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시대에는 어디서 먹고 자며 여행했을까? 1

從心所欲 2020. 9. 6. 17:08

여행을 하면 언제나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고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 걷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노새나 가마타고 가는 길은 거리도 멀고 일정도 짧지 않았을 텐데, 그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시대, 나라에서 중요하게 관리하던 길은 44개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양에서 전국으로 향하는 10개의 길이 주요 도로였다. 한양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의주로와 경흥로였다.

 

●의주로 : 한양 홍제원 → 고양 → 파주 → 개성 → 평양 → 의주

●경흥로 : 수유리점 → 양주 → 포천 → 함흥 → 길주 → 경흥

 

경흥로는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경흥까지의 길로 한양에서 금강산 입구까지 가는 빠른 길이자 함흥차사들이 갔던 길이다. 의주로는 평안북도 의주로 이어지는 길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다.

남쪽으로의 길은 6개가 있었는데 그 중 3개는 국토 남단까지 이르지만 셋은 중간에서 끝난다.

 

●동래로 : 한강 삼전도 → 광주 → 충주 → 문경 → 대구 → 밀양 → 동래

●해남로 : 한강 동작진 → 과천 → 수원 → 천안 → 공주 → 정읍 → 나주 → 해남

●통영로 : 한강 동작진 → 과천 → 천안 → 전주 → 산청 → 진주 → 사천 →고성(固城)

●봉화로 : 한강 삼전도 → 광주 → 이천 → 단양 → 봉화

●수원로 : 한강 노량진 → 시흥 → 수원

●충청수영로 : 소사점 → 평택 → 아산 → 예산 → 보령

 

그리고 각기 동과 서로 난 길이 하나씩 있었다.

 

●평해로 : 한강 광진 → 망우리현 → 양주 → 원주 → 강릉 → 삼척 →평해

●강화로 : 한강 양화진 → 양천 → 김포 → 강화

 

이렇게 보면 예전의 길들이 지금의 고속도로 수준은 아니더라도 사람의 왕래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길을 닦아 나그네로 하여금 그 길로 다니고 싶게 하는 것이 훌륭한 목민관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도성 주변의 도로가 쌀과 좁쌀을 운반하는 수레가 서로 부딪힐 지경인데도, 돌 한 개 빼내지 않고 배수 시설조차 만들지 않아 질퍽해서 가뭄에도 언제나 진창이라고 조선의 도로 사정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도로를 수리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의 지세가 험준하여 수레가 통행하지 못한다고 말하니 어찌 슬프지 않느냐고 한탄했다.

 

[동대문 성곽 위에서 촬영한 1880년의 종로]

 

1880년대에 서울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도 그의 기행문에서 조선의 열악한 도로 사정을 이렇게 기술했다.

【서울에는 큰길은 세 개뿐인데, 그 하나는 시가를 동서로 관통해 동대문에서 끝나고, 다른 두 개는 이 길로부터 직각으로 뻗어 하나는 대궐 정문으로 가고, 또 하나는 남대문으로 뚫려 있다. 이 길 중에 하나만이 환하게 터져 있어서 언제나 그 길의 너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대궐로 통하는 길이다. 다른 길에는 노점과 가게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우차가 다닐 만한 좁은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젠가 이 노점들이 철거되어서 그 전에 만들었던 대로의 길 너비를 본 적이 있었다. 다른 길들은 좁고 골목이 많으며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겨우 걸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처음에 길을 만들었을 때는 그렇게 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길 양옆에 있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조금씩 길을 침범해서 집을 자꾸 내어 짓고 점유자의 권리를 얻어가지고 제 마음대로 내버려 두었으므로 필경 공로(公路)를 점유하고 길을 막아 버리게 된 것이다. 길이 좁고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앞으로 나왔기 때문에 말 탄 사람 혼자 지나기도 힘들어서,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안장을 잘 다듬으며 조심스럽게 가야만 한다.】

 

다른 곳도 아닌 명색이 수도 한양의 대로가 이랬다. 더 신랄한 글도 있다. 1883년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高宗)의 사진을 처음으로 촬영하고 한국에 사진술을 소개한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그의 여행기에서 조선의 도로 사정을 이렇게 비판했다.

