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2 - 대마도

從心所欲 2020. 9. 14. 17:01

장군출신이었던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하는 한편 왜인의 왕래와 귀화를 장려하고 우대하는 등의 유화정책을 썼다.

조선이 건국 때부터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來者莫拒去者勿追)"는 정책을 펼치고 평화적 통교관계를 수립하자, 왜구는 줄어들고 대신 귀화자가 늘게 되었다. 당시 조선으로 온 왜인들은 사송왜인(使送倭人), 흥리왜인(興利倭人), 향화왜인(向化倭人), 항거왜인(恒居倭人)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송왜인은 외교 사절로 오는 왜인, 흥리왜인은 무역상인, 향화왜인은 조선에 귀화한 왜인, 항거왜인은 귀화는 하지 않고 왜관에 계속 거주하는 왜인이란 의미이다.

향화왜인 중에는 학문이나 기술을 갖춘 인물들이 소수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왜구 출신으로 질이 좋지 않은 부류였다. 조선은 이들에게 전답과 가옥을 주어 조선에서 살게 해주었는데 대부분은 경상도에 거주하였다. 귀화자 중에는 무관직을 받은 자도 있었다. 태조 이래 10년간에 귀화자의 수는 약 2,000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침입하였다. 특히, 1396년 8월 9일에는 왜구가 120척의 배를 몰고 경상도에 침입하여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하고, 병선 16척을 탈취하는 한편 수군만호를 살해하였다. 같은 달에 또 통양포, 영해성을 침략하는 등 이 해에만 13회나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은 왜구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태조는 12월 3일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여, 5도의 병선을 모아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를 치게 하였다. 이날 태조가 남대문 밖까지 나가 김사형을 전송하면서 내린 교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中外)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方伯)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大臣)에게 명령하여 출정(出征)하게 하는 것이니...(중략)...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하였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水陸)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하략)】(《태조실록》 태조 5년(1396년) 12월 3일 기사)

▶중외(中外) : 서울과 시골 경향(傾向) 또는 우리나라와 딴 나라

 

이후 김사형은 다음 해 1월 30일 한양으로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는데 태조가 돌아온 김사형을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거둥하여 그를 맞아 위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2달간의 행적은 오리무중이고 대마도로 출병한 내용을 전하는 기사도 없다. 출병에 따른 여러 여건이 마땅치 않아 아예 출정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 많은 왜구가 투항해 오고 계절이 겨울이었던 것도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은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그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속의 <순신역전(舜臣力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조선 전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속(續)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왕명으로 편찬되었다.]

 

이로부터 1년 반 뒤인 1399년 《정종실록》정종 1년 7월 1일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 도총관(都摠管) 종정무(宗貞茂)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과 말 6필을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형부시랑(刑部侍郞) 종정무(宗貞茂)는 정승(政丞) 각하(閣下)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오래도록 덕화(德化)를 앙모하였으나 첨배(瞻拜)할 길이 없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할아비가 일찍이 이 땅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말하기를, ‘감히 귀국의 큰 은혜를 저버릴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관차(官差)와 혹리(酷吏)로서 탐욕스런 마음을 방자히 하여 좌우(左右)에서 죄를 얻은 자가 어찌 부월(斧鉞)의 베임을 면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무리들이 지난해에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으니, 하늘이 패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불초(不肖)로써 할아비의 직책을 맡기었으므로, 이에 저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람되이 정성을 바칩니다. 대개 관서(關西)의 강한 신하들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함부로 날뛰는 군사를 써서 침략함이 극심하였습니다. 바다와 육지에 관(官)의 법(法)이 미치지 못하여, 변방 백성들이 해마다 마음대로 적선(賊船)을 놓아 귀국(貴國) 연해(沿海)의 남녀를 노략질하고, 불사(佛寺)와 인가(人家)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은 국조(國朝)에서 시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국토가 통일되어 바다와 육지가 평온하고 조용하여, 조정의 명령으로 엄하게 금하고, 인민들이 법을 두려워합니다. 금후로는 귀국 사람의 배가 거리낌 없이 내왕하고, 연해의 사찰과 인가가 전처럼 아무 탈 없이 경영하게 되는 것이, 배신(陪臣)의 마음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늘의 해가 밝으니 감히 식언(食言)하지는 못합니다. 삼가 단충(丹衷)을 다하고, 우러러 불쌍히 여기심을 바랍니다."】

▶배신(陪臣) : 제후의 신하인 대부(大夫)가 천자를 대할 때의 자칭하는 말이다. 왜국의 신하로서 조선을 왜국의 상국(上國)으로 인정하는 어휘 선택으로 보인다.

