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1 - 왜구(倭寇)

從心所欲 2020. 9. 13. 07:54

왜(倭)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을 갖기 전,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5세기 초기부터 약 1세기 동안의 섬나라 다섯 왕들 역시 스스로를 왜왕(倭王)이라고 자처했었다. 왜나라 ‘왜(倭)’ 자에 ‘유순(柔順)하다’는 뜻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강자에게는 고분고분한 섬 민족의 특성은 일찍부터 다 드러났던 모양이다.

 

이 ‘유순'한 족속들이 도적으로 돌변하여 왜구(倭寇)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인 13세기부터이다. 고려 때의 기록으로는 1223년에 왜구가 지금의 김해인 금주(金州)에 침입했다는 것이 가장 앞선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몽골과 한창 전쟁 중이던 때였다. 왜구는 1265년까지 고려를 11번 침입하였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숫자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다 2차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왜국 정벌을 위해 출동했던 이후, 왜구는 14세기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한반도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동안 뜸하던 왜구가 본격적으로 다시 한반도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다. 이때의 왜구들은 동해, 서해, 남해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안지역이 아닌 내륙까지도 침범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개풍, 예성강 일대에까지 출몰하는 바람에, 고려에서는 수도를 옮기자는 여론이 일어날 정도의 위협이 되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인한 원(元)의 위협으로부터 시작해서, 1·2차 홍건적의 침입, 원에 의해 고려 국왕으로 임명된 덕흥군(德興君)의 군사 침입에 이어, 원이 명(明)으로 나라가 바뀌면서 요동 지역이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북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해야 되는 상황이라 왜구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왜구로 인한 피해는 백성들이 곡식을 빼앗기고 살해당하고 납치당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고려가 14세기 이후 연해 지역을 간척하여 새롭게 마련한 토지에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국가는 남해와 서남해 지역이 황폐화되어 조세를 거둘 수 없었다. 또한 왜구가 조운선을 약탈함으로써 국가 재정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고려의 32대 왕인 우왕(禑王)때는 1374년부터 1388년까지 14년 동안의 재위 기간 내내 왜구에게 시달렸는데, 무려 378회에 걸친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때의 왜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강소성(江蘇省) 해안 지방까지 원정을 갔다.

왜구의 중국 침략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어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도 심각한 외교적 분쟁 요소가 되었다. 명은 중국에 왜구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고려가 막을 것을 요구하는 한편, 혹시라도 고려가 왜와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고려를 압박했다. 명의 이러한 압박은 고려 이후 조선에까지도 이어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고려와 조선은 나라 안의 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명의 의심과 협박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왜구를 토벌해야만 했다.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만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이는 명나라 수군의 모습. 16세기 명나라 화가인 구영(仇英)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왜구도권(倭寇圖卷)’에 실려 있다. '왜구도권(倭寇圖券)‘은 현재 일본 도쿄대 사료편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왜구도권(倭寇圖券) 중 왜구의 노략질 장면]

 

[왜구도권 속의 왜구 모습]

 

당시 왜국은 140년을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나라 안에 두 명의 천황이 존재하게 된 남북조시대였다. 북조(北朝)는 교토[京都]에, 남조(南朝)는 현재의 나라현[奈良県]에 해당하는 요시노[吉野]에 천황이 양립하면서,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던 중이라 나라가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남조는 북조에 비하여 열세였는데, 남조의 중심세력지가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인 규슈[九州]였고, 왜구는 대부분 대마도를 포함한 이 규슈지역의 해적들이었다. 왜구들이 한반도에 침입하여 약탈하고자 했던 것은 주로 곡식이었다. 이는 또한 약탈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당시 왜국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어려웠다는 정황이기도 하다.

 

왜구의 규모는 천차만별이었으나, 많을 때는 400여 척의 배를 몰고 침략한 경우도 있었다. 배의 크기에 따라 왜구의 수에 차이가 있겠지만, 작은 배에는 20명, 중간 크기의 배에는 30명 정도가 탈 수 있었다고 하니, 이로 미루면 많을 때는 만 명에 가까운 수가 몰려왔다는 얘기다. 적은 경우라도 20척 정도의 배를 몰고 왔다고 하니까, 그래도 왜구의 숫자가 수백 명은 된 것이다.

공민왕은 1366년 왜국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군[將軍]에게 사신을 보내어 왜구 단속을 요구하였고, 왜구를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왜구가 더욱 날뛰자 1375년과 1377년에 연이어 사신을 파견하면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수백 명을 데리고 온 성과는 얻어냈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막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무로마치막부가 지방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갖지 못한 한계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고려시대 왜구 침입지, 리그베다위키 자료]

 

이런 상황 속에서 고려는 한반도에 침입한 왜구와의 싸움에서 크게 세 번을 이겼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까지 이르러 공주를 함락한 뒤, 이어 논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가 고려의 관리와 장수가 잇따라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61세의 최영(崔瑩)이 분개하여 출정을 자청하였다. 우왕은 그의 나이를 들어 말렸으나, 최영은 거듭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출정하여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인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380년 8월에는 왜구가 5백척의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을 비롯한 금강 어귀지역인 진포(鎭浦)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하여 충청, 전라, 경상 3도 연안의 고을을 약탈하면서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죽은 시체가 산야를 덮었고, 왜구가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당시 최무선(崔茂宣, 1325 ~ 1395)은 조정 관리들의 반대와 비난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한 끝에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화약국(火藥局)이 설치되고 화통도감(火筒都監)을 맡아 각종 화포를 제작하고 있었다. 왜구가 진포를 침략하자 조정은 그 성능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에서 왜구 진압군의 부원수(副元帥)에 최무선을 임명했다.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화포를 배에 싣고 왜구가 들끓고 있는 진포로 갔다. 그리고 최무선은 왜구들이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둔 곳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였고, 왜구의 배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이에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은 육지로 올라와 먼저 상륙한 왜구들과 합류하여 내륙 각지를 노략하다가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놀란 고려 조정은 이성계(李成桂)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임명하여 왜구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이성계와 그의 장수들은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왜구와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하는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주변의 강이 죽은 왜구의 피로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고,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에 이르렀으며 왜구는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다시 1383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은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으로, 그는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이며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하여 군열을 다시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가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 도달하였는데,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정지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하여 선봉대선을 공격하자,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이 완파되고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고려시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로와 승전지,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경인문화사) 자료]

 

이러한 전과로 비록 왜구의 기세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결국 고려는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된다.

1389년 2월, 고려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인 박위(朴葳)를 파견하여 병선 1백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게 했다. 고려는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1387년에도 정지(鄭地)가 대마도 공격을 건의한 일이 있었으나 채택되지 않았었다.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와 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군사는 1만 정도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백여 척과 해안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또한 잡혀갔던 고려인 남녀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것이 최초의 대마도 정벌이었다.

 

 

 

참고 및 인용 :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이진한, 2014. 경인출판사), 인물한국사(정성희, 2011)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