【조선의 도로는 도로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로 빈약하다. 그저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따라 만들어진 작은 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겨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자연적으로 생긴 이래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이라곤 미쳐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이런 점은 보수라고는 전혀 없는 조선의 풍습과 일치하는 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도로는 도성 내 가로(街路)와 읍성간의 연결도로인 외방도로, 즉 역로(驛路)로 나누어지는데, 도성 내 가로는 도로의 폭에 따라 대로(大路)는 56척, 중로(中路) 16척, 소로(小路) 11척이었다고 한다. 수도 한양의 가장 넓은 대로가 18m, 중로는 5m, 소로는 불과 3.5m 넓이였던 것이다. 외방도로는 이보다 더 협소했다고 하니, 지금의 지방도나 국도 2차선의 폭이 노견까지 합하여 11 ~ 12m 수준이고 이면도로나 농어촌 도로의 폭이 4 ~ 8m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시대 대부분의 도로는 거의 골목길 수준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길들이 이렇게 좁은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은 수레와 같은 운송수단의 이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조선시대에는 우마차에 짐을 실어 운반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우마차의 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우마차는 간혹 공공물자의 수송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짐을 운반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바리라고 불리는 짐 보따리를 짐승의 등에 얹어 이동시키는 방법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지나갈 수만 있으면 되었으니 굳이 길이 넓을 필요도 없었다. 조선의 빈약한 국가재정으로는 도로를 넓히고 또 그 도로를 유지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 보다는 기본적으로 그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에서 도로가 갖는 중요성은 국가 운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통신과 교통이라는 관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고 각 지방에서 공문을 중앙에 보내는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도로 여건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물론 공공 물자의 운송과 같은 부차적 기능도 있었지만 조선시대 대부분의 대량 수송은 수로를 이용했다. 수로 운송이 불가능한 구간에 대해서만 육로운송이 대신했는데, 이때도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민간 차원의 대규모 상업도 발달하지 않아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이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어서,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좁은 길 뿐이었다.

 

고대의 국가에서 문서를 전달하는 방법은 사람이 걷거나 뛰어가서 전달하거나 말을 타고 가서 전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긴급한 국가문서의 경우에는 말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기름만 넣으면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 말은 계속 달릴 수가 없고 혹 달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 지치면 속력이 늦어진다. 따라서 말을 갈아 탈 수 있는 조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설치된 것이 역참(驛站)이다. 역참(驛站)은 ‘역마을’이라는 의미다. 이를 역(驛)이라고도 했다.

말을 갈아타는 역(驛)이 나중에 기차역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면서, 기차를 ‘쇠 말’ 이라는 의미의 철마(鐵馬)로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주요 도로에는 약 30리 간격으로 역참이 설치되었다. 역참은 대개 각 읍 인근에 소재하였지만, 역 간의 거리가 중요한 설치 기준이었기에 역참의 위치가 반드시 기존의 집단거주지인 고을과 겹치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의 긴급한 소식은 군사적인 것이 많았기 때문에 역참은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兵曹)에서 관할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 41개의 도로에 540여 개의 역이 있었다. 특히 역은 삼남 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각 도의 관찰사에 소속된 종6품의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찰방도(察訪道)라 부르는 도로의 일정 구간과 그 안에 있는 역참들을 관장하였다.

 

역참에서는 말을 제공하는 것과 함께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나 왕래하는 사신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기능도 함께 담당하였기에 여러 건물이 있었는데 이를 역사(驛舍)라 한다. 역사에는 찰방이 역무를 총괄하는 행정관서인 동헌(東軒), 찰방의 침소인 내동헌(內東軒), 역리들이 실무를 보는 작청(作廳)을 비롯하여 사령(使令)과 통인, 역노비(驛奴婢)가 잡무를 보는 건물들과 마굿간, 말을 기르는 양마청, 마부들의 숙소 등이 있었다. 여기에 참점(站店)이라 하여 공무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도 설치되었다. 당연히 참점은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관리들은 이 참점보다는 고을 관아에 있는 객사(客舍)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객사는 원래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는 곳이면서, 외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는 곳으로 통상 관(館)으로도 불린다. 수령의 재량에 따라 방문자의 숙소로 제공되는 일이 흔했다.

▶30리 : 이때의 10리는 5.1 km였다고 한다. 따라서 30리는 15.3km.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상을 바꾼 수레(김용만, 2010, 도서출판 다른), 문화원형백과(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