▶관차(官差) : 관에서 파견하는 관리

▶관서(關西) : 원래는 일본의 교토부, 오사카부와 시가현, 효고현, 나라현, 와카야마현, 미에현을 포함하는 간사이지방을 뜻한다. 아스카(飛鳥)로부터 헤이안쿄(平安京)에 이르기까지 왕부(王府)가 있었고, 명치유신 때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명실 공히 왜국의 중심이자 수도였기에 여기서는 왜국 정부를 지칭한다.

▶단충(丹衷)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정성

 

새롭게 대마도주가 된 종정무(宗貞茂)는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 예물을 바치고, 포로를 돌려보내는 등 호의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토물(土物)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면서 자신이 여러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울릉도(鬱陵島)로 옮겨 가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국(日本國) 왕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종정무가 대마도주로 있는 동안 대마도는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쌀과 콩 등 곡식을 받아갔고, 태종은 종정무가 구하는 범종(梵鍾), 대장경(大藏經), 화엄경 등도 보내주며 서로 화친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종정무의 조선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1417년에는 왜국에서 대마도주인 종정무를 토벌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종정무는 다음 해인 1418년에 죽었다. 소식을 들은 태종은 제물(祭物)과 제문(祭文)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어 종정무를 제사(祭祀)하게 하였다. 실록은 이에 대하여 “종정무가 대마도에 있을 동안에 위엄이 여러 도(島)에 행하여지고 우리 국가(國家)를 향하여 충성하고 여러 도적을 금제(禁制)하여 자주 변경(邊境)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특별히 후사(厚賜)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대마도주의 자리는 종정무의 아들이 이어받았다. 새로운 대마도주도 방물을 보내는 등 우호적 관계가 계속 되는 듯 보였는데, 이듬해인 1419년 5월 7일에 충청 관찰사가 "본월 초5일 새벽에 왜적의 배 50여 척이 돌연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이[都豆音串]에 이르러, 우리 병선을 에워싸고 불살라서, 연기가 자욱하게 끼어 서로를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라는 급보를 보내왔다. 이어 5월 12일에는 황해도 해주에 왜선 7척이 침입하여 도적질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때 해주 목사가 왜구 한 명을 사로잡아 병조에서 취조하였더니, "나는 대마도에 사는 사람으로 섬사람들이 다 굶게 되어, 배 수십 척을 가지고 절강(浙江) 등지에서 노략질하려고 하였으나, 단지 양식이 떨어져서 우선 비인(庇仁)을 털고, 다음에 해주에 와서 도적질할 것을 엿보며, 물을 길으려고 조그만 배에 타고 언덕에 오르다가, 홀지에 관병(官兵)에게 사로잡혔다“고 답했다.

 

이에 5월 14일에는, 전 해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과 새로운 왕 세종이 삼정승과 판서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방안에 대한 논의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답했으나, 유독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만이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고 답했다.

이에 태종은,

"금일의 의논이 전일에 계책한 것과 다르니,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고 했다.

 

