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출신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두 명의 학자>]
양반(兩班)은 원래 관제상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벼슬과
관계없이 지배 신분층으로서의 사족(士族)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널리 쓰였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이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다. 조선 왕조가 햇수를 더해 가는 동안 같은 양반이라도 문묘에
종사된 대현(大賢)이나 종묘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배출한 국반(國班), 즉 온 나라가 인정하는 양반 가문이
생겨났고 대가(大家) 또는 세가(世家)라 불리는 권문세가가 등장했다. 또한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인
벌열(閥閱)과 정권에서 소외되어 지방에 토착 기반을 둔 향반(鄕班)의 구별도 생겨났다. 향반 중에서도 가세가
몰락한 양반은 잔반(殘班)이라고 불렸고 벌열(閥閱)이 아닌 미천한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 양반과 그 밑의 중인, 상민, 천민의 구별은 엄격히 유지되었었다.
하지만 굳건했던 조선의 신분체제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면 대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서민계층과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몰락양반 사이에서 신분의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박지원은
그런 사회상황을 소재로 삼아 <양반전(兩班傳)>을 지었다.
<자서(自序)>
선비란 바로 천작(天爵)이요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1
그 뜻은 어떠한가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이름 절개 닦지 않고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삼아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
이에 양반전(兩班傳)을 짓는다.
박지원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양반전(兩班傳)>은 문벌과 세덕(世德)을 팔려는 양반을 장사치나 다름없는
인물로 다룬 소설이어야 한다. 그러나 <양반전>에서 박지원이 ‘양반다움’을 잃은 양반의 처세를 힐난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소설의 전체 맥락도 돈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반전>은 양반에 대한 풍자소설이 아니라 제도에 대한 비판소설로 읽힌다. 박지원은 소설에서 신분을 팔려는
양반을 나무랄 데 없는 선비처럼 소개한다. 그런 선비가 먹고 살 길이 없어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그래서
그 빚을 갚기 위해 양반 신분을 팔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어느 양반 개인의 잘못인가?
박지원은 이 어진 선비가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의 문제점을 애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직설적으로 얘기했다가는 어찌 될지 모를 자신의 미래도 두려웠을 것이다. 자서에 양반에
대하여 쓴 말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후환에 대한 방패막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박지원은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당대의 비(非) 양반계층에게 경종을 울리고도
싶었던 듯하다. 자서 첫머리에 썼듯이 박지원은 선비는 ‘하늘에서 받은 벼슬(天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그런 신분을 돈으로 사고판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생각한 것이다. 또한 양반은 신분의 차이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반전>이 당대에 널리 읽혔던 것 또한 그런
박지원의 생각에 많은 양반과 선비들이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양반(兩班)이란 사족(士族)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정선(旌善)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군수가 새로 도임하게 되면 반드시 몸소 그의 오두막집에 가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還穀)2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빚이 1천섬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
하고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소방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고 있으니 그의 아내가 몰아세우며,
“당신은 평소에 그렇게도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만 현관(縣官)3에게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쯧쯧! 양반이라니, 한 푼짜리도 못 되는 그놈의 양반.” 이라 했다.
그때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식구들과 상의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높고 귀하며,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늘 낮고 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한다.
또한 양반을 보면 움츠러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뜰 아래 엎드려 절해야 하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욕을 보는 신세다. 지금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 이만저만
군욕(窘辱)4을 보고 있지 않으니 진실로 양반의 신분을 보존 못할 형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양반을
사서 가져보자.” 하고서
그 집 문에 나아가 그 환곡을 갚아 주겠다고 청하니, 양반이 반색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자는
당장에 그 환곡을 관에 바쳤다. 군수가 크게 놀라 웬일인가 하며 그 양반을 위로도 할 겸 어떻게 해서 환곡을
갚게 되었는지 묻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그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
아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 붙들며,
“그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욕되게 하시오?” 하니까,
양반이 더욱더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땅에 엎드리며,
“황송하옵니다. 소인 놈이 제 몸을 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곡을 갚기 위하여 이미 제 양반을 팔았으니,
이 마을의 부자가 이제는 양반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예전의 칭호를 함부로 쓰면서 스스로 높은 척하오리까?” 했다.
