가 없다. 세상에는 역시 우리를 아는 자도 있을 것이다. 너는 여기 앉아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우리 선생님하고 꼭 같이 와서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하고는, 일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해는 지고 오래 지나도 중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공은 밤늦도록 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밤은 깊어

풀, 나무는 우수수 바람 소리를 내는데 범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공은 기겁을 하고 거의 까무러쳤다.

여럿이 횃불을 켜 들고 감사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공은 거기서 핀잔을 당하고 골짝 속을 빠져나왔다.

이 일이 있은 지 오래되었어도 조공은 언제나 자리에 있으면 마음이 늘 불안하여 가슴 속에는 한을 품게

되었다. 후일 조공이 이 일을 우암 송시열선생에게 물었더니, 선생은 말하였다.

“이는 아마도 명나라 말년 총병관(摠兵官)6 같아 보이오.”

“언제나 나를 깔보고 너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스스로 우리나라 중이 아닌 것을 밝히려는 거요. 땔나무를 쌓아 둔 것은 와신상담을 한다는 뜻일게요.”

“울 때는 손 대감을 찾으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태학사(太學士) 손승종(孫承宗)7을 가리키는 것 같소. 손승종은 일찍이 산해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청군과 싸운 적이 있었으니, 두 중은 아마도 손승종의 무리일 것도 같소.”


문집에 전하는 허생전 후지는 이것이지만 또 다른 허생전 후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김영동 전 동국대교수는

원래 후지를 쓴 것이 있었으나 박지원이 너무 단순했다고 생각해서 지금 정본으로 전해지는 이 후지로 바꾼 것

같다고 했다. 박지원이 먼저 썼다는 후지는 전하는 본(本)에 따라 실려 있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였다. 문집에

전하는 후지가 허생의 정체에 대한 것이라면 먼저 쓴 후지는 자신에게 허생전 이야기를 전해줬다는 윤영에

대하여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의 나이가 20살(1756년) 되었을 때 봉원사(奉元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떤 손님 하나가 음식을 적게

먹으며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선인(仙人) 되는 법을 익혔다. 그는 정오가 되면 반드시 벽을 기대어

앉아서 약간 눈을 감은 채 용호교(龍虎交)8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자못 늙었으므로 나는 존경하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허생의 이야기와 염시도(廉時道)9, 배시황(裵是晃)10, 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11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잇달아 몇 만언(萬言)으로써 며칠 밤을 걸쳐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거짓스럽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휼황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모두 들음직하였다.


그때 그는 스스로 성명을 소개하기를 윤영(尹映)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병자년12 겨울이다. 그 뒤 계사년13

봄에 서쪽으로 구경 갔다가 비류강(沸流江)14에서 배를 타고서 십이봉(十二峯)15 밑까지 이르자,

조그마한 초암 하나가 있었다. 윤영이 홀로 중 한 사람과 이 초암에 붙여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기뻐하면서 서로 위안의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열여덟 해를 지났지마는 그의 얼굴은 더

늙지 않았다. 나이 응당 팔십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나는 그에게, “허생 이야기 말입니다. 그 중 한두 가지 모순(矛盾)되는 점이 있더군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곧 풀이해 주는데 역력히 그저께 겪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자네, 지난날 창려(昌黎)16

글을 읽더니 의당….17” 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자네, 일찍이 허생을 위해서 전(傳)을 쓰려더니 이젠 글이

벌써 이룩되었겠지.”

하기에, 나는 아직 짓지 못했음을 사과하였다.

이야기 할 때 나는, “윤노인(尹老人).”하고 불렀더니, 노인은, “내 성은 신(辛)이지 윤이 아니라네. 자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군.”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는,

“내 이름은 색(嗇)일세.” 한다. 나는, “영감님의 옛 성명은 윤영이 아닙니까. 이제 갑자기 고쳐서 신색이라니

무슨 까닭이십니까?” 하고 따졌더니,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자네가 잘못 알고서 남더러 성명을 고쳤다니!” 한다.

