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가 당대에 세간의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진부한 관념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근간으로, 사물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지원은 그것을 고리타분하지 않은 문체로 풀어냈다. 박지원은 그가 늘 비판했던 사대부들의 판에 박힌 글과는 달리 구어체 중국어나 소설 문체도 사용하고 토속적인 속담을 섞기도 하였으며, 아랫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거리낌없이 인용하였다. 거기에 해학과 풍자까지 곁들였다. 문체 때문에 정조에게 질책을 받고 일부 사대부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이 가볍거나 천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이 글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글 읽는 선비들에게는 내용이나 문체 모두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새롭고 신선한 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선비들에게 ‘글 읽는 즐거움’을 일깨어준 최초의 글이었을지도 모른다.
『열하일기』가 완성된 것은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온 뒤 2년이 지나서인 1783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글을 다 쓰기 전부터 그것을 베껴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전국에 퍼지고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열하일기』 필사본이 9종이나 남아 있다 하는데, 이는 박지원이 완전히 마무리 짓기 전의 글을 옮겨 쓰면서 그 때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옥갑야화(玉匣夜話)」는 그 중의 한편이다. 「옥갑야화」는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이라는 마을에 묵으면서 밤에 일행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적은 글이다. 중국 무역과 관련된 조선 역관(譯官)들의 일화들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그 주제는 ‘의리’와 ‘신뢰’이다.
<허생전>은 이 「옥갑야화」의 말미에 들어있다.
조선시대의 역관은 통역이 공식적인 업무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역원 소속의 역관이 약 6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실제 관직을 부여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역관은 70여명에 불과했을 뿐, 대다수의 역관은 임시직으로 제대로 된 녹봉조차 없었다. 그래서 역관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직업이었다.
그러던 중 역관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왜란과 호란을 겪어 재정이 부족했던 조선 정부는 사행(使行)에 필요한 경비를 제대로 지급할 여력이 없자, 역관들에게 얼마의 자금을 주고 그 자금으로 중국에서 무역을 하여 사신들의 경비를 조달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역관들에게는 80근의 인삼이 무역자금으로 주어졌다. 당시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그 효능이 입증되어 인기가 높은 품목이었다. 인삼은 수출량을 제한하는 무역 통제품이기도 했다. 숙종 8년인 1682년 당시 인삼 1근 가격이 은(銀) 25냥이라 하는데 이를 환산하면 인삼 80근은 은 2000냥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역관들은 이를 밑천으로 무역을 하여 경비를 조달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때 역관들은 사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에 한번 들어가기를 모두 간절히 원했었다고 한다.
일본은 16세기 중반부터 명나라와의 교류가 끊겼는데 이 때문에 일본은 필요한 물품을 조선을 통하여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역관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과의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일본이 청과 국교를 수립하고 필요한 물품을 중국에서 직접 사들이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과의 무역이 쇠퇴함에 따라 판로가 막혀, 역관들은 사행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때로는 모자라는 경비를 사적으로 보충해야 되는 일도 있어서 살림까지 궁핍해졌으며, 그로 인해 살길을 찾아 다른 직업을 택하는 역관들이 늘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옥갑야화」에 나오는 역관들의 이야기는 그런 시대를 모두 아우른 이야기들이다.
옥갑으로 돌아와서 여러 비장(裨將)2들과 침상을 나란히 하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옛날에는 연경(燕京)의 풍속이 순박하여 역관들에게는 비록 만금이라도 빌려 주고는 했으나 지금 저들은 속이는 것이 능사인바, 그 잘못은 미상불 우리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30년 전에 한 역관이 빈손으로 연경에 와서 장차 돌아갈 무렵에 그 단골 주인을 보고는 엉엉 울었다고 한다.
주인이 괴이쩍어서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압록강을 건너올 적에 몰래 남의 은을 맡아 가지고 오다가 발각되어 제가 가졌던 포(包)와 함께 관청에 몰수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려니 살 길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면서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드니, 주인은 놀라서 재빨리 끌어안고 가진 칼을 빼앗고는 물었다.
“몰수당한 은은 얼마나 되는가?”
“삼천 냥이올시다.”
주인은 위로하면서
“대장부가 몸이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지, 돈 없는 것이야 걱정할 게 있나. 지금 죽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처자들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대에게 돈 만 냥을 꿔줄 터이니 5년 동안 식리(殖利)3를 하면 다시 만 냥은 더 얻을 것이네. 그때 가서 본전만 갚게나.” 하였다.