그리하여 여러 번 왜구와 싸워 공을 세운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명하여,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軍丁)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6월 8일에 각도의 병선들을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서 기다리도록 계획을 세웠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중 충신편의 <상현충렬(象賢忠烈)> 송상현(宋象賢, 1551 ~ 1592)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다가 왜적을 맞아 왜적들이 성을 공격할 때 군사가 적어 성을 지킬 힘이 부족함을 알고는 쥐고 있던 부채에 편지를 써 아버지에게 보내고 사모관대를 정히 하고 북녘을 향해 두번 절한 후 앉아서 칼을 맞아 죽었고, 그 첩도 뒤따라 의롭게 목숨을 끊었다. 송상현에게 사후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 중 <열부동익(烈婦同溺)>]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 중 <이씨단지(李氏斷肢)>]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 중 <김씨단두(金氏斷頭)>, 아기를 안고 있는 김씨라는 여인의 목을 잘랐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 정벌을 동정(東征)이라 불렀다. 이종무가 이끄는 동정군(東征軍)은 바다 사정 때문에 예정보다 늦은 6월 19일에 거제도 남쪽 추봉도의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때 출병한 병선은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 명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6월 20일, 《세종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오시(午時)에 우리 군사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섬에 있는 도적이 바라보고서 본섬에 있는 사람이 득리(得利)하여 가지고 돌아온다 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하다가, 대군이 뒤이어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니, 모두 넋을 잃고 도망하고, 다만 50여 인이 막으며 싸우다가, 흩어져 양식과 재산을 버리고, 험하고 막힌 곳에 숨어서 대적하지 않거늘, 먼저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어 편지로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깨우쳐 이르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선 1백 29척을 빼앗아, 그중에 사용할 만한 것으로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또 도적의 가옥 1천 9백 39호를 불 질렀으며, 전후에 머리 벤 것이 1백 14이요, 사로잡은 사람이 21명이었다. 밭에 있는 벼곡식을 베어버렸고, 포로된 중국인 남녀가 합하여 1백 31명이었다. 제장들이 포로 된 중국인에게 물으니, 섬 중에 기갈이 심하고, 또 창졸간에 부자라 하여도 겨우 양식 한두 말만 가지고 달아났으니,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으리라 하므로, 드디어 책(柵)을 훈내곶(訓乃串)에 세워 놓고 적의 왕래하는 중요한 곳을 막으며, 오래 머무를 뜻을 보였다.】

▶도도웅와(都都熊瓦) : 종정무(宗貞茂)의 아들로 이어서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된 종정성(宗貞盛).

▶책(柵) : 울타리. 목책(木柵)

 

조선군에도 피해가 있었는데, 섬 안을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수하 장수와 군사 백 수십 명을 잃었다. 왜는 자신들의 사료에는 이 때 조선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정신승리의 기록을 남겨 놓았다. 동정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출발한지 14일 만인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 이것이 기해동정(己亥東征)이다.

그런데 동정군이 거제도로 돌아온 바로 다음날인 7월 4일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도를 거쳐 충청도에 이른 왜선 30여 척 중 일부가 전라도의 공선(貢船) 9척을 노략하고 대마도로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태종은 거제도에 있는 동정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맞아 싸우고 다시 대마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우의정 이원이 대마도에서 막 돌아온 군대를 바로 다시 보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군사를 정비하여 다시 쳐도 늦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태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으나, 이때에 정박해 있던 동정군 병선들이 바람에 부서지는 바람에 결국 9, 10월로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9월 20일에 대마도 도주 종도도웅와(宗都都熊瓦)가 항복할 것을 비는 문서와 함께 토물(土物)을 헌납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대마도는 지금 비록 궁박한 정도가 심해서 항복하기를 빌기는 하나, 속마음은 실상 거짓일 것이오. 만약에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면 괜찮겠소.“라고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는 다음해 윤1월 10일에 사람을 보내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이들이 뒤에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자, 같은 해 10월 태종은 다시 대신들과 대마도 정벌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이를 실제 실행하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태종은 1년 전에 대신들과의 술자리에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다시 정벌하러 가리라는 소문을 그가 어찌 듣지 않았겠소. 왜적이 이미 이 소문을 들었으니, 거짓으로 다시 정벌하는 것 같이 하여서, 그들을 동요시키다면, 또한 좋지 않겠소?"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선의 목적은 왜구의 출몰을 방지하는 것이지 대마도를 정벌하여 조선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기해동정으로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왜국 각지의 왜구들이 조선에 출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조선은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줄 것을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통상을 빌미로 조선을 찾는 왜인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삼강행실도》(초간본), 열녀편 중 <김씨사적>, 김언경의 아내 김씨는 1287년 왜구가 강간하려 들자 죽을지언정 욕을 당할 수 없다며 저항하다 살해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 중 <이부추애(二婦墜崖)>, 올캐와 시누이 사이였던 박씨와 권씨 두 여인은 왜적을 만나자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