나는 다시 따지려 했으나 노인은 더욱 노하여 파란 눈동자가 번뜩일 뿐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 노인이

이상한 도술을 지닌 분임을 알았다. 그는 혹시 폐족(廢族)18이나 또는 좌도(左道)19 이단(異端)으로서

남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는 무리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문을 닫고 떠나려하자 노인은,

“쯧쯧. 애처로운 일이야. 허생의 아내야 당연히 다시 굶주렸겠지.” 하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또 광주(廣州) 신일사(神一寺)에 한 노인이 있어 삿갓 이생원이라 하는데 나이는 아흔 살이 넘었으나

힘은 범을 껴잡았으며, 바둑과 장기까지도 잘 두고 가끔 우리나라 옛 일을 이야기할 제 언론이 풍부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남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나이와 얼굴 생김을 듣고 보니

윤영(尹映)과 흡사하기에 내가 그를 한번 만나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물론 이름을 숨기고

깊이 몸을 간직하여 속세를 유희(遊戲)하는 자가 없지 않은즉 어찌 이 허생에게만 의심할까보냐.


평계(平谿)20 국화 밑에서 조금 마신 뒤에 붓을 잡아 쓴다. 연암(燕巖)이 기록하다.21


‘허생전 후지’ 뒤에는 또 ‘차수평어(次修評語)’라는 글이 붙어있다. 대부분의 본(本)에는 소제목이 따로 없이

바로 ‘차수는 말한다(次修曰)’는 말로 시작을 하는데, 차수(次修)는 박제가(朴齊家)의 자(字)이다.


차수는 말한다.

이 이야기의 대략을 보면 당나라의 《규염객전(虬髥客傳)》과 <화식전(貨殖傳)〉의 작법을 사용하였으나,

그중에는 중봉(重峯)의 봉사(封事)와 《반계수록》 및 《성호사설》들에서도 하지 못한 말들을 하였다.

이 문장은 솜씨가 분방하고 사상이 비분강개하여 조선에서 보기 드믄 문장이라 할 것이다.


《규염객전(虬髥客傳)》은 당나라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소설로, 당태종 이세민의 행군총관(行軍總管)이었던

이정(李靖)에 대한 전기형식의 글이다. <화식전(貨殖傳)〉은 중국 사서(史書)인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나오는 편명(編名)으로. 중국 춘추 말기에서부터 한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골자로 하고 그 사이에 각 지방의 풍속, 물산, 교통, 상업 따위의 상태를 서술한

글이다. 박제가의 평은 형식은 전기(傳記) 형식이고 글의 소재는 화식전의 것과 같되, 소설에서 허생이 말한

것들은 실학자였던 유형원과 이익이 지은 글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많고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다.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의 판화 <김씨 아버지>, 1920년대, 송영달 교수 소장]


박지원은 두 편의 후지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하여 소설 속 주인공인 허생의 정체와 허생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윤영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소설의 내용에 대하여

따지려고 드는 세간의 관심과 이목을 흐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왠지 허생전은 허생을 통하여 박지원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펼쳐 보인 글로 느껴진다. 혹시라도 박지원이 실제로 윤영에게서 허생전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내용은 허생이 돈을 벌고 돌아와 변씨에게 빌린 돈을 갚은 이야기가 끝이었을 것이다. 옛날

이야기에 <허생전>처럼 뒷얘기가 많은 분량으로 따라 붙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변씨와

이완과의 대화 형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으리라는 짐작이다.

박지원은 소설에 여러 메시지를 담았다. 우선 소설 속의 허생은 장사를 통하여 많은 돈을 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상업경제사상의 고취 목적으로 쓰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그보다는 선비가 마음만 먹으면

장사해서 돈 버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하지만 그것은 선비가 할 짓이 아니라

안 하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쩌면 경제적으로 늘 넉넉지 못했던 박지원 자신에 대한

변명 같다. 기껏 번 돈 중, 은 50만 냥을 바다 속에 버리는 자체가 상업경제사상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결국 번 돈을 자기 손에 한 푼도 남기지 않는 결말도 그렇고 변씨와의 대화에서도 보이는 돈에 대한 결벽증은

그저 고결하기만 해야 하는 선비의 전형적 사고와 행위의 규범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박지원이

갖고 있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원이 경제를 중하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시장경제에 대한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 사례들도 있다. 허생전에서도 박지원은 매점매석과 독과점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상업은 상인들의 몫이지 선비의 몫은 아니라는 것이다.