역관은 돈 만 냥을 얻어 물화를 크게 무역해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정을 아는 자가 없어서 누구나 그의 재주가 신통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5년 만에 드디어 큰 부자가 되어 즉시로 사역원에 등록된 관직을 삭제하고 다시는 북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한번은 가만히 북경 가는 친구에게, “ 연경 가서 만약에 아무 주인을 만나 안부를 묻거든 반드시 우리 집이 역병에 몰사 당했다고 말하게나.”하고 부탁하니, 그 친구는 이야기가 너무도 허황하므로 주저하였던바, 그 역관은 만약 그렇게만 하고 돌아오면 꼭 돈 백 냥을 주리라고 약속하였다.그 친구는 연경에 가서 과연 그 주인을 만났는데, 그 주인은 역관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부탁받은 그대로 자세히 말을 전했더니 그 주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하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면서,
“하느님 맙소사. 어쩌자고 그런 착한 사람 집에 그 같은 참혹한 재앙을 내렸을꼬!” 하고는 드디어 돈 백 냥을 내어주며 부탁하기를,
“그는 처자까지 다 죽었으니 제사 지내 줄 사람도 없을 터라. 그대가 고국에 돌아가더든 나를 위하여 50냥으로 재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 주고 50냥으로는 추후로 그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려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그 친구는 정신없이 놀랐으나 이미 거짓말을 해놓았으므로 할 수 없이 돈 백 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그 역관의 집을 찾아갔더니, 벌써 정말로 역병에 걸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몽땅 몰사를 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크게 놀란 데다가 또 겁이 더럭 나서 그 돈 백 냥으로 주인 몫으로 재를 올리고는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주인을 다시 볼 것인가’ 하면서 죽는 날까지 다시는 연경 걸음을 하지 않으리라 각오하였다.
또 이야기하였다. 지사(知事) 이수(李樞)는 근세의 명역관인데 평소에 한 번도 입으로 돈 이야기를 한 일이 없었고 연경 출입한 지 40여 년 동안 손에 은을 잡아 본 적이 없어서 언제나 화락한 군자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야기하였다.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 ~ 1620) 연간의 명역관이다.
연경에 와서 한번은 창루(娼樓)에 놀러갔다. 창녀 가운데는 인물에 따라 해웃돈이 차이가 났는데, 하룻밤에 천 냥 돈을 내라는 여자가 있었다. 홍순언은 돈 천 냥을 내고 하룻밤 자려고 했더니, 그 여자는 방년 16세로 인물이 뛰어나게 잘났는데 홍군을 보고는 눈물을 지으면서,
“제가 비싼 값으로 사람은 찾은 까닭은 진정으로 보아 천하에 남자란 모두 인색한 자들로 천 냥 돈을 내놓을 자가 없을 줄만 알고 하루, 이틀, 이 욕을 면하기만 믿었던 터입니다. 본래는 관주(館主)를 속이려고 했던 것이요, 한편으로는 천하에 의협심 있는 분이 저를 속량하여 첩으로 삼아 줄 것을 바랐던 터입니다. 제가 창루에 온 지 닷새인데 감히 천 냥을 내고 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 다행히도 천하에 의협심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마는 공께서 외국분이라 법이 있어 저를 데려가시지는 못할 터이요, 그렇다고 이 몸이 한번 물이 들면 다시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홍군은 그를 불쌍히 여겨 창루에 들어온 까닭을 물었더니, “저는 남경(南京) 호부시랑 아무개의 딸인데 입안이 적몰(籍沒)4당하고 또 뒷돈을 물어야 되겠기로 제 몸을 창루에 팔아 아버지의 목숨을 속죄했습니다.” 했다.
홍군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참으로 그런 줄 몰랐구나. 오늘 당장에 누이를 속량할 터이니 몸값이 얼마인가?”
“이천 냥입니다.”
홍군은 그 자리에서 돈 2천 냥을 내어 주고 작별하였다. 여자는 수없이 절을 하면서 은혜로 정한 아버지[恩父]라고 부르면서 갈라졌다. 홍군은 그 후 이 일을 다시 염두에 두지 않고 다 잊어버렸다.
홍순언이 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들어가는 연도(輦道)에서 홍순언이 오지 않느냐고 여러 번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홍군은 이상스럽게 생각하면서 북경 가까이까지 왔는데 길옆에 성대하게 장막을 치고 있다가 홍군을 맞는 자가 있었다. 그 병사는 석 대감의 뜻을 받아 마중 나왔다고 하였다. 그가 석 대감의 집에 닿았더니 석 상서(石尙書)5는 절을 하면서 영접하고 은혜로 맺은 장인[恩丈]이라고 부르면서, “따님이 장인을 기다린 지가 오래외다.” 하였다. 이내 악수를 하고 내실로 들어가니 부인이 성장을 하고 뜰아래 내려가 절을 하였다. 홍군은 황공스러워 어쩔 바를 모르고 있으니, 상서는, “장인은 오랫동안 딸을 잊으셨나 보외다.” 하였다.
홍군은 비로소 이 부인이 창루에서 속량해 준 여자인 것을 알았다. 이 여자는 창루를 나오자 즉시로 석성(石星)의 후처가 되었다. 귀부인이 되었지마는 손수 비단을 짰는데 모두 “보은(報恩)‘이란 글자를 수놓았다고 한다. 홍군이 귀국하게 되자 이 보은단(報恩緞) 외에 비단과 금은을 수없이 선물하여 전송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석 상서가 군대를 맡고 있으면서 출병을 주장한 것6은 석씨가 본디 조선 사람과 의리를 맺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또 이야기하였다.