군수가 탄복하며,
“군자로다. 부자여! 양반이로다. 부자여1 부자로서 인색하지 않은 것은 의(義)요, 남의 어려운 일을 봐준 것은
인(仁)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바라는 것은 지(智)라 할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양반이로고. 아무리 그렇지만 사적으로 주고받았을 뿐, 아무런 증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소송의 빌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그대는 고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증서를 작성하여 믿게 하자.
군수인 나도 당연히 자수(自守)로 수결(手決)할 것이다5.” 하였다.
그리고 군수는 관사로 돌아와, 고을 안의 사족 및 농부, 장인, 장사치들을 모조리 불러다 뜰 앞에 모두 모이게 하고,
부자를 향소(鄕所)6의 바른편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7의 아래에 서게 하고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했다.
“건륭(乾隆) 10년8 9월 모일 위의 명문(明文)9은 양반을 값을 쳐서 할아 관직을 갚기 위한 것으로서 그 값은
1천 섬이다. 대체 양반이란, 그 이름 붙임이 갖가지라. 글 읽는 이는 선비 되고, 벼슬아치는 대부(大夫)10 되고,
덕(德) 있으면 군자란다. 무관(武官) 줄은 서쪽이요, 문관 줄은 동쪽이라. 이것이 바로 양반, 네 맘대로 따를지니.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五更)11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12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13를
외워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14
침을 입 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옷소매로 휘양15을 닦아 먼지 털고 털 무늬를 일으키며,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느린 걸음으로 신발을
끌듯이 걸어야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16, 「당시품휘(唐詩品彙)」17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글자씩 쓴다.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버선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밥보다 먼저 국 먹지 말고,
술 마시고 수염 빨지 말고, 담배 필 젠 볼이 옴폭 패도록 빨지 말고, 분 나도 아내 치지 말고, 성 나도 그릇 차지
말고, 애들에게 주먹질 말고, 뒈지라고 종을 나무라지 말고, 마소를 꾸짖을 때 판 주인까지 싸잡아 욕하지 말고,
병에 무당 부르지 말고, 제사에 종 불러 재(齋)를 올리지 말고, 화로에 불 쬐지 말고, 말할 때 입에서 침을 튀기지
말고, 소 잡지 말고 도박하지 말라.
이상의 모든 행실 가운데 양반에게 어긋난 것이 있다면 이 문서를 관청에 가져와서 변정(卞正)18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旌善) 군수(郡守)가 화압(花押)19하고 좌수(座首)20와 별감(別監)이 증서(證書)함.“
이에 통인(通引)21이 여기저기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가 엄고(嚴鼓)22치는 것 같았으며, 모양을 북두칠성과
삼성(參星)이 종횡으로 늘어선 것 같았다. 호장(戶長)23이 문서를 다 읽고 나자 부자가 어처구니없어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양반은 신선 같다는데,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도 심하게
횡령당한 셈이니, 원컨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 주옵소서.” 하므로, 마침내 증서를 이렇게 고쳐 만들었다.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사농공상(士農工商) 넷이로세.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한지라, 양반으로
불리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 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세.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요,
서른에야 진사 되어 첫 벼슬에 발 디뎌도 이름난 음관(蔭官)되어 웅남행(雄南行)24으로 잘 섬겨진다.
일산(日傘) 바람에 귀가 희고 설렁줄에 배 처지며25, 방 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26,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 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부자가 그 문서 낭독을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한 일이오. 장차 날더러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가서는,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
[1886년 한양의 성밖 모습. 높은 성벽이 눈에 띈다]
참고 및 인용 :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선비의 마음(士 + 心) = 뜻(志) [본문으로]
- 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던 진휼(賑恤,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자, 혹은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자 등을 구제하는 것)제도 [본문으로]
- 현(縣)의 우두머리인 현령이나 현감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정선 군수(郡守)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곤욕(困辱) [본문으로]
- 자수는 자신의 손, 수결은 자신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에 자필로 글자를 직접 쓰는 것 [본문으로]
- 유향소(留鄕所) 또는 향청(鄕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사림 세력을 기반으로 한 향촌(鄕村) 자치의 핵심 기구. 여기서는 향소의 일을 보던 건물을 뜻함 [본문으로]
-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 이방(吏房), 형방(刑房)의 3관속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 건륭은 중국 청나라 고종 때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6년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건륭 10년은 1745년으로 영조 21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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