허생이 도적떼들을 모아 살도록 한 섬은 박지원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나라의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들끼리 살면서 지배자도 없고 글도 없고, 지켜야 할 일이란 오른손으로 수저 들고 윗사람

공경하는 일 뿐인 도가적 사회. 얼핏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그려진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도 한다. 평생 글에 매여 살던 박지원이 글 아는 자가 없는 사회를 꿈꿨다는 것인가?!


박지원이 <허생전>을 쓰면서 가장 하고 싶었고 또 동시에 가장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이완과의 대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효종 때에 있었던 소위 ‘북벌(北伐)’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에 대하여 박지원은

허생의 입을 빌려 지적하였다. 허생이 이완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은 모두 조선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들이다. 북벌을 실행할 능력도 의지도 방안도 없으면서 청나라를 치겠다는 공론(空論)이나 일삼고 있는

무리들을 향한 일갈인 것이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은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하며 실재하는 중국의

주인인 청나라를 애써 무시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의 우매함에 대한 꾸짖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참고 및 인용 :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임종욱, 김해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사기(史記) 백이전(伯夷傳)에, 백이와 숙제는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들인데 왕위를 서로 양보했고,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자 천자를 공격한 신하라며 섬기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죽었다. 이후 두 형제는 중국에서 충신(忠臣)의 대명사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중국 명(明)의 16대이자 마지막 황제(皇帝)인 사종(思宗)의 연호(年號). 사종 재위기간은 1628 ~ 1644 [본문으로]
  3.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로 [본문으로]
  4. 조계원(1592 ~ 1670)은 세자시강원보덕으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그를 시종하며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심양에서 돌아와 동부승지, 강화유수, 도승지, 경상감사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른 뒤 사직했다. [본문으로]
  5. 명나라의 장군으로 산해관(山海關)에서 청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다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오히려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북경을 공격했다. 그 뒤 중국 전토 평정에 앞장서 공을 세우고 귀주(貴州)의 총관이 되어 권세를 누리다 강희제(康熙帝)가 철수명령을 내리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본문으로]
  6. ‘총사령관’격의 옛 직책 [본문으로]
  7. 명(明)나라 말기의 군사전략가로 명의 15대 황제 희종(熹宗)의 스승이었다. 귀향해 있던 중 청 홍타이지[皇太極]가 경도(京都)를 포위 공격할 때에 희종 급히 소환하여 계책을 만들게 하여 청군(清軍)을 물리쳤다. 그러나 다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귀향했다가. 1638년에 청군이 대거 공격할 때에 고향인 고양(高陽)을 지키다가 전 가족이 전사했다. [본문으로]
  8.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물과 불의 교합 도인술(導引術)의 하나 [본문으로]
  9. 정승 집의 청렴한 청지기로 있으면서 주인의 목숨을 구한 인물 [본문으로]
  10. 2차 나선정벌로 알려진 정유년(1657년)에, 다시 또 청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하여 조선군대가 징발되었을 때 조선 군대의 비장(裨將)으로 참여하여 흑룡강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군의 배들을 큰 불화살을 쏘아 불태워 러시아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 [본문으로]
  11. 여기서 칭하는 완흥군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박지원 전 시대의 인물로 완흥군으로 봉해진 인물은 임진왜란 때의 무신(武臣)으로 이억기(李億祺, 1561 ~ 1597)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합세해 당항포(唐項浦), 한산도(閑山島), 안골포(安骨浦), 부산포(釜山浦)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참소로 하옥되자 무죄를 변론했고 칠천량 싸움에서 전사했다. [본문으로]
  12. 1756년 [본문으로]
  13. 1773년 [본문으로]
  14. 평안도 성천(成川)에 있는 물 이름 [본문으로]
  15. 천부 동북 30리에 있는 흘골산(紇骨山). 속칭 무산(巫山) 12봉 [본문으로]
  16. 당나라 때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 768 ~ 824)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시한 화려한 형식의 변려체를 배격하고 고문(古文), 즉 한대(漢代)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의고체를 제창하여 산문 문체를 개혁하였다. 그의 선조가 지금의 랴오닝성 금주(錦州)인 창려(昌黎)에 살았으므로 세인들은 그를 한창려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17. 원전(原典)에 한 글자가 탈락되었다. [본문으로]
  18.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가문 [본문으로]
  19. 사교(邪敎) [본문으로]
  20. 서대문 밖에 있던 평동(平洞) [본문으로]
  21. 김영동 교수 번역문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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