조선사람 장사꾼의 단골 주인으로 정세태(鄭世泰)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북경에서 제일 가는 부자라고 하였다. 세태가 세상을 떠나자 살림은 다시 일어날 수가 없을 만큼 여지없이 파산했다고 한다.세태는 단벌 손자 하나를 두었는데 그는 남자 중 일색으로 인물이 잘났으나 어릴 때 잡기 놀이판에 몸이 팔렸다고 한다. 세태가 살았을 때 그의 점원으로 있었던 임(林)가란 사람은 누만 거부가 되었는데, 놀이터에서 구경을 하다가 웬 미남자가 재주 노는 것을 보고 마음이 끌려 누구인지 물어 보고는 정세태의 손자임을 알게 되자 서로 만나 붙들고 울면서 돈 천 금을 내어 속량을 하고 함께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사람들을 보고 신칙(申飭)7하여,
“잘 대접하라. 이 사람이 우리 집 옛 주인이시다. 놀이판에 있었다고 조금이라도 괄세를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그 재산을 절반 갈라 세업을 삼게 해주었다. 세태의 손자는 몸이 비대하고 희멀쑥하게 잘났는데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다만 연 띄우는 놀이를 하면서 북경 시중에서 놀았다고 한다.옛날은 물건을 매매할 때 포장을 풀고 점검하는 법이 없이 북경서 묶은 짐짝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 장부와
대조해 보면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흰 털모자[白毳帽]를 묶어 보낸 일이 있었는데, 돌아와 열어
보니 모두가 흰 모자[白帽]라 검열 못 한 것을 스스로 몹시 후회하였다. 그런데 정축년에 두 번 국상(國喪)을
만나8 도리어 곱쟁이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히 얻은 재물이며 역시 인심이 점차 옛날과
달라진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근년에는 물품 포장을 자신이 하게 되고 주인에게 맡겨 포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야기하였다. 변승업(卞承業)이 병들었을 때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한번 알아보려고 점원, 서기들을 다 모으고 장부를 맞춰 본 결과 은으로 50만 냥이었다. 그의 아들이 재산을 널어 놓은 지 오래되어 번폐스럽고 축도 나겠으니 즉시 거둬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했더니 변승업은 나무라는 말로,
“이는 서울 안 만 호의 명맥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를 끊고 서둘러 돌려받을 것인가?” 하였다.
승업은 노경에 그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내가 섬긴 대관들이 많았지마는 국가의 여론을 한 손으로 틀어쥠으로써 가계를 삼은 자치고 삼대를 내려가는 집을 보지 못했다. 지금의 여론은 국내에서 재물 만지는 사람들로서는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으로써 높고 낮은 층하를 삼는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여론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헐지 않으면 재앙이 미칠 것이다.”
이래서 그의 자손이 번성하였는데도 모두 가난했던 것은 승업이 노경에 재물을 많이 헐었던 까닭이다.
나 역시 이야기하였다. 윤영(尹映)이란 사람이 있어 늘 변승업이 재산 많은 이야기를 말했는데 그 재물이 옛날부터 국내에서 제일이라 하였고 승업의 대에 와서 좀 줄었지마는 처음 그의 재산이 물어 일어날 때는 운수가 없다고 할 수 없었으니, 허생(許生)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이상하다 할 수 있다. 허생은 필경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
윤영이 이르기를...
이렇게 윤영이란 사람에게 들은 것처럼 자락을 깔고, 박지원은 뒤를 이어 허생전(許生傳)을 썼다.
글에 등장하는 윤영이 실존 인물인지의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박지원이 만들어낸 인물이거나 아니면 있었던 인물의 이름만 차용한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반면 부자 변승업(卞承業)은 실존 인물로 역관이었다. 인조 1년인 1623년에 태어나 숙종 35년인 1709년까지 살았다. 23세 때인 1645년에 역과시험에 합격하였고, 1680년에 대마도, 1682년에는 일본에 다녀온 기록으로 미루어 왜학(倭學) 역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684년에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받았다 하여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2005., 신병주, 노대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원단(元旦)을 맞이하여 제국 안팎에서 온 사절단이 건륭제를 알현하는 장면 [본문으로]
- 조선시대 감사, 절도사 등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수행원이다. 무관이지만 수령의 막료(幕僚)격이어서 상당한 행세를 하였다.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遣外使臣)에도 비장들이 수행하였다. [본문으로]
- 재물을 불리어 이익을 늘림 [본문으로]
- 중죄인의 소유 재산을 모두 관의 장부에 등록하여 몰수함 [본문으로]
- 중국의 진나라 이래 천자와 신하 사이에 오가는 문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 이 벼슬이 점차 높아져서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 중앙 정부의 수위(首位)에 앉아 육부의 장관이 되었다가 뒤에는 중앙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본문으로]
- 석성(石星, 1538 ~ 1599)은 명나라 대명부(大名府) 동명(東明)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많은 반대 의론을 물리치고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본문으로]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 [본문으로]
- 1757년에 21대 국왕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 승하와 19대 국왕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의 승하(정성왕후가 승하한지 한 달 만에 승하)한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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